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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왕이 헌터로 회귀했다-185화 (185/473)

185화. 배달원이었던 토끼

오래된 과거였다.

한반도가 세 개의 국가로 나뉘어 있던 시절, 고려에 위치한 어느 산 깊은 곳.

“그 아이와 만나지도 말고! 배달도 가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

산으로 누군가의 호통 소리가 퍼져나갔다.

왜소한 덩치지만 목소리만큼은 쩌렁쩌렁한 노인.

노인의 귀엔 두 개의 쫑긋한 귀가 달려있었다.

“저도 그럴 생각이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노인의 호통에도 쉽게 수그러들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인간의 나이로 치면 어른, 토족의 나이로 치면 한참 어린 나이인 민쿠였다.

“민쿠! 족장님께 예의를 갖추거라!”

옆에 서 있던 어른들이 민쿠를 나무랐다.

민쿠를 꾸짖고 있는 토족의 족장 토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몰랐다.

어린 민쿠가 묘족의 공간을 떠나 만나선 안 될 아이를 만나며, 맡아선 안 될 배달 의뢰를 받은 것이 말이다.

“애초에 인간들에게 있어 우리는 이질적인 존재다.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사이가 아니거늘!”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에요. 사람들은 저희가 달에서 떡방아나 찧는 존재인 줄 알기에 신기한 괴물 보듯 쳐다보지만, 있는 그대로의 절 친구로 받아주는 사람도 있다고요.”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민쿠의 대답에 토칼이 한숨을 내쉬었다.

토족 중에서도 똑똑하고 총기 넘치기로 소문난 민쿠였다.

문제가 있다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말을 더럽게 안 듣는다는 것.

“인간의 수명이 우리보다 훨씬 짧다는 건 잘 알고 있겠지?”

“….”

이번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 민쿠.

민쿠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인간과 토족의 수명이 다르다는 것은 말이다.

하지만.

‘족장님, 예외도 있다구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머금은 채 민쿠가 토칼을 응시했다.

“전 제가 맡고 있는 배달 임무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토족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맡은 배달품을 목적지까지 옮긴다! 토족에게 가장 중요한 거라고 말씀하신 건 족장님이잖아요.”

질끈.

족장 토칼이 아찔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토족의 공간에서 충당할 수 없는 물품들이 있었다.

공간에는 외부 물품과 교환할 만한 것이 없었기에 노동력 제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토족.

그래서 토족이 선택한 것이 배달업이었다.

인간보다 훨씬 빠르고 발달된 신체를 이용해 배달을 해주며 물품을 받기로 토칼은 결정했다.

오랜 시간 토족의 삶을 지탱해준 소중한 종족의 업이었다.

“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목숨이 위험한 의뢰까지 하라고 한 적은 없다!”

10년 전부터 민쿠가 한 소녀에게 의뢰를 받아 검을 배달하고 있다는 것도, 소녀와 친해져 하루가 멀다하고 놀러 간다는 것도 토칼은 알고 있었다.

끽해야 하루 정도가 걸리는 짧은 배달.

최종 목적지까지 옮겨 줄 다른 인간 배달부에게 검을 건네는 게 다인 간단한 배달이었기에.

토칼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 민쿠야 너… 어딜 갔다 온 게냐?

얼마 전의 일이었다.

배달에서 돌아온 민쿠로부터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인간 세계의 것이 아닌 몹시 위험하고도 소름 돋는 기운.

- 최종 목적지까지 배달해주던 사람은 몸이 쇠약해져 더 이상 배달을 할 수 없다고 해요. 제가 이제 최종 목적지까지 검을 옮길 겁니다.

최종 목적지.

그제서야 토칼은 검이 향하던 곳이 어디인지를 알게 되었다.

토족의 공간도, 인간의 세계도 아닌.

그저 살육을 즐기는 악마와 죽음만이 가득한 세계였다.

- 당장 그만두거라!!

억만금을 준다 할지라도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

어린 민쿠가 아니었더라도, 토족 중 가장 숙련된 이가 나섰어도 절대 보내지 않을 땅이었다.

“정신 차려라 민쿠! 넌 그냥 이용당하고 있는 것뿐이야! 그런 위험한 땅으로 배달을 부탁하는 친구가 어디에 있단 말이냐!

“율이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까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율이를 위해서만 하는 일이 아니었다.

은인에 대한 보답.

말한 적이 없기에 토칼은 모르고 있을 테지만 말이다.

“전 가야 해요.”

휙.

민쿠가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몸을 돌렸다.

“민쿠!!”

말리기 위해 뻗어진 토칼의 손을 가볍게 뿌리치며.

민쿠가 순식간에 토족의 공간에서 모습을 감췄다.

* * *

카앙! 카앙!

토족이 사는 공간에서 꽤 떨어진 장소.

쇠와 망치가 부딪히는 소리가 산을 울렸다.

“오늘도 우렁차구만.”

민쿠가 귀를 쫑긋거리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토칼의 호통이 있은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지만.

민쿠는 이 소리를 듣기 위해, 정확히는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토족의 공간을 빠져나왔다.

“응?”

망치 소리가 잦아들고.

누군가 민쿠의 앞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전까지 울적했던 민쿠의 얼굴에 한가득 함박웃음이 머금어졌다.

“율아!”

민쿠가 귀를 쫑긋거리며 나타난 율에게 달려갔다.

“민쿠! 왔구나!”

마찬가지로 달려오는 민쿠를 반갑게 맞이하는 척사율.

긴 흑발을 아무렇게나 묶은 채 망치질을 하느라 지저분해진 작업복을 입고 있었지만.

특유의 고운 선과 선한 분위기가 살아있는 생김새였다.

“오늘도 혼났구나.”

평소보다 조금 늦게 온 민쿠를 바라보며.

척사율이 못 말린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장간의 거뭇한 재가 잔뜩 묻어 있는 척사율.

그럼에도 척사율의 미소에선 빛이 났다.

‘예쁘다.’

그리고.

민쿠는 그런 척사율의 미소를 좋아했다.

사랑 같은 감정에서는 아니었다.

그저 10년 넘게 만나온, 가장 친하고 소중한 친구의 미소가 좋았다.

“민쿠야 이리 와.”

척사율이 아무 말 없이 배시시 웃고 있는 민쿠에게 손짓했다.

“산딸기 따놨으니까 가지고 올라가자.”

“그래!”

수십 년을 살았지만 어린 아이의 모습인 민쿠와 20대 중반의 나이임에도 여전히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척사율.

묘한 공통점을 가진 둘이 발을 나란히 맞춘 채 언덕으로 올라갔다.

* * *

“오늘도 좋구만 좋아!”

“맞아!”

민쿠가 산딸기를 집어먹으며 귀를 쫑긋거렸다.

둘이 만나면 항상 대화를 나눠온 장소가 있었다.

척사율의 집 뒤 편에 위치한 언덕.

산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며 선선한 산바람과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장소였다.

“여기 올라온 지도 정말 오래됐다.”

“아마 10년은 됐을걸?”

둘만의 추억이 10년이나 깃든 언덕.

척사율이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슥.

민쿠가 그런 척사율의 얼굴을 옆에서 조용히 바라봤다.

친구의 얼굴을 살핀 민쿠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마저 사라진다면 율이는 이 산속에서 혼자 살아야 해.’

조금 전 율이를 만나지 말라며 꾸짖었던 토칼.

애초에 들을 생각도 없었지만, 척사율을 만나고 보니 더 마음이 확고해졌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혼자 살아온 척사율이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그런 아버지를 위한 검을 만들면서 말이다.

-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척준경이 떠나며 척사율에게 남긴 말이었다.

산속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살아가던 십 대 소녀가 감당하기엔 몹시나 잔인한 말이었지만.

척사율은 좌절하거나 슬픔에 빠져 살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의 사정을 이해하며 보다 더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율아 오늘은 검 더 안 만들어도 돼?”

민쿠의 물음에 척사율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너 오기 전에 이미 다 만들어놨지. 바로 마차에 실을 수 있게 준비도 마쳐놨어!”

척사율은 어려서부터 검 제작을 해왔다.

척준경의 동료이자 고려에서 가장 유명한 대장장이에게 배우며 검 제작 실력은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했고.

여기에 그녀만의 독특한 재능까지 더해져 만드는 족족 훌륭한 검이 탄생했다.

“나 오면 같이 하지 그랬어, 힘들게.”

“힘들긴 뭐가 힘들어, 아주 그냥 팔팔한데.”

척사율이 양팔을 들어 올리며 약간 솟아오른 알통을 보여주었다.

피식.

해맑은 척사율을 보며 민쿠가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홀로 산속에 남겨져 아버지가 사용할 검을 쉴새 없이 제작하고 있는 척사율.

끝이 보이지 않는 생활의 연속이었으나 그럼에도 척사율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아 맞다! 민쿠, 내가 어제 있지.”

척사율이 입을 열며 시작된 오늘의 대화.

오늘의 주제는 지난번 민쿠가 잡아다 준 멧돼지였다.

멧돼지로 많은 반찬을 만들었으며 나머지는 내년을 위해 냉동고에 쟁여놨다는 등의 이야기였다.

….

그렇게 두어 시간의 대화가 이어지고.

사락.

척사율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벌써구나.’

몸을 일으켜 옷을 털고 있는 척사율을 바라보며.

민쿠가 아쉬운 미소를 머금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척사율과 함께 얘기를 할 때면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일은 해야 하니까.’

아쉬움을 뒤로 하고 민쿠 역시 척사율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윽.

배달 시간이었다.

* * *

“오늘도 척사윤이구나.”

마차에 척사율이 만든 검을 모두 실은 뒤.

민쿠가 조금 전 따로 건네받은 검의 손잡이를 바라봤다.

“당연하지, 검 제작의 달인은 척사율이 아니라 척사윤이니까!”

처음 들었을 땐 이상한 고집이라 생각했었다.

보통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어하기 마련인데.

척사율은 그런 욕심 따위는 없는지 자신이 만든 검에 척사윤이란 이름을 새겨 넣었다.

- 뭐랄까. 내 이름이 알려지는 건 부끄러워서 싫지만, 또 내가 아닌 완전 엉뚱한 이름이 새겨지는 건 싫은… 그런 복잡한 감정이랄까?

언젠가 왜 척사윤이냐는 질문에 대합 율의 답이었다.

‘이상한데서 유별나다니까.’

어쨌든 본인의 바람이기에.

율이의 이명인 척사윤의 검을 받아 들며 민쿠가 마차로 올라탔다.

모르는 이가 보면 뒤에 실린 검과 같아 보였지만.

율의 이름이 새겨진 검은 달랐다.

검이면서도 동시에 길을 알려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신비로운 검.

척준경에게 닿는 길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척사율만이 만들 수 있는 검이었다.

“아! 민쿠 도시락 챙겨가.”

집 안으로 들어갔던 척사율이 두 개의 보따리를 들고 나왔다.

“멧돼지 고기로 만든 율표 특제 도시락! 하나는 민쿠 꺼, 하나는 금문 아저씨 꺼.”

척준경의 오랜 동료이자 중간에서 민쿠에게 마차를 넘겨받은 뒤 데몬의 세계까지 운반해줬던 금문.

민쿠가 내밀어진 두 개의 도시락을 바라보며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두 개 먹어야겠네.’

척사율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10년이란 시간동안 금문은 나이가 들어 더 이상 배달이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때문에 민쿠는 금문의 몫까지 대신하게 되었다.

“고마워! 잘 먹을게, 율아!”

“오늘도 조심히 갔다 와! 오면 지금 숙성 중인 율표 특제 산딸기 주스를 줄 테니까!”

“응! 갔다 올게!”

민쿠가 귀를 쫑긋거리며 척사율에게 손을 흔들었다.

‘율표 특제 산딸기 주스라.’

조금씩 멀어져 가는 척사율을 보며 민쿠가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얼른 먹어보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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