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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왕이 헌터로 회귀했다-193화 (193/473)

193화. 새로운

앞서가는 척준경과 약간의 텀을 둔 채.

천천히 뒤를 따라 걸었다.

눈에 안 익은 곳이 없구만.

이제는 익숙해 져버린 햇살과 바람, 숲, 그리고 공기.

살면서 가본 곳 중 공기가 가장 깨끗하다 단언할 수 있는 장소였다.

오래도 있었다.

무기와 공명한 공간에서 이렇게 오래 있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악귀참도와 공명하기 전부터 가능하다면 척준경에게 검을 배울 생각이긴 했지만.

이걸 감안하더라도 예상보다 몇 배는 더 오래 머물렀다.

공명 이거 엄청나네.

원래도 쩌는 능력이라고 생각은 했었다.

무기를 찾아야 하는 무기왕의 능력에 이보다 더 적합한 능력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쩌는 능력이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바깥세상의 시간은 멈춘 채 이렇게 오래 있을 수 있다니.

학생이었다면 시험 시작 직전에 시간을 멈춘 채 무한히 공부하는 게 가능한 엄청난 능력이었다.

뭐.

이번만일 수도 있지만.

물론 항상 이런 기나긴 공명이 가능할지는 미지수였다.

지금까지 무기와의 공명에선 어느 정도의 대화를 나눈 후 칼같이 종료됐었으니 말이다.

아닌가.

지금까지 영혼들이 날 호다닥 쫓아냈던 건가.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 턱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앞서가던 척준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여유롭지만 평소와는 달리 약간의 망설임이 묻어 있는 목소리였다.

“네가 악귀참도까지 다다르기 전에 만났던 이들은… 잘 있어?”

애초에 길잡이 검이 없다면 건너오지 못했을 세계였다.

그런 세계로 올 수 있게 검을 만들어준 척사율과 그런 척사율이 어디에 사는지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 민쿠.

내가 먼저 따로 말한 적은 없지만, 척준경은 내가 공명으로 찾아오기 전 저 둘을 만났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을 터였다.

언제 물어보나 했네.

공명으로 이곳으로 오게 된 첫날.

당연히 물어볼 거라 생각했었다.

자신의 딸인 척사율과 검을 전달해주던 딸의 친구에 대한 소식을 말이다.

- ….

하지만.

척준경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수련을 하며 하루가 멀다하고 붙어 다녔지만 척사율과 민쿠에 대해선 한 번도 물은 적이 없던 것.

척.

걸음을 멈춘 척준경이 몸을 돌려 날 바라보았다.

“왜 이제야 묻냐는 얼굴이네.”

언제나 표정을 잘 꿰뚫는 척준경이었다.

“하하… 그런 건 아니고요. 항상 궁금했었거든요. 궁금해하실 거 같은데 물어보질 않아서.”

“자격이 없으니까.”

작은 한숨을 내쉰 척준경이 미소를 머금었다.

“하나뿐인 딸을 산속에 버려둔 것도 모자라 딸의 하나뿐인 친구를 위험한 곳까지 검 배달이나 시킨 인간이니까.”

“….”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젊은 시절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인지 수련하는 내내 밝은 표정을 보여줬던 척준경이었다.

그랬던 척준경이 지금은 왠지 모르게 서글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잠시 고민이 되었다.

있는 그대로 얘기를 하면 안 그래도 슬픈 얼굴이 더 슬퍼 질 것 같았다.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날 생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귀신 같네.

이럴 때마다 독심술을 배운 게 아닐까 의심이 되었지만, 어쨌든.

척준경에게 악귀참도에 다다르기 위해 만났던 민쿠와 척사율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약간의 과장도 없이, 조금의 숨김도 없이 말이다.

“날 묻어 준 것도 모자라 평생 그런 죄책감을 지게 하다니… 못 씻을 죄를 지어버렸군.”

민쿠의 이야기를 듣자 척준경이 두 눈을 감았다.

인상을 찌푸리거나 입술을 깨물진 않았지만.

민쿠에 대한 미안함이 잔뜩 묻어나오는 얼굴이었다.

“검의 여부를 떠나 난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어.”

“…?”

의아해하는 얼굴에 척준경이 상의를 들어 올렸다.

서서히 드러나는 엄청난 수의 상처와 흉터들.

검날의 기억에서 봤던 모습이었다.

“인간이 살 수 없는 환경과 끊이지 않는 전투에, 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어.”

검이 있었다 한들 적 몇몇을 더 죽이냐의 차이었을 뿐, 죽을 목숨인 건 변함 없었을 거라고 척준경이 덧붙였다.

“검이 떨어진 날, 그러니까 마지막 전투지. 그때 이미 내 몸은 한계였어. 머리는 기능을 멈춰 이미 판단 같은 건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본능에 몸을 맡긴 채 검과 주먹을 휘두르는 게 최선이었지.”

스윽.

척준경이 손을 들어 네 개의 구로 이루어진 흉터를 가리켰다.

“마지막 전투에서 날 죽인 공격이야.”

데몬들에게 둘러싸여 정신이 없긴 했지만, 척준경은 뿔이 찔러 들어오는 걸 인지했었다고 말했다.

“인지했지만, 피할 순 없었지. 한계에 다다른 몸이 움직이라는 뇌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었으니까.”

씁쓸한 얼굴로 흉터를 매만지던 척준경.

슥.

척준경이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는 거지?

오랫동안 지내며 여기저기 다 가보긴 했지만.

척준경이 걸어가고 있는 곳은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방향이었다.

저벅.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걷던 척준경이.

“태어났을 때부터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어.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걸.”

한 번도 해준 적 없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 *

내가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거야, 지금.

여전히 걷고 있는 척준경을 따라가며.

조금 전 들었던 이야기들 곱씹었다.

어려서부터 말도 안 되는 검술로 이름을 떨쳤다는 척준경.

이름은 순식간에 퍼져 고려 왕에게까지 들어갔고, 길어진 전쟁으로 인재에 목이 말랐던 왕은 곧장 척준경에게 사신을 보냈다고 한다.

17살.

왕에게 등용된 척준경이 첫 전투를 나섰던 나이였다.

그렇게 첫 전투를 시작으로 끝나지 않는 살육의 길이 시작된 것이었다.

- 정신을 차려 보니 나이는 서른을 넘어갔고, 난 척준경이란 이름 대신 고려제일검, 무신, 검성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어.

고려를 넘어 삼국, 삼국을 넘어 현재의 중국까지 이름을 떨쳤던 척준경이지만.

드높아진 이름과 명성과는 반대로 척준경은 피와 죽음만이 존재하는 삶에 회의를 느꼈다고 말했다.

- 대의를 외치던 왕도 변하더라고.

처음엔 통일을 통해 전쟁의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하고자 했다는 고려의 왕.

하지만 그런 왕의 대의는 얼마 가지 않아 변질되었다.

척준경이 나서는 전장마다 승승장구하자 왕은 한반도를 넘어 외나라의 땅까지 노리기 시작한 것.

자신 때문에 더 많은 이가 고통에 갇힐 거라 판단한 척준경은 그렇게 왕의 곁을 떠났다.

- 신분을 숨기고 산으로 숨어들었어. 그때부턴 사람을 베는 게 아닌, 사람을 구하기 위해 검을 휘둘렀지.

무신과 검성 외에 척준경에게 붙여진 이름이 하나 더 있었으니.

신출귀몰하게 나타나 사람을 구해준다는 마물 사냥꾼이었다.

이젠 놀랍지도 않네.

마물은 오늘날 데몬이라 불리는 존재일 터였다.

척준경은 오래전부터 데몬을 사냥해온, 어찌 보면 지금의 헌터와 동일한 역할을 해온 것이었다.

대선배의 대대대대선배 쯤이려나.

- 그리고 어느 날 깨달았어, 내가 수명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다는 걸.

언제부터였는지, 어째서인지는 척준경 본인 역시 모른다고 말했다.

그저 어느 날 알게 되었고 스스로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 그쯤이었어. 마물에게 살해당한 부부의 집에서 갓난아기였던 율이를 만난 건.

그 날이 떠올라서일까.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척준경의 얼굴엔 따듯하고 온화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그렇게 만난 아기에게 척사율이란 이름을 지어 준 척준경은 산속으로 율을 데려와 소중히 키우기 시작했다.

-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어. 단 한 순간도 잊을 수 없는, 그런 시기였지.

척준경의 영향인지 척사율의 시간 역시 느리게 흘러갔다고 한다.

- 어떻게 보면 축복이었지. 아이의 가장 이쁜 시기를 남들보다 세 배는 더 오래 봤으니까.

이 말을 하며 척준경은 행복하게 웃어 보였었다.

젊은 날로 돌아가긴 했지만 역시 아버지는 아버지구나라는 걸 느낀 순간이었다.

- 마물 사냥을 하는 날 돕고 싶다며 율이는 검을 만들기 시작했어. 처음엔 엉성했지만 어느 순간부턴 나라의 대장장이보다 잘 만들게 되었지.

저벅.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악귀참도를 얻게 되었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라고 척준경은 말했다.

본능적인 이끌림에 도착한 동굴 속.

그곳엔 성해포로 둘러싸인 악귀참도가 놓여 있었다.

- 검을 집은 순간, 지금까진 희미하게만 느껴지던 감각이 증폭되더군.

마물을 느끼는 기운.

정확히는 마물이 나타나기 직전에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기운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 무언가에 홀렸던 거 같아. 그때부터 난 느껴지는 기운을 따라 방방곡곡을 다니며 마물을 베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균열을 악귀참도로 없애나갔어.

그때부터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아졌고.

마지막엔 엄청난 균열의 힘을 느끼고 세계를 건너 데몬 땅의 절벽까지 다다르게 되었다는 척준경.

절벽에 다다른 후 다시 한번 척준경의 끝 없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저벅.

척준경이 들려준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슥.

앞서가는 척준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완전 영웅이네요, 척준경 님.”

척준경은 오랜 시간 동안 데몬이 등장하는 균열을 제거했었다.

마지막엔 수천수만의 데몬이 쏟아질 수 있는 절벽의 균열을 막아내며 죽음을 맞이했고 말이다.

척준경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을 터였다.

“영웅이라.”

척.

목적지에 다다라서일까.

걸음을 멈춘 척준경이 고개를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난 그렇게 불릴 자격이 없어.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을 위해 가장 소중한 걸 내팽개쳐 버렸으니까.”

“….!”

척준경이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고 있는 것.

배경이 달라 잠시 헷갈리긴 했지만, 분명했다.

척사율과 척유라가 살던 설산의 집이었다.

- 가장 행복하고 소중했던 시기지.

공명 첫날.

공간을 소개했던 척준경의 말이 떠올랐다.

척사율과 함께 했던 집과 시기.

척준경에게 있어 가장 행복하고 소중했던 장소이자 순간이었다.

- 가장 중요한 게 없으니까.

그 날의 장소와 시간은 있지만.

이곳엔 척사율이 없었다.

여기를 보여주고 싶었던 거구나.

오랜 공명을 끝내기 전.

검을 가르치며 오랜 시간을 함께한 나에게.

척준경은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장소와 순간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혹시 민쿠와 율이를 다시 만난다면, 전해 줄래?”

가만히 서 있던 척준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바라보는 척준경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전해 줄 생각이었다.

“정말 미안했다고. 그리고, 정말 고마웠다고.”

“꼭 전할게요.”

대답을 듣자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척준경.

사아아…!

그런 척준경의 미소와 함께.

공간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쨌든, 내가 보여주고 싶었던 건 다 보여줬고, 알려주고 싶은 건 다 알려줬어.”

“감사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내게 많은 걸 알려 준 척준경을 향해.

감사를 담아 고개를 숙였다.

“인사는 됐으니까.”

척준경이 천천히 집의 툇마루로 걸음을 옮겼다.

가장 소중했던 이와 함께 했던 장소에 몸을 앉히는 척준경.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한 척준경이 내게 손을 휘휘 저었다.

“이제 가라, 이제부턴 네가.”

싱긋.

척준경의 입가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검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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