168화. 도박사
콰아아아앙!
떨어지며 굉음과 함께 엄청난 먼지를 일으킨 용천검.
우우우…!
먼지가 뿜어짐과 동시에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황금빛 장막이 걷히기 시작했다.
아마도 로튼의 몸이 흔적도 없이 분쇄되었기 때문이리라.
쩌는군.
수리검와 유탈라스의 힘 증폭이 합쳐지며 만들어진 엄청난 파괴력.
용천검이 떨어진 땅은 조금 파인 수준이 아니었다.
주변까지 갈라져 운석이 떨어진 거 마냥 지형 자체가 변해버린 상태.
단점은 이건가.
끈적.
고개를 돌려 어깨를 바라봤다.
여기저기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데몬의 사체들.
하늘에 있던 녀석들까지 갈아버렸더니 생긴 사태였다.
완전 날아다니는 믹서기구만.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유탈라스의 비늘.
비늘을 감싸며 손을 떠난 수리검을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었다.
무협에 나오는 어검이 이런 느낌인가.
무협에서 어검술을 높게 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굳이 몸을 움직이지 않더라도 무기만을 움직여 적을 몰살시킬 수 있다니.
무척이나 매력적인 무기였다.
저벅.
잠시 용천검에 대한 만족감을 느낀 후.
몸을 돌려 기태랑에게 걸어갔다.
언제부턴지 바닥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던 기태랑.
로튼의 장막이 사라지며 기태랑의 몸은 다시 다이아몬드화 된 것 같았다.
“태랑 님, 괜찮으세요?”
기태랑의 능력은 돌아왔지만 걱정이 됐다.
몸 안쪽이 다친 거라면 오히려 몸이 다이아몬드화 된 게 치료를 못 하게 막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기태랑이 특유의 미소를 머금으며 상처 입었던 상체를 들춰 보였다.
와우.
감탄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피를 쏟아내고 있었던 상체의 상처.
그랬던 상처가 지금은 말끔하게 붙어 있었다.
“피를 좀 많이 흘려서 어지럽긴 하지만, 훨씬 낫군.”
기태랑이 목과 팔을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려보았다.
다행히 걱정했던 것처럼 장기가 다치거나 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엄청난 몸일세.
다이아몬드화 되며 언제 다쳤냐는 듯 금세 아물어버린 상처들.
새삼스레 이 정도면 진짜 불사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괜찮다는 말을 한 후 날 빤히 올려다보는 기태랑.
시뻘개서 그런가.
슥슥.
온몸에 칠갑되어 있는 피를 슥슥 닦고 있자.
기태랑이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훨씬 더….”
콰앙!!
“!!”
그 순간 들려오는 엄청난 소리.
꽤 떨어진 곳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더 있었던 건가…!
구체에 삼켜져 함께 날려졌던 비광을 떠올렸다.
내가 날려졌던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토롱과 유리아.
비광이 날려진 곳에도 데몬이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비광인가.”
태연한 기태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굉음이 들려온 쪽을 바라보며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고 있는 기태랑.
“태랑 님 좀 있다 봬요.”
그런 기태랑을 뒤로 한 채 다급하게 몸을 돌렸다.
기태랑의 능력을 무효화 할 수 있는 로튼은 잘게 분쇄되어 죽은 상태.
다시 능력을 되찾은 기태랑이 누군가에게 죽는 일은 없을 터였다.
“천천히 가도 돼.”
다급해하는 나를 향해 기태랑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광이 노네임드급 데몬과 싸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려진 미소였다.
“네가 안 왔다면 죽었을 놈이 이런 말 하면 웃기지만.”
슥.
고개를 돌려 비광이 있을 방향을 바라보는 기태랑.
잠시 그 방향을 보고 있던 기태랑이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장막처럼 능력을 완전 무효화시키는 녀석이 또 있는 게 아니라면, 비광이 지는 일은 없어.”
친구이기에 믿는다 같은 뉘앙스가 아니었다.
당연한 이치를 읊듯 기태랑이 여유롭게 말을 이어갔다.
“비광이랑 동전 던지기를 한 적이 있거든.”
머엉.
덤덤하게 말하는 기태랑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약간 당황스러웠다.
정확히는 많이 당황스러웠다.
동료가 강한 적과 싸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나오는 일반적인 반응이 아니었다.
보통이면 얼른 도우러 가야한다던지 그 녀석은 꼭 이길거야…! 하며 기도를 하기 마련인데.
기태랑은 어떠한 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덤덤하게 동전 던지기 했던 일을 말하고 있었다.
“난 앞면, 비광은 뒷면에 걸었지. 한 100번 던졌던 거 같고.”
여기까지 말한 기태랑이 고개를 돌렸다.
기태랑은 날 응시하며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다.
“백 번 중에 앞면이 몇 번이나 나왔을 거 같아?”
“5… 50번…?”
나름 확률과 통계에 근거한 정직한 답변이었다.
던져진 동전이 나올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두 가지.
확률은 50 대 50, 반반이었다.
싱긋.
내가 그런 대답을 할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기태랑.
잠시 후.
여전히 의중을 알 수 없는 기태랑의 말에 집중하고 있는 내 귓가로, 믿을 수 없는 결과가 들려왔다.
“0번.”
“…?”
“100번 던져진 동전에서 앞면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어. 전부 뒷면이었지.”
“…!”
콰아앙!
다시 한번 굉음이 들려왔다.
“행운의 신이 있다면.”
확신에 가득 찬 기태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놈 편인 수준이 아니라… 그놈이 행운의 신 그 자체일 거다.”
* * *
콰앙! 콰앙!
“신기한 힘을 쓰는구나!”
“넌 무식한 힘을 쓰는구나.”
비광을 향해 마렉의 주먹이 쉴새 없이 휘둘러졌다.
비광의 말대로 무식한 힘이었다.
한 번 부딪힐 때마다 공기까지 울려대는 괴력.
방어 없이 제대로 한 방 맞는다면 얼굴은 형체도 남지 않을 게 분명했다.
삭.
패 한 장을 뽑은 비광.
비광이 뽑은 패를 하늘로 던져 올렸다.
“12월의 야나기. 쏟아지는 비.”
비광의 읊조림과 함께 패에서 검은색 가시가 쏟아져 나왔다.
“!!”
쿠우우웅!
주먹을 휘두르다 말고 땅으로 주먹을 휘두르는 마렉.
마렉이 부서진 지반을 하늘로 날려 보냈다.
원래라면 반응하지 않았을 공격이었다.
마렉의 몸 주변은 단단한 갈색 갑주로 감싸진 상태.
웬만한 공격은 갑주에 튕겨 나갈 것이었기 때문이다.
‘위험하다.’
하지만.
쏟아지고 있는 검은색의 가시로부터 느껴지는 서늘함.
순간이지만 본능적인 위협을 느껴 지반을 들어 올리며 몸을 피했다.
콰가가가가--!
푸욱! 푹푹!
“크으…!”
예상대로였다.
너무 많은 수의 가시라 지반을 부수고도 한참을 쏟아진 가시.
처음 몇 개는 갑주에 튕겨 날아갔지만, 마지막 가시에는 갑주가 뚫려 몸에 닿고 말았다.
“이야 나름 단단한 갑옷이네.”
비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보통 가시가 아니거든. 가시 하나하나가 닿을 때마다 대상을 부식시키는 효과가 있어.”
치이익.
‘…!’
비광의 말대로였다.
갑옷을 뚫고 팔에 꽂힌 가시.
가시를 시작으로 팔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대체 무슨 능력이냐…!’
처음 시작은 순조로웠다.
주먹이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순조롭게 비광에게 접근한 마렉.
이제 한두 번의 주먹질이면 비광이 짓이겨질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 콰앙!
마렉의 주먹 앞으로 날아든 작디작은 화투패 한 장.
주먹은 그 작은 패에 막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으득.
생각처럼 힘이 통하지 않자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마렉.
비광이 그런 마렉을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은 잎은 10개 정도인가.’
고개를 내려 손에 들려 있는 패 한 장을 바라봤다.
7월의 홍싸리.
매달려 있는 잎의 개수만큼 적의 물리 공격을 방어해주는 패였다.
‘괴물은 괴물이군.’
웬만하면 적의 공격을 받아도 잎이 사라지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 홍싸리의 잎을 공격마다 소모 시키고 있는 마렉의 힘.
여기서 끝내두지 않으면 수많은 희생을 불러올 수 있는 강함이었다.
다행이라면 마렉이 주먹을 휘두르는 물리력 외에는 별다른 능력이 없다는 것.
‘빨리 끝내야겠군.’
지금은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아 당황하고 있는 마렉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비광의 능력을 알지 못해 만들어진 당황이었기에.
방어 횟수에 제한이 있다는 걸 알아채는 순간 아까와 같은 공격을 다시 쏟아부을 게 뻔했다.
“직접 때려봐서 알겠지만, 어차피 너의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뭐…!!”
비광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달려들 자세를 취하는 마렉.
마렉은 비광의 말에 동의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내기 하나 할래?”
“…?”
뜻밖의 이야기에 달려들려던 마렉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평소라면 벌레의 말 따위에 귀 기울이는 일 따위는 없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아무리 휘둘러도 닿지 못하고 있는 주먹.
적의 능력을 알 수 없었기에 이대로 대책없이 싸우는 건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무슨 개수작이냐.”
그렇다고 손쉽게 비광의 제안에 응해줄 생각도 없었다.
무슨 힘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기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별다른 의도는 없다. 재미가 없어서 말이야. 공격도 전혀 통하지 않는 상대로 손쉽게 이기는 게.”
“…!!”
으드득.
도발에 입술을 깨물긴 했지만.
아까처럼 무작정 달려들진 않았다.
공격이 안 통한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난 도박을 사랑해. 질지 이길지 패를 까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긴장과 스릴. 그것들이 항상 날 미치게 만들거든.”
도통 의중을 알아차리기 힘든 비광의 말.
마렉이 숨어 있는 속뜻을 알아차리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씨익.
그런 마렉의 반응에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지어 보이는 비광.
비광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나 스스로한테 리스크를 좀 줄까 하거든. 그래야 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훨씬 재밌을 테니까.”
슥.
비광이 품 안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앞면과 뒷면에 다른 그림이 새겨져 있는 동전이었다.
“앞면과 뒷면이 나오면 너가 한 대 때리게 해주지.”
“뭐라…?”
마렉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앞면과 뒷면 모두를 버리겠다니.
‘무슨 꿍꿍이냐…!’
의심스러워하는 마렉을 향해 비광이 걱정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의 확률이 올라갈수록 재밌으니까. 그래서… 어때? 손해볼 건 없잖아.”
비광의 말대로였다.
몹시 의심스럽지만 손해볼 건 없는 제안이었다.
딱 한 대.
한 대만 때릴 수 있다면 이 싸움을 끝낼 수 있었다.
비광의 말이 거짓일지라도 지금과 상황에서 마렉이 더 불리해질 건 없었다.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를 찾기가 힘든 내기 제안이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다만, 좋다.”
“현명하군. 바보가 아닌 이상 거절하면 안 되는 내기지.”
비광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전을 검지와 맞물려 있는 엄지 위로 올려놨다.
“난 이 동전이 앞면과 뒷면이 안 나온다에 걸지.”
비광의 말과 동시에.
우웅.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동전으로 스며들었다.
내기가 성립되었음을 나타내는 빛이었다.
“….”
처음과는 달리 조용히 동전을 바라보고 있는 마렉.
그런 마렉을 향해 묘한 미소를 그려 보인 후.
비광이 손가락을 튕겼다.
티잉!
앞면과 뒷면을 가진 동전.
잠시 공중으로 튕겨 올랐던 동전이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