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무기왕 아니고
“…?”
앞에 서 있는 이청아를 바라봤다.
츄리닝 차림에 졸린 눈을 비비며 나온 이청아.
이 오밤중에 이게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는 눈빛이었다.
그럴 수 있어.
안 그러는 게 이상했다.
지금 시각은 자정이 가까워져 오는 한밤중이었다.
김희연과 김소연을 구하러 갈 때 함께 했다곤 하나 이청아와는 딱 한 번 만난 사이.
그런 내가 전화를 해 불러냈으니 저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청아 님!”
이상한 건 알았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넸다.
마치 점심시간에 식당가를 지나치다 만난 듯한 텐션으로 말이다.
“아… 네! 오랜만이에요, 백운 님.”
기본적으로 내가 무기왕이란 사실은 비밀로 하는 스탠스였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모두를 속이기 위해 과한 노력을 하진 않았었고 그 덕에 기태랑과 비광을 제외하더라도 적지 않은 사람이 내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청아 역시 마찬가지.
지난번 김희연 김소연 구출 작전으로 내가 무기왕이란 걸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뜬금없지만 청아 님 도움이 필요해서요.”
“네? 제 도움요?”
어느 정도 설명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마음이 급했기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이청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혹시 가면서 얘기해도 될까요?”
“어… 네… 네.”
손까지 내밀자 동공지진을 일으키는 이청아였지만.
이전의 일로 날 신뢰하고 있어서인지 눈동자가 흔들리는 와중에도 손은 내밀고 있었다.
[이카로스 - 칼데아 윙]
휙.
“아!”
이청아가 더 놀랄 새도 없이.
날개를 꺼내 하늘로 날아올랐다.
“….”
비명을 지를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 밖이었다.
단지 순식간에 높아진 고도에 침착… 은 아니고 약간이지만 멘탈이 나간 느낌이었다.
이젠 뭔지 하나도 모르겠으니 흐름에 몸을 맡기겠다는 표정.
“갔다 와서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나 같아도 벙찌겠지만 어쩌겠어.
처음엔 혼자 출발할까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송유빈의 집은 진유석의 메시지에 남아있어 찾아 갈 수 있겠지만, 거기까지였다.
당장 뮤튜브에 동영상을 올리고 있는 놈의 정체나 거처를 모르는 상황.
다짜고짜 송유빈 집 근처를 뒤지며 시간을 허비할 순 없었다.
옛날부터 두뇌 회전은 기가 막히단 말이야.
지금 생각해도 스스로를 칭찬할 수 밖에 없는 떠올림이었다.
머릿속에서 유레카!란 단어와 함께 떠오른 인물, 이청아.
김희연을 찾을 때 일주일 내의 기억을 읽는 이청아의 사이코메트리가 많은 도움이 됐었다.
사람 찾는데는 청아 님 만한 사람이 없지.
“제가 사람을 찾아야 해서요.”
“사람요…? 누가 백운 님 돈 떼먹고 도망이라도 갔나요?”
“하하 아뇨. 무기왕 찐팬이 납치돼서 구하러 가야 돼요.”
“어!?”
무기왕 찐팬이란 말에 이청아의 얼굴로 놀라움이 번졌다.
“설마 CBC 송유빈 님요!?”
“바로 맞추시네요.”
단 번에 맞추는 이청아를 내려다보자.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이청아가 미소를 그렸다.
“당연하죠! 무기왕을 진심으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뽑으라면 송유빈 님이니까요. 공중매체든 개인방송에서든 안 가리고 찬양 일색이니까요.”
역시 당장 구해야겠어!
한 시라도 빨리 나의 바라기를 구해야겠다 다짐하는 순간.
팔에 안겨 있던 이청아가 고개를 내저으며 날 올려다봤다.
“대한민국 국민 리포터 송유빈 님이라니.”
척.
턱 바로 아래에서 엄지를 치켜든 이청아가 손을 내밀었다.
“역시 백운 님 클라스! 엄청나네요.”
* * *
순식간에 도착한 서울 송유빈의 오피스텔.
진유석에게 들었던 집으로 이청아와 함께 올라갔다.
슥.
고개를 들어 뜯겨진 자국이 있는 천장을 바라봤다.
다른 층은 복도마다 놓여져 있는 CCTV.
1층부터 송유빈의 층까지 올라오는 길의 CCTV만 전부 뜯겨져 있었다.
가면 안 써도 됐겠구만.
혹시나 싶어 가면 하나를 주워왔는데.
다 뜯겨 있는 걸 보니 괜한 짓을 한듯 했다.
“청아 님.”
“네, 제가 봐볼게요.”
문 앞으로 다가간 이청아가 눈을 감았다.
청아 님 안 데려왔으면 큰일 날 뻔 했네.
가장 먼저 떠올렸던 건 CCTV였다.
보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첫 생각만 가지고 무턱대고 왔으면 뜯겨진 CCTV를 보며 망연자실하고 있을 뻔 했다.
스륵.
눈을 뜬 이청아가 입을 열었다.
“무기왕 가면을 쓴 남자가 있어요.”
역시 가짜 새끼였구만.
집으로 가던 길 동시에 울렸던 두 개의 알람.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확신이 들었었다.
송유빈이 사라진 것에 가짜 새끼가 연관되어 있을 거란 확신이.
“그리고 그 남자의 부하로 보이는 자들이 다섯 명 있고요.”
유빈 님 한 명 데려가려고 여섯명?
양아치 새끼들이네 이거.
“애초에 이 집이 송유빈 님 집이란 걸 알고 있었어요. 올라오자마자 CCTV를 부수고나서도 문 앞에서 꽤 기다렸네요.”
바로 들이닥친 것도 아니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들으니 더 소름이 돋았다.
그나저나 이 새끼는 유빈 님 집을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지?
방송국 관계자인가?
국민 리포터로 유명인인 만큼 송유빈의 인적사항은 비공개 상태였다.
나 역시도 진유석이 아니었다면 찾아오지 못했을 터.
가짜 새끼는 어떻게 알고 부하들까지 끌고 와 죽치고 있었던 건지 궁금했다.
“송유빈 님은 아무것도 모른 채 나왔다가 가짜 무기왕과 맞닥뜨렸어요.”
이청아가 사이코메트리로 본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가짜와 만나기 무섭게 쫄기는커녕 가짜라고 욕을 박았다는 송유빈.
한 성깔 한다고 들었는데 진짜인 모양이었다.
괴한 대여섯을 앞에 두고도 그런 깡이라니.
“마지막에 송유빈 님은 목을 맞고 정신을 잃었고요.”
이런 개놈들이?
꽈악.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감히 내 찐팬한테 당수를 날리다니.
당수 때린 새끼 인상착의는 기억해뒀으니 제대로 되갚아줄 생각이었다.
저벅.
이청아가 사이코메트리 능력을 발동하며 걷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이동한 경로였다.
“송유빈 님을 데리고 1층까지 내려왔고.”
오피스텔 옆에 있는 골목길.
골목길로 간 이청아가 걸음을 멈췄다.
“이곳에 세워졌던 커다란 벤에 태워졌어요. 차 안으로 네비게이션이 보이는데… 음.”
이청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만큼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파이팅.
방해할까 싶어 소리내어 응원하진 못했으나.
마음속으로 이청아를 응원했다.
마지막에 말한 네비게이션이란 단어.
송유빈이 향했을 목적지가 찍혀 있을 것 같았다.
봐야 돼.
예전 이청아의 설명에 따르면 사이코메트리 능력은 뭐든 볼 수 있는 슈퍼 능력이 아니었다.
최근의 기억 중 사람의 사념 강도에 따라 보이는 선명도가 다르다고 설명했던 이청아.
만약 추가적인 소득 없이 송유빈이 벤에 태워진 채 기억이 닫혀버린다면 곤란했다.
차가 어디로 향했을 지 모든 길바닥을 뒤지며 이청아의 능력을 사용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
부디 이청아가 목적지를 알아내길 바라며 기다린지 몇 분.
눈을 뜬 이청아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서울 특별시 압구정로 443-8 번지요!”
* * *
백운과 이청아가 청담으로 향하고 있는 시각.
“으….”
집 앞에서 정신을 잃었던 송유빈이 눈을 떴다.
“뭐야?”
곧이어 들어오는 주변 모습에 송유빈이 눈살을 찌푸렸다.
흔히 생각하는 납치범의 은거지와는 몹시 다른 장소였다.
신경 써서 잘 가꾸어진 거대한 정원과 정원을 밝히는 아름다운 조명들까지.
송유빈이 정신 차린 곳은 드라마에서도 잘 안 나오는 호화로운 저택 정원의 한가운데였다.
‘이게 집이야 성이야.’
정원 끄트머리에 위치한 저택에 송유빈이 고개를 내저었다.
납치 당한 와중에 남의 집이 보인다는 게 아이러니하긴 했지만.
안 놀라기에는 너무나 웅장한 생김새였다.
주변 호화 저택을 몇 개를 공사로 이어놓은 듯 했다.
“깨어나셨습니까?”
뒤에서 점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훽.
잠시 집에 넋을 놓고 있던 송유빈이 목소리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따라만 하는 줄 알았더니 완전 범죄자 새끼셨네요.”
동영상에 나왔던 가면을 쓰고 있는 서태혁을 향해 송유빈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집 앞에서 저들을 만난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겠구나 각오는 했었기에.
말을 조심할 생각은 없었다.
“듣던대로 거침이 없군요. 제가 나가는 사교 모임에서 유명하시더라고요, 인간 치와와로.”
치와와란 단어에 송유빈이 입술을 깨물었다.
‘뭐 하는 새끼지?’
상사들에 의해 건너건너 듣고는 있었다.
아니다 싶으면 상대가 누구든 거침없이 내지르는 성격에 정재계 사이에서 치와와로 불린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런 호화로운 저택에 사교 모임이라.’
점점 더 가짜의 정체가 궁금해지는 송유빈이었다.
“날 잡아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이젠 존댓말마저 생략한 물음에 서태혁이 송유빈을 바라봤다.
“당신의 목소리는 영향력이 있으니까요. 두 번째 동영상이 올라간 뒤 생겨나는 여론에 변수가 생길까 싶어 일단 모셨습니다.”
송유빈이 미간을 찌푸렸다.
서태혁이 말하고 있는 두 번째 동영상.
집을 나서기 전 개인적으로 전송받았던, 무기왕의 이미지에 금을 그어버리는 동영상이었다.
여론은 그걸 무기왕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의 비난을 말하는 것이었다.
“무기왕한테 원한이라도 있어? 왜 사람을 납치까지 해가면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하하! 원한이라뇨, 그 반대입니다.”
서태혁이 정원의 조명을 향해 양팔을 들어올렸다.
“전 무기왕을 무척 좋아합니다! 몹시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고요.”
“그런데 왜 욕을 먹이려는 거야?”
“욕을 먹이다뇨, 큰 오해입니다.”
스윽.
정중한 자세로 스스로를 가리키는 서태혁.
“그저 새로운 무기왕에 적응할 수 있도록 조금씩, 약한 것부터 맛보게 해주는 거죠.”
새로운 무기왕이란 말에 송유빈이 고개를 내저었다.
“고작 기술 두어 개 따라 했다고 무기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편협하네, 편협해. 언제까지 통할 거 같아?”
“….”
조용히 송유빈을 바라보던 서태혁이 왼손을 들었다.
“고작 두어 개라 생각하십니까?”
“…?”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잠시 후.
후우우…!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
소리를 쫓던 송유빈의 눈이 커졌다.
후웅… 철컥!
멀리서부터 날아와 서태혁의 손에 안착한 것의 존재.
가장 최근 동영상에서 나왔던 플라잉 믹서기의 수리검이었다.
같은 무기일 리는 없지만 비늘이 덮여 있던 걸 제외하면 외관상으로는 완벽히 똑같았다.
스륵.
송유빈이 수리검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
서태혁이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
“다시 한번 제 소개를 하죠. 전 새로운 무기왕이 될 사람이기 이전에.”
송유빈을 향해 정중히 몸을 숙이는 서태혁.
“세계 사람들에게 한때는 천재 공학자의 새싹으로 불렸으며.”
촤라라락--!
자기소개를 하는 서태혁의 등 뒤로 총을 포함한 수많은 무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은 각국의 전장에서 사용되는 무기의 대부분을 제공하고 있는.”
서태혁의 얼굴로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그려졌다.
“무기상 서태혁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