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겁의 대가
로튼이다.
민쿠의 이야기를 들으며 확신이 들었다.
금발과 금안에 이은 황금빛 장막과 능력을 무효화시키는 효과까지.
의심할 여지 없이 민쿠의 앞을 막은 건 로튼과 칸이었다.
칸이 가지고 있던 검은 민쿠 님에게 뺏었던 거군.
이제야 앞뒤가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난 그렇게 겁에 질려 한참동안 율이를 만나러 가지 못했어.”
겁에 질린 채 토족의 공간에서 머물렀다는 민쿠.
민쿠가 다시 척사율을 찾은 건 다음 검 배달의 날이 되었을 때였다고 한다.
자신이 가지 않으면 혼자서라도 데몬의 땅으로 떠날 척사율이었기에.
민쿠는 회복되지 않은 멘탈을 부여잡고 척사율에게 간 것이었다.
“똑같이 행동했어. 율이가 아무것도 눈치 못 채게 말이야. 그리고 검을 받아 들고 터널까지 왔어.”
터널까지 왔지만.
민쿠는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다.
아직까지도 자신의 목숨을 손에 쥐었던 거스를 수 없는 존재를 잊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겁에 질린 난 터널 구석에 검을 숨겼어. 다음 배달 때도, 그다음 배달 때도.”
말을 하는 민쿠의 얼굴로 죄책감이 번져나갔다.
은인에게 검을 못 갖다 준다는 것과 친구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어. 여느 날처럼 터널에 검을 숨기려고 했었는데… 그러지 못하겠더라고.”
터널엔 이미 너무나 많은 검이 쌓여있었다고 했다.
천장까지 쌓인 검을 보자 스스로의 비겁함을 더 이상 용서할 수 없었다는 민쿠.
그 길로 민쿠는 목숨을 버릴 생각으로 터널을 통과했다.
“정말 무서웠지만 다행히 그때 만났던 데몬들과 다시 마주치진 않았어. 하지만… 항상 만나던 장소에 척준경 님은 없었어.”
머리로 불길한 생각을 떠올린 뒤 돌아가지 않고 척준경이 있을 절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는 민쿠.
“절벽 앞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어. 산이라 불러도 될 만큼 쌓인 데몬의 시체 앞에… 척준경 님이 서 계셨어.”
꼴깍.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이야기를 이어온 민쿠를 봤을 때 척준경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이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무신 척준경의 최후라 생각하니 긴장이 됐다.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어. 온몸에 엄청난 상처가 쌓인 채로. 그리고 척준경 님은….”
질끈.
가장 떠올리기 힘든 부분이었는지 민쿠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맨손이었어.”
아.
나도 모르게 탄성 섞인 숨이 나올 뻔했지만.
안 그래도 슬픔에 잠긴 민쿠에게 폐가 될까 간신히 집어삼켰다.
“주변엔 부서진 검이 수북하게 쌓여있었어. 더 이상 검이 없어서 맨손으로 싸우다 돌아가신 거야.”
척준경은… 죽었구나.
솔직히 기대하고 있었다.
척준경이 일반적인 수명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고, 어쩌면 지금까지도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말이다.
하지만 조금 전 민쿠의 말로 조금이나마 품고 있던 기대는 깨끗하게 사라져버렸다.
스윽.
고개를 든 민쿠가 물기 섞인 눈으로 날 바라봤다.
“척준경 님의 악귀참도를 찾고 있다고 했지? 절벽 앞에 있을 거야. 내가 척준경 님과 함께 묻었으니까. 하지만… 그곳까지 가진 못할 거야.”
민쿠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로튼 패거리를 죽였다는 걸 알고 있는 민쿠였기에 내 안위에 대한 걱정 때문은 아니었다.
“아까도 봤겠지만, 혹시나 넘어올지 모르는 이세계의 존재 때문에 터널은 봉인되었어.”
터널을 막은 건 자신과 토족이라고 민쿠는 설명했다.
아마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
넘어올지도 모르는 데몬 때문도 있겠지만.
무모한 행동을 할지도 모르는 척사율을 막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터널을 막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봉인으로 인해 세계를 잇던 터널의 힘은 약해졌을 거야. 설령 그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 한들 길을 열 수 있는 건 율이의 검뿐이고.”
“그 검도 척사율 님의 검이니 길을 열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잠시 옆에 놓인 검을 바라보던 민쿠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 검은 이미 길잡이의 힘이 사라졌어. 새로 만들어진 율이의 검이어야만 해.”
이런.
척사율의 검만이 터널을 통과할 수 있다면 문제가 심각했다.
보통 인간과는 시간이 다르게 흘렀다는 척사율이었지만.
나이를 안 먹는 건 아니었다고 민쿠는 설명했었다.
수백 년이 지난 만큼 척사율이 살아있을 확률은 희박했다.
하지만.
“그래도 전 포기할 수 없어서요. 혹시 척사율 님이 살았던 장소를 알려줄 수 있나요?”
여기서 그만둘 순 없었다.
설령 척사율이 없어 터널을 사용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데몬의 세계로 넘어가는 방법을 찾을 생각이었다.
로튼은 물론이고 데몬은 인간의 세계로 넘어오고 있다.
분명 길이 있을 거야.
“율이가 아직 그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알려줄게.”
잠시 고민하던 민쿠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난 자격이 없거든.”
스윽.
한 장의 지도를 건넨 민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나… 만약에 율이를 만나게 된다면.”
민쿠의 입가로 슬픈 미소가 어렸다.
“정말 미안하다고… 전해 줄래?”
* * *
저벅.
“어?”
지도를 들고나오자 바닥에 앉아 있던 송유빈이 몸을 일으켰다.
모래 바닥에 잔뜩 그려진 그림.
나와 민쿠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자 들어오지 않고 계속 기다린 모양이었다.
“이야기는 잘 끝났어요?”
배려심 깊은 송유빈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실마리 정도는 얻었네요.”
척사율과 민쿠, 척준경이 얽혀있는 과거.
그 과거를 듣게 된 것만 해도 충분한 수확이었다.
이젠 척사율이 살아있기를 바라야 하나.
척사율이 살아있고, 살아있는 척사율로부터 데몬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검을 받는 것.
내가 생각하는 베스트 케이스였다.
스윽.
손에 들려 있는 지도를 내려다봤다.
지도에 적힌 곳은 강원도에 위치한 산이었다.
강원도부터 부산까지 맨날 마차를 끌고 다녔다니.
엄청난데.
검날의 기억에서 마차를 봤었기에.
당연히 척사율의 집과 터널은 가까울 거라 생각했었는데 의외였다.
저벅.
잠시 민쿠의 동굴을 돌아본 후.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유빈 님, 돌아가요.”
* * *
그날 밤.
사아아…!
검은 연기를 흩날리며.
송유빈의 오피스텔 옥상으로 발을 내디뎠다.
산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밤이 되자마자 서울로 날아왔다.
“잘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품에서 내려온 송유빈이 해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제가 더 감사하죠. 유빈 님 덕분에 터널까지 갈 수 있었으니까요.”
너스레를 떠는 게 아니었다.
송유빈 이후로도 그림에 대한 제보 문자가 여럿 왔었지만.
모두 틀린 장소를 지목하는 문자들이었다.
송유빈이 아니었다면 엉뚱한 곳을 한참 뒤지며 시간을 허비했을 터였다.
“무기왕 님은 바로 떠나시는 건가요?”
미소와 함께 물어오는 송유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까지 지체할 생각은 없었다.
서울까지 날아오느라 칼데아의 연기가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민쿠가 알려준 산을 향해 갈 수 있는데 까지는 바로 가볼 생각이었다.
“아 맞다, 유빈 님 부탁 하나 말씀하셔야죠.”
그림에 대한 제보를 요청할 때 걸었던 조건.
불법적인 일을 제외하고 부탁 하나를 들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음.”
꼴깍.
고민하듯이 턱에 손가락을 올린 송유빈을 보며.
나도 모르게 긴장의 침을 삼켰다.
무… 무슨 부탁 하시려나.
급하다 보니 냅다 조건을 걸긴 했는데.
막상 들을 때가 되니 살짝 긴장이 되었다.
“정했어요.”
내 긴장을 줄어주려는 듯 곧장 입을 여는 송유빈.
“가면 벗고 정체를 밝혀 주세요.”
거침없이 건네어진 송유빈의 부탁을 들으며 올 게 왔구나!
라고 생각한 순간.
“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는데요.”
송유빈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아무래도 됐어요.”
“됐다니…?”
작은 한숨을 내쉰 송유빈이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짧았지만 충분히 재밌었으니까요. 이걸로 됐어요.”
아무 부탁도 하지 않겠다는 송유빈에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면을 쓴 상태라 보이진 않겠지만 말이다.
“어… 그럼… 음.”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에 잠시 당황하는 사이.
휙.
송유빈이 옥상 입구로 몸을 돌렸다.
“졸려서 얼른 가야겠어요! 잘 가요, 무기왕 님.”
몸을 돌린 채 말하는 송유빈에.
“고마웠어요, 유빈 님. 좋은 꿈 꾸세요.”
나도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모든 상황이 예상할 수 없이 흘러가는지라 당황스럽긴 했지만.
인사는 안 할 수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저벅.
그렇게 옥상 문 바로 앞까지 걸어간 송유빈의 뒷모습을 확인한 후.
후웅…!
연기와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
* * *
“하아.”
무기왕이 다시 하늘로 날아오른 소리를 들은 후.
옥상 문고리를 잡고만 있을 뿐 아직 돌리진 못한 송유빈이 한숨을 내쉬었다.
슥.
다시 몸을 돌려 조금 전까지 무기왕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는 송유빈.
송유빈의 눈으로 알 수 없는 아쉬움이 어렸다.
‘토끼귀를 한 어린애라니.’
터널 앞에서 만난 민쿠를 떠올렸다.
물에 잠긴 터널 앞에 갔을 때까지만 조금 의아했었다.
아무것도 없는 깊은 산골.
그저 물에 잠긴 오래된 터널일 뿐이었는데 무기왕은 왜 이곳을 찾고 있었던 걸까?
‘아무래도 좋긴 했지만.’
무기왕이 무엇을 위해 터널을 찾았는지.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자기도 모르게 찐팬이 되어버린 무기왕.
무기왕과 함께 한다는 것만 해도 몹시 만족스러운 여정이었으니 말이다.
- 첨벙.
그러던 중 등장한 토끼귀의 민쿠.
민쿠를 바라보며 송유빈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었다.
역시 무기왕의 여정은 평범하지 않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따라가고 싶었는데.’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몇 번이나 말할까 말까 고민했었는지 모른다.
지도를 대충 봤을 때 강원도로 향할 예정인듯한 무기왕.
이대로 무기왕과의 동행을 끝내기가 너무 아쉬웠었다.
‘민폐니까.’
그럼에도 참은 이유는 간단했다.
무기왕을 누구보다 좋아했기에.
그런 무기왕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아쉽다, 아쉬워.’
송유빈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내뱉었다.
꽤 오래 대화를 나누며 무기왕에 대해 보다 많은 걸 알게 된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매꿔질 수 없는 거리감 역시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다르구나.’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다시 깨닫게 되었다.
무기왕과 자신이 사는 세계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자신과는 달리 머물러 있지 않는 존재, 계속해서 새로운 여정으로 향하는 무기왕이었다.
‘원래 가면 벗어 달라고 하려 했는데.’
어째선지는 알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확신이 들었다.
부탁을 하고 무기왕의 정체를 알게 되는 순간, 자기도 모르는 사이 조금 더 라는 욕심이 생길 거란 확신이 말이다.
그래서 부탁하지 않았다.
‘지금이 딱 좋아.’
자신과는 다른 무기왕의 세계와 시간, 그리고 길.
송유빈이 가질 수 없는 것들임과 동시에 무기왕을 동경하는 이유였다.
슥.
송유빈이 고개를 들어 무기왕이 떠나간 하늘을 바라봤다.
서울 한복판이라 별이 보이거나 하진 않지만.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유로운 하늘이었다.
“무기왕.”
하늘을 바라보는 송유빈의 입가로 시원섭섭한 미소가 그려졌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