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열리는 균열
“크라아… 아!”
“키릭… 키릭.”
다양한 데몬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곧이다.”
울음소리의 중심에 앉은 거구의 데몬이 정면을 응시했다.
회색빛 피부와 머리로 돋아 있는 여섯 개의 뿔, 그리고 비정상적으로 큰 덩치를 제외하면 인간과 몹시 유사한 생김새였다.
“균열이 곧 열린다.”
꽈악.
데몬이 정면의 균열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굳게 닫혀 절대 열릴 것 같지 않았던 균열이지만.
파직.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이제 곧 때가 온다는 걸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너무 길었군.”
서서히 번져 가는 금을 보며 뿔을 가진 데몬이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긴 기다림이었다.
계획대로였다면 한참 전에 바깥 세상으로 나가 자유를 누볐어야 했다.
자유를 누비며 안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살의를 마음껏 분출했어야 했다.
저벅.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데몬에게로 해골 형태를 가진 또 다른 데몬이 다가왔다.
“픽… 픽탄, 주… 준… 비 마쳤다.”
어눌하게 건네어진 해골 데몬의 말에 거구의 뿔 데몬, 픽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슥.
고개를 돌려 넓지만 한정된 공간을 둘러봤다.
각자의 울음소리를 내며 픽탄을 올려다보고 있는 수천의 데몬.
픽탄과 마찬가지로 이제 곧 때가 온다는 걸 알아서인지 평소보다 더 들떠 있는 모습이었다.
드드… 쿠직!
공간을 바라보던 픽탄 옆으로 마지막 알이 부화하기 시작했다.
픽탄의 고유 능력인 배양.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데몬은 픽탄이 배양해낸 개체들이었다.
시간만 존재한다면 무한히 데몬을 생성할 수 있는 무적의 능력.
‘….’
마침내 마지막 알까지 부화하자 픽탄이 새삼스러운 의문을 떠올렸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오래 기다렸어야 했는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훨씬 빨랐어야 했다.’
맨 처음 균열 안으로 들어온 건 픽탄 스스로의 결정이었다.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는 균열 속.
숨을 죽이고 힘을 키우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하지만.
들어오는 건 픽탄의 선택이었으나 나가는 건 아니었다.
- 때가 되었군.
정확한 시기가 기억나진 않지만, 대략 천년 전의 일이었다.
충분한 군대를 모았다고 생각했었던 픽탄.
픽탄이 배양하는 개체들은 보통의 데몬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가졌었기에.
이 정도라면 데몬 세계는 무리여도 새로 발견됐다는 인간 세계 정도는 충분히 정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인간 세계를 정복 후 데몬 군세와 함께 왕으로 군림하는 것.
픽탄이 가지고 있는 이상이자 열망이었다.
- 드드드…!
그 날도 오늘처럼 균열에 금이 가고 있었다.
열리고 닫히는데 있어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있는 균열.
안에 아무것도 없을 땐 항상 열려있지만 무언가 들어간 이후엔 내부에서 충분한 에너지가 차기 전까진 열리지 않았다.
- 쿠우우!
균열이 완벽하게 열린 후.
픽탄은 새로운 세계의 왕이라는 열망을 안고 균열의 출구를 향해 발을 뻗었었다.
더 이상 자신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확신과 함께 말이다.
- 어딜 기어나가는 것이냐?
그런 픽탄의 앞에 나타난 한 명의 남자.
흑발을 가진 남자였다.
탄탄하긴 하지만 픽탄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체구를 가진 존재.
- 치워라.
한참 자신감이 넘치던 픽탄이었다.
남자를 발견하고도 표정의 변화조차 일어나지 않은 상태.
그저 조용히 손을 뻗어 남자를 치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 내 이름은 척준경이다.
그리고.
그 이름이 픽탄의 귀로 들려왔다.
아직도 몸이 떨려오는, 평생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 기억해두거라.
으득.
픽탄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 스릉.
곧이어 소름 끼치는 쇠의 마찰음이 들려왔고.
잠시 후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픽탄 앞에서 펼쳐졌다.
물이 흐르듯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 서걱!
동시에 끔찍할 정도로 강력한 검.
척준경이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픽탄의 데몬들은 낙엽처럼 쓸려나갔다.
그렇게 픽탄은 단 한 명에게 대부분의 군대를 잃고 다시 균열 속으로 도망쳐야만 했다.
‘치욕스럽지만.’
꾸득.
‘결국 이긴 건 나다.’
지난번 전투.
척준경과의 마지막 전투였다.
이미 첫 전투 이후 반복된 오랜 소모전과 인간에겐 극악인 데몬 세계의 환경으로 척준경은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웬일인지 척준경에겐 검이 부족했다.
- 콰앙!
마지막 검마저 부러진 후.
척준경은 맨손으로 데몬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끔찍한 강함이었다.
무기가 없음에도 저런 전투력이라니.
- 끝내야 한다.
첫 전투에서 무참히 패배한 이후.
배양 능력을 가진 픽탄은 한방의 정면 승부보단 자신에게 유리한 끈질긴 소모전을 선택했었다.
직접 앞으로 나서는 일이 없이 말이다.
하지만, 그 날은 확신이 들었다.
어떻게든 지금 끝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확신이 말이다.
- 죽어라!!
원래는 직접 나서지 않는 픽탄이었지만.
약해질대로 약해진 척준경은 더 이상 위협이 안된다고 생각했기에.
다른 데몬들을 방패 삼으며 달려들었었다.
- 푹.
정확히는 정신이 없는 틈을 타 척준경에게 뿔을 찔러 넣었었다.
데몬에겐 영양소지만 인간에겐 치명적인 독이 되는 뿔이었다.
그렇게 뿔에 담긴 모든 힘을 척준경에게 주입해버린 후.
- 균열로 돌아가라!
곧장 균열로 되돌아왔었다.
대부분 쓸려나가 소수만이 남은 군대를 챙겨서 말이다.
‘분명 죽었다.’
서서히 닫히는 균열로 보였던 척준경.
분명 서 있었지만, 생명이 다한 모습이었다.
‘….’
그 이후로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척준경에게 모든 걸 쏟아부은 탓에 픽탄의 회복과 배양은 몹시 느렸고.
균열이 다시 열리게끔 힘을 쌓는데까지 수백 년의 시간이 걸려버렸다.
스윽… 쿵.
픽탄이 발을 뻗어 열리기 직전인 균열 앞에 섰다.
‘과거는 과거일 뿐.’
씨익.
‘마지막에 서 있는 내가 강한 것이다.’
드드드드---!
열리기 시작한 균열을 바라보며 픽탄이 눈을 빛냈다.
‘드디어.’
드드--!
‘출정이다.’
* * *
터널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이질적인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양옆으로 높은 절벽이 형성되어 있는 지대였다.
지도대로 가려면 길 따라서 가야겠는데.
처음엔 수리검으로 계속 비젼을 사용할까 했지만.
민쿠가 건네줬던 지도의 길은 단순하지 않았다.
절벽 지형이 하늘을 덮고 있는 곳도 있었기에 무지성으로 비젼하다간 길을 잃을 수도 있었다.
드문드문이긴 해도 검날의 기억에서 봤던 장면도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다.
그렇게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해 한 번 떠올린 후.
처음으로 발을 디딘 세계에서의 첫 호흡을 개시했다.
“후웁… 큽!”
호흡을 할 때마다 공기에 섞인 거친 모래 입자가 느껴졌다.
숨 쉬는 것만으로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 공간.
타닷!
그런 공간을 전속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민쿠가 건네줬던 지도는 이미 머릿속에 숙지한 상태.
눈앞에 펼쳐진 길도 지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민쿠가 만들었다는 척준경의 무덤까지 금세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리 와봐서 다행이야.
물론 직접 온 건 아니었지만.
로튼의 장막과 부딪히며 들어갔던 카이안의 기억.
기억에서 간접적으로나마 데몬 세계를 체험해봤었다.
그 덕에 데몬 세계가 어떤 분위기와 공기를 가지고 있을지 예상 가능했기에.
직접 온 건 처음인 지금도 별 적응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달릴 수 있었다.
“키아아아!”
저 새끼들만 없으면 완벽할 텐데.
지형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때와 달리 지도가 가리키고 있는 길엔 데몬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서걱! 서걱!
면도칼을 휘두르며 최소한의 공격만을 가한 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체형이 두꺼워 면도칼로 한방에 죽이지 못하는 녀석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멈출 순 없었다.
급하다 급해.
10초 후에 닫힙니다… 하고 문이 닫히진 않겠지만.
어찌 됐든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건 명확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 척준경 님이 가지고 계시던 검은 무덤 앞에 놓고 왔어.
최대한 기억을 되살려 정보를 전달해 준 민쿠.
악귀참도가 부디 민쿠가 놓아둔 그대로 있기를 바랐지만.
민쿠의 기억은 몇 백년 전의 기억이었다.
어찌 저찌 무덤을 잘 찾아갔다 해도 검이 없을 수도 있었다.
없으면 어쩌지?
잠시 미간을 찌푸린 채 머리를 굴려봤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나저나 그게 악귀참도라면.
왜 사용하지 않았을까?
똑같은 검인데.
민쿠의 말에 따르면 척준경은 마지막 순간 맨손이었다고 했다.
악귀참도가 남아 있었음에도 말이다.
검이 있는데도 사용하지 않은 채 맨손으로 싸웠다라.
쉽게 납득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무신이라고 불리긴 했지만 척준경은 어디까지나 삼국제일검이라 불렸던 검성.
검성이 멀쩡한 검을 놔둔 채 맨손으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웠다는 건 부자연스러웠다.
휙휙.
살짝 머리가 아파오는 걸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굳이 지금 생각할 필요 없다.
무덤 앞에 검이 있는지와 척준경이 어째서 악귀참도를 사용하지 못했는지는.
알고 싶지 않아도 곧 알게 될 테니 말이다.
구루루루---!
구루루!
급한 마음에 생각마저 그만두고 달리고 있을 때.
길목으로 많은 수의 데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둥글둥글한 체형과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딱딱한 딱지까지.
옹달샘에서 만난 거북이쉨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제발 길 좀.
[앤 보니&메리 리드 - 작열탄]
“나와라 이 징글징글한 새끼들아!”
콰가아아아아---!
* * *
“후우!”
드디어 빠져나온 절벽 길.
사방을 감싸고 있던 절벽이 사라지며 시야가 트이자 마음마저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런 시원한 기분도 잠시.
조금 전보다 더 숨 막히는 공기가 느껴졌다.
뭐냐 여기는.
분명 조금 전과 같은 세계임에도 몸을 감싸는 기운과 코로 들어오는 공기가 틀린 장소였다.
말 그대로 숨이 턱턱 막히고 있었다.
조금 전까진 분명 밝았는데 순식간에 깜깜해져 버린 하늘까지.
“키이이!”
“크라라라!”
어째서인진 모르겠지만.
길목에서 죽어라 쫓아오던 데몬들도 길이 끝나는 기점으로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뭐 어쨌든.
슥.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민쿠 님이 건네준 지도가 가리키는 곳은 여기가 맞아.
검날의 기억으로 드문드문 봤던 곳도 여기였다.
그럼 이쯤에서 보여야 하는데.
드드드--!
있네.
잠시 도착한 지형을 살피던 눈앞으로.
말도 안 되게 높은 절벽이 눈에 들어왔다.
일부러 색칠해 놓은 것처럼 새까만 절벽과 양 절벽을 잇고 있는 알 수 없는 균열까지.
척준경이 싸우던 균열과 절벽.
공명으로 봤기에 틀림 없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민쿠의 지도를 떠올리며.
절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를 바라봤다.
민쿠가 무덤이라고 표시해놓은 장소였다.
반짝.
!!
오랜만에 보는 빛이었다.
볼 때마다 심장이 덜컹거릴 정도로 반가운 빛.
두근.
항상 반가웠지만 오늘은 좀 더 반갑고 기대가 되었다.
무신이자 검성으로 불린 척준경.
아직 만나지도 못한 사이라 염치없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악귀참도, 그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지난 돌산에서의 수련 때 얻으려 했지만 얻지 못했던 것들을 말이다.
꿀꺽.
나도 모르게 피어오르는 기대감을 느끼며.
[이카로스 - 칼데아 윙]
빛을 향해 연기를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