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특이한 마부
덜컥. 덜컥.
아직 시야가 돌아오지 않은 상태.
몸이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위아래로 들썩거렸다.
사아아…!
조금씩 회복되는 시야에 정면을 응시했다.
무언가의 마차 안이었다.
정확히는 마차 뒤편에 실린 짐칸.
슥.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와우.
뒤편엔 나와 함께 많은 검이 실려있었다.
대충 봐도 백 자루는 거뜬히 넘는 숫자였다.
검을 싣고 어디로 가는 거지.
고개를 돌려 주변 풍경을 살폈다.
딱히 특이점 같은 걸 발견할 수 없는 평범한 숲길이었다.
몸을 움직일 수 있지만.
마차를 벗어날 수는 없는 모양이네.
많이 부식된 상태였던 검날.
아마도 뒤에 실린 검들 중 하나가 검날의 주인일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검의 기억인 만큼 난 마차에서 나가지 못하는 것이고 말이다.
어쩔 수 없지.
이왕 나가지 못하는 거 마음이라도 편하게 있자는 생각에.
털썩.
약간 남은 공간으로 몸을 앉혔다.
오랜만에 찾아온 고요함에 뭐라도 보일 때까지 심신의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스으읍.”
다소 추한 소리를 내며 숲속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코를 타고 몸 전체로 상쾌한 숲 내음이 퍼져갔다.
상쾌하구만.
검날을 찾기 위해 열심히 땅을 파서일까.
나도 모르는 사이 들이킨 먼지가 숲의 공기로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스읍 하 스읍 하”
그렇게 몇 번의 심호흡을 더 해 먼지를 완벽히 몰아낸 뒤.
다시 마차의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굴까.
마차를 이끌고 있는 누군가의 뒤통수가 보였다.
나보다 작은 키를 가진 채 망토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있는 누군가.
망토 때문에 나이라던가 성별을 특정하기가 힘들었다.
흐음… 이거 참.
감이 안 잡히네.
항상 그랬던 건 아니지만, 웬만한 경우엔 대충 어떤 무기에 관련된 기억이겠구나를 예상하며 보랏빛과 공명했었다.
지금처럼 아무런 정보도 없이 우연히 보랏빛과 공명한 적은 손에 꼽는 수준.
덕분에 공명을 통해 기억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여긴 어디이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예상조차 알 수 없었다.
첨벙.
…?
마차를 타고 얼마나 이동했을까.
바퀴가 무언가에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무슨 무기의 기억일까 머리를 굴리던 걸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터널이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사각형의 입구를 가진 터널이었다.
만들어지고 오랜 세월이 지났는지 벽돌로 이루어진 터널엔 물이끼와 덩굴이 가득했다.
물 위에 지어진 터널이라.
신기하네.
물론 처음부터 물 위에 지은 건지, 지은 다음에 물이 차오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첨벙. 첨벙.
터널로 나아가며 조금씩 물도 깊어지고 있었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주변을 밝히던 빛도 사라져 점점 어둠에 먹히고 있는 상태.
그러든 말든 정체불명의 마부는 계속해서 마차를 앞으로 몰고 있었다.
꽤 깊은가 본데 괜찮은 건가.
이미 터널로 꽤 들어왔음에도 반대편엔 작은 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반대편도 터널처럼 깜깜하거나 아니면 그만큼 터널이 깊다는 얘기였다.
척.
잠시 후.
“워 워.”
마차가 멈춤과 동시에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가 작긴 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앳된 목소리였다.
왜 멈춘 거지.
아직까지도 눈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보이는 거라곤 그저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스윽. 삭. 삭.
앞에서 무언가를 하는 듯한 마부의 인기척이 들려왔지만.
사방이 어두워 뭘 하고 있는지는 하나도 볼 수 없었다.
우웅.
…!
그렇게 눈살을 찌푸린 채 쳐다보고 있기를 몇 분.
마차의 맨 앞에서 푸른색의 빛이 생겨났다.
공중에 떠 주변을 밝히는 푸른색 빛에 마부의 생김새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린애네.
아까 봤던 것보다 더 작은 키였다.
기껏해야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수준.
그리고.
문제는 키가 아니었다.
뾰족.
사람과 달리 하늘을 향해 쫑긋 솟아있는 귀.
토… 토끼?
아무리 봐도 토끼의 귀와 똑 닮은 생김새였다.
쫑긋. 쫑긋.
주인의 의지인지 아니면 자동으로 움직이는지는 모르겠으나.
토끼귀는 쉬지 않고 쫑긋거리며 내 눈길을 빼앗고 있었다.
“길을 보여주소서.”
토끼귀에 정신 팔려 있기를 잠시.
토끼 마부의 읊조림과 동시에 하늘에 떠 있던 푸른빛이 앞으로 번져나갔다.
우우웅…!
정확히는 그려 나가고 있었다.
마차가 나아갈 곳을 알려주는 푸른빛의 길을 말이다.
그렇게 길이 그려지는 걸 기다리던 토끼 마부가 입을 열었다.
“가자.”
주인의 말에 따라 다시 이동하기 시작한 마차.
마차의 말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익숙한지 조금의 놀람도 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오?
그렇게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기를 잠시.
저 멀리로 반짝이는 빛이 보였다.
아마도 출구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신기하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끝이 가늠되지 않는 깊은 터널이었다.
그랬던 터널이 그려진 빛을 따라가자 얼마 되지 않아 출구를 드러낸 것.
길이 없으면 통과할 수 없는 터널 같은 건가.
열심히 이런저런 가능성을 떠올리며.
어느새 바로 눈앞까지 다가와 버린 출구의 빛을 응시했다.
* * *
덜컹… 덜컹.
멀미 나겄네.
터널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나 지났을까.
토끼 마부와 마차는 하염없이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런 기억은 또 처음이구만.
우연히라도 발견된 검날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지금까지 했던 공명으로 봤던 것 중 가장 지루한 기억이었다.
체감상으로 대충 가늠해도 이미 두세 시간은 넉넉히 지났을 듯했다.
발라당.
마차에 몸을 눕히고 정면에 펼쳐진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이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이곳의 하늘은 우울하고 칙칙하기 그지없는 하늘이었다.
지구는 아닌 거 같고.
분위기 자체가.
코를 통해 들어오는 공기 자체가 달랐다.
호흡을 통해 공급되는 건 상쾌한 공기가 아니었다.
폐에 쌓일 듯한 찝찝한 먼지 섞인 공기만이 열심히 코로 들어오고 있었다.
터널 하나 지났을 뿐인데 이렇게 다르네.
보통 터널이 아닐 거라 생각은 했지만.
완전히 다른 두 세계를 잇는 터널이라니.
생각보다 더 신비로운 녀석이었다.
이곳이 낯설지 않은 건 지난번의 공명 때문이겠지.
로튼의 장막에 부딪힌 순간 일어났던 공명을 떠올렸다.
회귀한 이후로 처음이었다.
무기의 빛이 아닌 다른 것에 공명이 반응한 것은 말이다.
공명에서 봤던 건 로튼을 묵사발 냈던 무기왕 카이안의 기억.
그 기억에서 느꼈던 공간의 분위기가 이곳과 비슷했다.
그럼 데몬의 세계인가.
점점 마차를 끌고 있는 토끼 마부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뭐하는 녀석이길래 인간 세계에서 검을 잔뜩 실은 채 데몬의 세계로 넘어온 걸까.
이 토끼쉨 설마?
이틀 뒤 받을 계획이었던 칸의 검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척사윤이란 사람이 만들어낸 검.
검을 봤을 때도 어떻게 데몬인 칸이 인간이 만든 검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었는데.
토끼쉨이 인간의 무기를 데몬에게 나르고 있었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귀 귀여워서 착한 놈인 줄 알았더니.
진짜면 서태혁 투 같은 새낀데.
인간들 몰래 두 세계를 오가며 데몬을 돕는 녀석일지도 몰랐기에.
조금이라도 얼굴을 담아두고자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오랜만이구나 민쿠야.”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는 것만으로도 무게감이 느껴질 정도로 힘이 실려있는 목소리.
장발의 아저씨다.
남자를 마주한 한 줄 감상평이었다.
울긋불긋한 근육의 남자는 땅에 끌릴 정도로 기다란 흑발을 가지고 있었다.
직업 여쭙고 싶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또 한 가지.
온몸에 새겨진 엄청난 양의 흉터였다.
저렇게 많이 다쳤는데도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셀 수 없이 많은 흉터 자국들이 남자의 몸에 남아 있었다.
호다닥!
남자의 인사가 건네지기 무섭게.
말에서 호다닥 내려온 토끼 마부, 민쿠.
생김새에 잘 어울리는 귀여운 이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민쿠가 남자를 향해 120도로 인사를 박았다.
아까부터 신기하게 생각했었다.
인간은 아닌 듯한데 유창하게 말을 하는 민쿠.
대체 뭐하는 녀석일까.
“껄껄! 편하게 하라니까 편하게!”
민쿠를 향해 손을 내저은 남자가 마차를 바라봤다.
“이번에도 늦지 않게 와줘서 고맙구나.”
이번에도.
저 말로 미루어 보건대 민쿠가 이곳에 온 건 처음이 아닌 것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마차에 실린 검을 인간 세계서부터 남자에게 전달하는 것.
이게 토끼 마부 민쿠가 수행하고 있는 임무인 듯했다.
“당연합니다! 그게 제 역할인 걸요!”
“그래, 그래.”
호탕하게 웃으며 굽신거리는 민쿠를 바라보는 남자.
잠시 망설이던 남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민쿠야 그… 율이는 잘 있느냐?”
질문을 듣기 무섭게 방긋 웃어 보이는 민쿠.
“당연하죠! 율이는 매우 잘 있습니다! 앞으로도 제가 잘 챙길 테니.”
조금 전보다 훨씬 밝아진 얼굴로 우렁차게 입을 연 민쿠.
민쿠가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이름을 부르며 대답을 이어갔다.
* * *
눈이 내리고 있는 겨울 설산.
설산의 깊은 곳에 오래된 집 한 채가 위치해 있다.
오래되긴 했지만 소복이 쌓인 눈 때문일까.
집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는 아늑함을 뽐내고 있었다.
“아름답구나.”
오래된 집의 툇마루.
툇마루의 끝엔 눈 만큼이나 하얗게 센 머리의 할머니가 앉아 눈을 구경하고 있었다.
인자한 인상.
할머니의 얼굴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었다.
눈을 바라보고 있는 할머니의 눈동자.
눈 만큼이나 깨끗하고 맑은 빛을 가진 눈동자였다.
“콜록!”
눈을 구경하던 할머니가 위태로워 보이는 기침을 시작했다.
벌컥!
그러자 문이 열리며 튀어나오는 흑발의 소녀.
이제 갓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할머니! 날씨 추우니까 밖에 나가시면 안 된다니까요!”
“홀홀! 눈이 이렇게 예쁘게 내리는데 어찌 안 나오겠느뇨.”
걱정스러운 손녀의 말을 기분 좋게 웃으며 받아치는 할머니.
“감기 걸리니까 얼른 들어오세요!”
“그래 그래.”
손녀에게 못 이긴 척 할머니가 마루에서 몸을 일으켰다.
까악--! 까악--!
그때 들려오는 설산 까마귀의 울음소리.
울음소리를 들은 할머니가 묘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할머니! 얼른 안 들어오고 뭐 하세요!”
“홀홀, 유라야.”
“네?”
할머니의 부름에 유라라 불린 소녀가 몸을 돌렸다.
“방을 따시게 데워놓도록 하거라.”
“…?”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할머니를 바라보자.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곧 손님이 찾아올지도 모르겠구나.”
* * *
“앞으로도 제가 잘 챙길 테니.”
흐뭇하게 바라보는 남자를 향해.
민쿠가 힘차게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척준경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