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설산 속
와 얼어 뒤지겠네.
조금만 더 있으면 냉동 생선이 될 것 같은 추위였다.
하도 오돌오돌 떨어 가만히 있어도 살이 빠질 것 같은 느낌.
제발! 토끼 님!
호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지도를 살폈다.
오로지 이 지도만을 믿고 도착한 강원도 산골이었다.
패딩이라도 하나 가져올걸.
척사율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 탓일까.
강원도와 서울의 온도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바로 날아와 버렸다.
급기야 오던 중 연기가 떨어져 산골짜기 한복판을 거닐게 되었다.
신발이라도 두툼해서 다행이야.
여름 신발이었다면 이미 동상에 걸리고도 남을 추위였다.
아니 강원도 여기 뭐야 대체.
강원도가 춥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제까짓 게 추워봐야 어차피 한국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완전 다른 나라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눈 쌓인 산을 봤을 때 잠시 후퇴했어야 했는데.
하늘에서 설산을 발견하고 눈을 비빌 수밖에 없었다.
눈이라곤 첫눈조차 내리지 않은 서울이었는데 뜬금없이 설산이라니.
완전 겨울왕국이구먼 생각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간 게 실수였다.
조금만 더 걸어보자.
아직도 어둠이 깊게 내려있는 산골짜기.
먼저 살을 에는 겨울 칼바람이라도 피해야 할 것 같았다.
안되면 어쩔 수 없지.
머릿속으로 라의 불꽃을 떠올렸다.
얼어 뒤질까 봐 라의 힘을 쓰고 싶진 않았으나.
어쩌겠는가.
까딱하면 산골짜기 한복판에서 얼어 죽게 생겼는데.
면도칼 들고 호다닥 달려가는 것도 불가능이야.
이런 온도와 바람 속에서 빠른 속도로 달린다?
그냥 바로 볼따구고 귀고 뜯겨 나갈 것이었다.
데몬도 이런 추위는 무리지.
보통 깊은 산속엔 데몬이 살고 있기 마련이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기 어려운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 마리도 안 나온다는 건 데몬 역시 이 칼바람에 본능적인 위협을 느꼈다는 것.
난 데몬보다 못한 놈인가…!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으며 고개를 들었다.
딱 눈앞에 보이는 나무까지만 간 후 라의 불꽃을 사용해 몸을 녹이고 주변에 불이라도 피울 생각이었다.
불을 피운다기보단 불을 지른다는 표현이 더 옳겠지만 말이다.
딱 다섯 발자국만 더.
그렇게 한 발 한 발을 세며 걷고 있을 때.
딸랑.
감각이 거의 사라진 발아래로 무언가 걸리는 느낌과 함께 방울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함정이고 나발이고 얼어 죽게 생긴 터라 무지성으로 발을 내디딘 결과였다.
뭐야 이건 또.
발아래의 방울을 시작으로 산속 깊은 곳까지 퍼져나가는 방울 소리.
눈보라가 몰아치는 산속에 방울 소리가 울려 퍼지니 묘한 기분이었다.
“거기 누구야!”
울려 퍼졌던 소리가 잦아들 때쯤.
눈보라를 뚫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람 때문에 제대로 들리진 않았으나 가늘고 앳된 목소리였다.
“살려주세요! 사람 살려!”
어른의 목소리든 어린애의 목소리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 죽을 위기에 처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라의 불꽃을 사용하기 직전이었기에 일단 살려달라 소리를 질렀다.
“어?!”
뜻밖에 사람의 외침이 들려서일까.
의아한듯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 살려줘요!”
혹시나 그냥 가버렸을까 싶어 소리를 질러봤다.
그렇게 대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커… 컹!
강아지 소리가 들려왔다.
컹! 컹! 컹!
빨리 와! 멍멍이들아!
가까워지는 소리를 기다리고 있자.
잠시 후 여러 마리의 강아지와 강아지들이 끌고 있는 썰매가 모습을 드러냈다.
“와, 눈사람이네.”
눈보라에 한참을 걸은 탓일까.
눈이 어깨 위는 물론이고 머리 위까지 쌓여있었다.
그런 나를 보며 눈사람이라고 감탄사를 뱉는 소녀가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두 손을 흔들었다.
“눈사람 살려!”
애처롭고 절박한 목소리가 통한 것일까.
소녀가 썰매를 끌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검은 흑발을 가지런히 땋아 뒤로 넘기고 있는 소녀.
외관만 봤을 땐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손님, 진짜 왔네.”
손님…?
손님이란 단어에 잠시 의아해하고 있자.
소녀가 마차 뒤를 가리키며 손짓했다.
“얼른 타!”
“!!”
쿨한 소녀의 외침에.
혹시라도 놓고 갈까 호다닥 썰매로 몸을 옮겼다.
* * *
신이시여!!
평소엔 믿지도 않는 신을 울부짖으며 바닥으로 몸을 눕혔다.
최대한 많은 면적의 몸이 바닥에 닿도록 말이다.
뜨끈.
온돌인지 뜨뜻하게 데워진 바닥에 얼굴을 댄 채.
조금 전 날 이곳으로 데려온 소녀를 떠올렸다.
- 난 유라야.
소녀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며 날 방으로 집어 넣어주었다.
착한 녀석이야.
유라가 누구인지 여기는 어디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바닥에 닿은 면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뜨끈한 방바닥의 온기.
이것만으로도 유라에 대한 내 호감도는 매우 상승 중이었다.
진짜 뒤질 뻔했네.
그리스와 이집트를 돌아다니며 더위에만 고생을 했었던 탓이리라.
추위에 대한 대비를 전혀 안 하고 냅다 날아온 것은 말이다.
다음에 또 올 일 있으면 패딩에 타이즈까지 둘둘 해서 와야지.
그렇게 이번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으리 다짐하고 있을 때.
벌컥!
시원하게 문이 젖혀지며 유라가 찻잔을 건넸다.
“이거 마셔.”
아까부터 느꼈지만 몹시 단호하면서도 잘 챙겨주는 유라였다.
처음 본 날 경계하긴커녕 오래 알고 지낸 동네 오빠마냥 말까지 놔버린 유라.
“고맙습니다!”
그런 유라가 건네는 찻잔을 받아 한입에 들이켰다.
엄청 뜨거울 테지만 속이 하도 얼어있는 상태라 단숨에 녹여버리고 싶었다.
“꾸에엑!”
하지만.
나의 바람과 달리 찻잔을 떠나 목에 꽂힌 건 얼음장처럼 차가운 액체였다.
바닥의 온기로 스멀스멀 따듯해지던 몸속이 다시 한번 얼음으로 변해 가는 느낌이었다.
“유라야 따듯한 차를 내드려야지.”
차가운 액체를 느끼며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을 때.
연륜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산딸기 쥬스를 드리면 어떡하느뇨.”
산딸기 쥬스…?
그제야 입가에 남아 있는 액체의 맛을 음미했다.
달면서도 새콤한 맛이 나는, 와 이거 정말 산뜻한 맛이다!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생과일 쥬스맛이었다.
슥.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는 내 모습이 웃긴지 킥킥거리고 있는 유라와, 그런 유라의 옆에 서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할머니.
잠시 날 바라보고 있던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어서오게나, 이 늙은이의 이름은 사율.”
!!
“척사율이라네.”
* * *
자신을 척사율이라 소개하는 할머니에 놀라기도 잠시.
몸을 바로 앉히고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척준경의 악귀참도를 찾고 있으며 배달꾼 민쿠에게 이곳의 위치를 들었단 이야기였다.
“그렇구먼.”
민쿠의 이름이 등장하자 몹시 놀라는 척사율.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척사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있었구먼.”
혼잣말을 하는 척사율의 얼굴로 안도의 빛이 번져나갔다.
민쿠에게 들었던 과거에 대한 말은 하지 않은 상태.
그저 악귀참도를 찾기 위해 당신의 검이 필요하다는 말만을 건네었다.
다행이야.
나 또한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으나 척사율과 마찬가지로 안도하고 있었다.
척사율만이 만들 수 있는 길잡이 검.
만약 척사율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었기 때문이다.
“민쿠는… 잘 지내고 있는가?”
왠지 모르게 망설임이 묻어 있는 물음이었다.
음.
어떻게 대답할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터널 앞에서 만난 민쿠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었다.
검을 빼앗기고 겁에 질려 해야 하는 일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며.
가장 친한 친구인 척사율에게 거짓말을 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단 이야기.
“….”
척사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나 때문이네.”
“네?”
“그 아이가 그토록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건 나 때문이야.”
작은 탄식을 한 차례 내뱉은 척사율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민쿠에게는 듣지 못했던 이후의 이야기였다.
“어느 날이었네. 배달을 마친 민쿠가 울면서 내게 온 날이었어. 나는 놀라서 왜 그러느냐 물었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과 척준경이 죽었단 사실을 털어놓았다는 민쿠.
아버지의 죽음을 들은 척사율은 그런 민쿠에게 해선 안 될 말을 했다며 후회했다.
“난 누구보다 힘들어하는 민쿠를 감싸주긴커녕 거짓말쟁이라고 매도했다네. 우리 부녀를 위해 목숨을 걸고 노력했을 민쿠에게, 너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다며 꼴도 보기 싫다고 소리쳐버렸어.”
애써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민쿠와 마찬가지로 척사율 역시 깊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이거 참.
실제로 그 자리에 있던 건 아니었지만.
민쿠와 척사율 두 사람의 심정이 짐작되어 가슴이 미어졌다.
친구의 잘못이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아버지의 죽음에 감정이 격해졌을 척사율과.
친구가 건넨 말이 진심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스스로가 가진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떠났을 민쿠.
그렇게 오랜 시간을 헤어져 지냈을 두 사람이, 오랫동안 후회와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을 두 사람이 안타까웠다.
“몇 날 며칠을 홀로 집에 박혀 울었다네. 그리고 감정이 어느 정도 추슬러질 때쯤, 민쿠를 찾아 금정산으로 갔었어.”
하지만 결국 척사율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민쿠.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해 친구를 만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 게 분명했다.
“할머니.”
평소와 달리 의기소침해진 척사율에.
유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할머니의 손을 감싸 쥐었다.
“홀홀… 민쿠를 만나고 싶지만 나 또한 자격이 없구나. 친구가 오랜 시간을 나 때문에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았을 거라 생각하니 말이야.”
척사율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깊은 후회와 죄책감이 깃든 얼굴이었다.
그렇게 쉽사리 검을 만들어달라고 말하지 못하고 있을 때.
척사율이 먼저 물어왔다.
“그래… 그래서 자네는 그 세계로 길을 그려 줄 검이 필요하다고?”
“예.”
“터널이 아직 끊기지 않았다 해도… 아마 오랫동안 봉인된 탓에 세계를 잇는 힘이 약해져 있을 거네.”
잠시 침묵하던 척사율이 입을 열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돌아오지 못 할 게야.”
세계를 잇는 힘에 대해 정확히 알진 못했다.
하지만 척사율의 말을 미루어 봤을 때.
건너가는 건 가능하지만 조금이라도 늦어지는 순간 돌아오는 게 불가능해진단 것 같았다.
뭐.
어쩌겠어.
“괜찮습니다.”
“….”
괜찮다고 말하는 날 조용히 바라보는 척사율.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는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음에도 가려는 이유.
이유를 묻는 척사율을 향해 빙긋 미소를 그려 보였다.
“꼭 데리러 가야 할 친구가 있어서요.”
지금도 망자의 길에 홀로 갇혀 있을 도윤.
지난번을 제외하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였지만.
비젼 수리검이 나와 함께 한 순간부터, 소멸하지 않고 홀로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무조건 데려와야 할 존재가 되었다.
“그렇구먼.”
살며시 미소를 지어 보인 척사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정도만 머무르게나.”
…!
척사율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검을 만들어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