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검 속의 무신
후두둑.
빛을 가리고 있던 모래와 잔여물을 훑어냈다.
무덤 앞에 놓이고 오랜 세월이 흘러서인지 손잡이의 바로 아래까지 쌓여있는 땅의 불순물들.
번쩍!
모래를 털어내자 그제야 선명한 황금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째서인지 민쿠가 말했던 무덤은 사라지고 검만이 덩그러니 남은 채였다.
한차례 심호흡을 한 뒤 날 기다리고 있는 검을 응시했다.
의외로 멀쩡하네.
수백 년의 세월 간 방치 됐을 텐데도 악귀참도는 몹시 깔끔한 외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심지어 검집이 없음에도 여전히 선명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검날까지.
검을 보호하고 있는 건 손잡이부터 시작한 흑색의 천이 다였다.
천도 신기하네.
생각해보니 검도 검이지만 천도 일반적인 게 아닐 것 같았다.
천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헤지고 찢어지기 마련인데 이렇게 멀쩡하다니.
단순히 좋은 천을 썼구나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진짜 있었구나.
내 눈으로 직접 악귀참도를 확인하는 순간.
마음 한켠에 있던 불편함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애써 생각은 안 하려고 했지만, 악귀참도가 전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구이면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걱정이 있었다.
대산을 제외하고라도 많은 이가 찾으려 했는데 검의 조각조차 발견하지 못했었으니 말이다.
피식.
이런 곳에 있으니 발견을 못 하지.
일반적인 방법으론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발견은 불가능해 보였다.
지구 어딘가에 있기라도 하면 찾을 수 있겠지만 아예 다른 세계에 있으니 방법이 없는 것.
뭐 어쨌든.
좁은 거리.
한 발자국 내디디며.
난 찾았다.
슥.
악귀참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 * *
짹짹짹.
응…?
황금빛이 주변을 감싸고 잠시.
귓가로 참새의 지저귐이 들려왔다.
스으으.
곧이어 돌아오는 시야.
허.
눈앞으로 울창한 숲이 펼쳐졌다.
나무 사이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과 볼을 간지럽히는 포근한 바람.
그리고 코로 스며들어오는 향긋한 풀의 내음까지.
조금 전까지 있던 황폐한 땅과는 정반대되는 장소였다.
샘까지 있네.
바로 마셔도 될 정도로 맑은 샘물까지.
그야말로 모든 게 갖추어진 곳이었다.
신선놀음하기엔 그야말로 완벽한 장소.
장기 두면서 막걸리 한 사발 하면 딱이겠는데.
뜬금없이 떠오르는 술 생각에 침이 흐르려는 순간.
“이곳에서 손님을 맞이할 줄은 또 몰랐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라 하기에는 이곳에 있을 사람은 한 명뿐이었지만 말이다.
슥.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놀람의 연속이네.
수백 년이 지난 검이 멀쩡한 것도, 검을 통해 도착한 장소가 공기 좋은 산속이란 것도 놀랐지만.
가장 놀란 건 눈앞에 나타난 척준경의 모습이었다.
검날의 기억에서 봤던 모습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타난 척준경은 끽해야 내 또래의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잠시 잊고 있었네.
회귀 전까지 치면 내 또래는 두 개겠지만.
어쨌든 현재의 나와 비슷한 또래의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푸른 샘 위에 위치한 바위.
척준경은 바위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의 바른 친구구만.”
스윽.
척준경이 바위에 쭈그려 앉은 채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신기한 친구기도 하고 말이야.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야?”
잠시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고민을 하다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굳이 복잡한 과정을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척준경은 이곳까지 오기 위해 어떤 절차가 필요한지 이미 알고 있을 터.
척준경이 알고 있는 건 시원하게 제외하고 말하면 되었다.
“기억을 따라 왔습니다.”
“그렇구만.”
한 번의 되물음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척준경.
첫 손님이어서인지 만났을 때부터 척준경의 얼굴엔 반가움이 가득했다.
기분이 묘하네.
달라진 척준경의 생김새나 날 둘러싸고 있는 환경 때문은 아니었다.
고려제일검이자 무신이라 불렸던 역사적 인물, 척준경.
그런 척준경을 실제로 마주하고 대화를 주고받고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한두 번 막연한 상상은 해봤었지.
회귀한 뒤 잠에 들기 전 종종 생각했었다.
여기저기 쏘다니다 보면 이야기나 기록만으로 보던 한국의 역사적 인물들도 직접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좀 창피하네. 기억을 따라왔다는 거 보면 내 원래 모습을 봤을 텐데.”
멋쩍게 웃는 척준경을 향해 나도 살며시 미소를 지어줬다.
기억에서 원래 모습을 봤다는 걸 고백하는 의미에서였다.
“변명하는 건 아니지만.”
옛날 기억을 떠올린 건지 척준경이 말을 멈췄다.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는 걸로 보아 무척이나 행복한 기억을 떠올린 것 같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또 행복했던 시절이거든.”
풀썩.
척준경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바위에 몸을 앉혔다.
작은 한숨과 함께 주변을 둘러보는 척준경.
“좋은 곳이지?”
“정말 좋은 곳입니다.”
그저 맞장구를 치려고 건넨 말은 아니었다.
2년 동안 수련했던 돌산도 좋았지만 이곳은 그보다 한 단계 위였다.
보자마자 휴식이란 단어가 절로 떠오르는 아름답고 마음 편한 풍경.
“맞아, 완벽한 곳이야. 여긴 전쟁도, 살육도, 피도 없으니까.”
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척준경의 얼굴로 슬픈 빛이 스쳐 갔다.
“가장 소중한 게 없지만 말이야.”
“…?”
“아 손님을 앞에 두고 계속 딴 얘기만 했네.”
나지막이 들린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척준경이 슬픈 기색을 지우며 날 바라봤다.
“여기 온 목적은.”
스윽.
“이걸 얻기 위해서겠지?”
척준경이 천으로 돌돌 말려진 검을 꺼내었다.
공명이 시작되기 전 봤던 검, 악귀참도였다.
“맞습니다.”
애초에 검을 통해 공명까지 들어온 상황.
이제 와서 목적을 숨기거나 겸손한 척할 필욘 없었다.
그나저나.
훨씬 찐한 색이었구만.
수백 년이란 세월 때문인지 여기저기 먼지가 묻고 조금 헤진 느낌이었는데.
척준경이 꺼낸 천은 칠흑이라 불러도 될 만큼 몹시 선명하고 찐한 검은색이었다.
얼레.
거기다 알아차리지 못했던 사실도 하나.
“이 천?”
의아한 내 눈을 발견해서일까.
척준경이 악귀참도를 감싸고 있던 칠흑의 천을 들어 올렸다.
이어져 있다.
단순히 감싸고 있던 게 아니었다.
천은 악귀참도의 손잡이와 이어져 있었다.
마치 한 몸인 것처럼 말이다.
“성해포라고 알려나 모르겠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덮혀졌다는 천…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맞아, 동시에 봉인의 천이라 불리기도 하지.”
봉인의 천이라.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었다.
회귀 전 스쳐 가듯 본 영상이라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성해포가 담겨있었다고 추정되는 상자를 발견했다는 영상이었다.
- 상자에 힘을 불어넣은 돌을 넣어보겠습니다.
영상의 헌터는 상자에 대고 여러 가지 실험을 했었다.
자신의 힘을 불어넣은 돌이나 데몬에게서 얻은 냉기석 등을 넣어보는 실험이었다.
- 상자를 닫자 힘이 완벽하게 사라졌습니다.
상자에 넣기 무섭게 힘을 잃어버렸던 물건들.
물건들의 힘은 상자에서 꺼내고 나서야 다시 발현되었다.
- 봉인의 상자입니다.
몇 번의 실험을 더 한 이후.
영상의 헌터는 눈앞의 상자를 봉인의 상자라 정의 내리며 국가로 소유권을 넘겼었다.
성해포가 담겨있던 상자도 그 정도였는데.
눈앞에 있는 게 진짜 성해포라면 대체 어느 정도 봉인력을 가지고 있단 거지?
“무엇을 위한 봉인인가요?”
성해포의 위력을 떠나 가장 궁금한 것이었다.
외관으로 보기엔 일반적인 검과 다를 바 없는 악귀참도.
대체 뭐가 있길래 성해포를 둘둘 감싸다 못해 한 몸처럼 묶어놓은 걸까.
저벅.
척준경이 악귀참도와 함께 나무 아래로 걸어갔다.
“악귀참도를 찾아온 이유는?”
대답 대신 척준경이 또 다른 질문을 건네었다.
질문에 대답하기 전.
꼴깍.
나도 모르게 침이 삼켜졌다.
내 대답에 대해 척준경이 ‘악귀참도에 그런 능력은 없어!’라며 고개를 내저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벨 수 없는 걸 베어야 해서요.”
대답을 듣기 무섭게 척준경이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제대로 찾아왔네.”
“후우…!”
기다리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스릉.
나무 바로 아래까지 간 척준경이 검을 뽑아 들었다.
오.
햇빛을 반사하며 예리한 빛을 뽐내는 악귀참도의 검날.
척준경이 날카로운 검날을 나뭇잎으로 가져갔다.
“악귀참도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벨 수 없는 걸 베는 힘. 바꾸어 말하면.”
사악!
!!
척준경의 휘두름에 예리한 검날이 나뭇잎을 스쳐 지나갔지만.
베이지… 않았다…?
분명 베였어야 했다.
손을 갖다 대기만 해도 바로 베일 것 같은 예리함이었다.
슥.
“어.”
곧이어 검날에 대고 손을 쭉 그어 보이는 척준경.
날에 손이 베였던 아찔한 경험에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왔다.
멀쩡하네.
베이긴커녕 기스조차 안 나 맨들맨들한 척준경의 손.
“벨 수 있는 걸 베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구나.
이제야 이해가 갔다.
악귀참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척준경이 계속 검을 보급받았어야 하는 이유.
악귀참도가 있음에도 마지막엔 맨손으로 싸웠던 이유가 말이다.
“방금 봤듯이 악귀참도는 검이라면 베어야 하는 것들을 베지 못해. 그래서 사람을 상처 입히지도, 달려드는 적을 죽이지도 못하지.”
툭 툭.
척준경이 악귀참도로 옆의 바위를 두드렸다.
“벨 수 없는 것을 벤다기보단 닿을 수 없는 것에 닿게 한다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수도 있겠어.”
척준경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검으로 바위나 다이아몬드를 베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게 여겨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귀참도로 벨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
일반적인 검으로도 완전히 베진 못해도 약간의 기스를 내거나 상처를 입히는 건 가능하니까 말이다.
닿을 수 없는 것에 닿게 한다.
벨 수 없는 걸 벤다기보단 이쪽이 더 정확한 표현인 것 같았다.
악귀참도를 든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베는 게 불가능했던 바위나 다이아몬드를 다 벨 수 있게 되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스릉… 철컥.
검을 집어넣은 척준경이 성해포로 검을 다시 싸매었다.
오랫동안 한 몸이었어서 그런지 마치 검에 달라붙듯 착 감기는 성해포였다.
“반쪽짜리 검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성해포로 봉인하고 있는 건 그만큼 위험해서거든. 뭐, 그게 뭔지는 자네가 천천히 알아 나가면 될 테고 말이야.”
악귀참도를 든 척준경이 조용히 날 응시했다.
“뭐 하는 친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강하겠구만.”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인 척준경이 말을 이어나갔다.
“나보다 강한 것도 인정.”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척준경이었기에.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잠시 말을 멈춘 척준경.
척준경의 입가로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난 자네한테 악귀참도를 줄 생각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