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망태기
“푸에취!”
힘찬 재채기와 함께.
후룹.
민쿠가 건네준 차를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크으.”
처음 받았을 때만 해도 몹시 의심스러운 차였는데.
콧물을 질질 흘리며 먹으니 이렇게 따듯하고 맛있을 수가 없었다.
사실 세계관 최강은 감기가 아닐까.
흐르는 콧물을 닦고 있다 보니 문뜩 생각이 들었다.
무려 척준경의 수련에서도 몸살 한 번 없이 거뜬했던 몸.
그랬던 몸이 옹달샘에 몇 시간 누워있었다고 감기가 들다니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슥.
차를 홀짝이며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이곳은 민쿠의 동굴 속.
타닥 타닥 타오르는 모닥불 건너편에서 민쿠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 그럼 넌 하루만에 돌아온 게 아니야?
데몬의 세계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자 민쿠는 혼란에 빠졌었다.
못 믿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민쿠가 터널 앞에서 날 기다린 시간은 하루.
고작 하루인데 난 몇 년 간 수련을 했다고 말하니 혼란스러워하는 게 당연했다.
끄덕.
혼란스러울 거야.
나도 혼란스러우니까.
공명을 사용하며 무언가 제약이나 제한이 있다는 걸 느낀 적은 없었다.
단지, 항상 금방금방 끝나니 공명 속에서 오래 있을 생각을 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영혼마다 다른 거 같긴 하지만.
그나마 척준경 외에 날 가장 오래 머무르게 해준 건 이카로스 정도였다.
정확히는 이카로스의 몸에 들어가 대리 체험을 했던지라 정작 이카로스 본인과 나눈 대화는 많지 않았지만 말이다.
“척준경 님은… 어떠셨어?”
고개를 숙인 채로.
민쿠가 망설임 가득한 질문을 건넸다.
자기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는 이의 근황.
질문을 한 번 건넸을 뿐인데도 민쿠의 손은 눈에 보일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정말 좋아 보이셨어요.”
여기에 덧붙여 척준경은 행복했던 시절과 장소로 돌아가 풍류를 즐기며 살고 있었다고.
평생을 함께 해온 피와 싸움에서 멀어져 자유롭게 지내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렇구나.”
행복한 장소지만 척사율이 없어 쓸쓸해한다는 건 굳이 얘기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자책에 사로잡힌 민쿠인데 말도 안되는 방향으로 자신을 탓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척준경 님이 민쿠 님에게 전해달란 말이 있었어요.”
“…!”
전언이란 말에 민쿠가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누가 보면 지진이라도 났나 싶을 정도로 흔들리는 민쿠의 눈동자.
먼저 민쿠에게 당시 척준경의 상태에 대해 천천히 전해주었다.
이미 몸은 한계에 다다랐으며 검의 배달과 무관하게 최후를 맞이했을 거라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사전에 필요한 이야기를 모두 말해 준 후.
이미 눈물이 떨어지기 직전인 민쿠에게 입을 열었다.
“민쿠 님한테 정말 고맙고, 미안하다고. 미안해 하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자책하지 말아달라고 하셨어요.”
“!!”
아이고야.
아무래도 마지막 말이 수도꼭지를 틀어버린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그렁그렁했던 민쿠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폭포수 마냥 터져 나오고 있었다.
“끄윽… 끅.”
흐느끼기까지 하며 우는 민쿠에.
나도 모르게 작은 한숨이 나왔다.
몇 백 년이나 자책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산 민쿠의 마음을 내가 어찌 알겠냐만은.
회귀 전의 나 역시 자책을 넘어 자기혐오 수준에까지 이르렀었다.
힘들었지.
당시의 내겐 아무 능력도 없었다.
전투는커녕 개방 자체를 못해 속절없이 나이를 먹어가던 시절.
계속해서 날 떠나는 친구들을 보며 난 엄청난 죄책감과 무기력감에 시달려야 했다.
내게 힘이 있었다면, 강하진 않더라도 친구들을 따라 나가 민폐가 안될 정도의 능력만 있었다면.
아무리 위험한 전투라도 따라나가 함께 했을 터였다.
- 조심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채 조심하라고 말을 건네는 것.
싸우러 가는 친구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외에 말은 하지 않았었다.
정확히는 하지 못했었다.
나도 데려가 달라거나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거나 하는 말들.
내겐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 어쩔 수 없잖아.
내가 능력이 없어 친구들이 죽었다는 깊은 우울감과 자책이 찾아올 때마다, 스스로를 위로했던 말이다.
어쩔 수 없으니까.
정말 어쩔 수 없기도 했고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이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저 말 때문에 더 많은 자기혐오가 생겼었다.
말 한마디로 모든 걸 정당화하려는 내 자신이 너무 추했기 때문이다.
“하아.”
지금 생각해도 한숨의 푹 나오는 시절이었다.
동시에 쉬지 않고 무기를 모으는 동기가 된 시절이기도 했다.
다시는 어쩔 수 없다라는 말 뒤에 숨고 싶지 않았다.
스윽.
조금 결은 다를지 몰라도.
나 역시 그게 얼마나 힘든지 알았기에.
“끅윽…끅.”
손을 뻗어 흐느끼는 민쿠의 등을 토닥였다.
* * *
“끄어어어어어!!”
동굴을 나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뿌드드득!
뭉쳐 있던 근육과 뼈마디가 시원한 소리와 함께 풀어졌다.
아무도 없는 첩첩산중.
정확히는 민쿠와 나 둘만이 있을 깊은 산속으로 깊은 어둠이 깔려있었다.
오지게 자버렸네.
민쿠를 토닥이며 천천히 이야기를 나눴었다.
척사율과 민쿠의 과거.
민쿠와 척준경의 인연과 토족의 이야기까지 말이다.
- ….
그 이후의 기억은 없었다.
따듯한 모닥불과 아늑한 동굴의 분위기.
거기다 민쿠가 해준 요리로 낭낭하게 채워진 배까지.
데몬의 세계로 넘어가 몸까지 혹사 시켰으니, 잠이 안 올래야 안 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 꾸벅.
이야기를 듣던 중 감겨오기 시작한 눈꺼풀.
그렇게 잠이 들고 호들짝 놀라며 눈을 뜬 게 조금 전의 일이었다.
- ….
하도 울어서인지 눈이 팅팅 불어 있었던 민쿠.
민쿠는 동굴 구석에서 무언가를 보며 추억에 잠겨 있었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그려져 있는 걸로 보아 행복한 추억이 담긴 물건 같았다.
“흐음.”
턱을 문지르며 고요한 금정산을 응시했다.
“고집이 보통이 아니야.”
잠에서 깨어나고 잠시 후.
민쿠에게 말을 건넸었다.
척사율이 있는 집으로 함께 가자고 말이다.
- 아니야.
망설이며 고개를 끄덕이길 바랐었는데.
민쿠는 내 바람과는 반대로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죄책감 가지지 말라는 척준경의 말을 듣긴 했으나 척사율에 대한 미안함은 여전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어. 그 시간 동안 난 도망쳤고, 율이를 홀로 내버려뒀어.
민쿠가 척사율에게 가진 미안함은 단순히 척준경에 대한 것 뿐만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잃고 힘들어 했을 친구를 몇 백 년이나 혼자 내버려뒀기에.
이제 와서 찾아갈 염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자기도 혼자 쓸쓸하게 있었으면서.
모든 걸 들은 건 아니었지만.
민쿠가 어떤 마음으로 첩첩산중 동굴에서 혼자 지냈을지는 짐작이 갔다.
아마 벌을 받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 토족에서 몇 번이나 돌아오라고 사람을 보냈었지만… 거절했어.
토족에 대해 잠시 물었을 때 들은 이야기였다.
민쿠가 어디에 있든 여러 번 찾아와 토족의 땅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하자고 했지만.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기에 항상 거절하며 산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었다고 민쿠는 말했었다.
“흐으으음.”
그 말을 듣고도 몇 번이나 설득을 해봤지만 민쿠는 요지부동이었다.
원래 이 정도라면 당신의 뜻을 존중하겠습니다 하고 혼자 떠났겠지만.
- 할머니 친구, 데려와 줄 수 있어?
척사율에게 시간이 없다고 말하며 척유라가 했던 부탁이 떠올랐기에.
에라이 모르겠다 하고 그냥 떠나버릴 순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돼.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아니라고 말하지만 지금 민쿠가 가장 보고 싶어할 사람, 척사율.
척사율을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이자 지금까지 짊어졌던 걸 떨쳐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난 오작교야.
가만히 두면 절대 만나지 못할 두 사람이었다.
척유라의 부탁도 부탁이지만 이쯤 되니 꼭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척준경 님도 그걸 바랄 테고.
척사율과 민쿠를 만나게 되면 미안했다와 고마웠다라는 말을 전해달라고 한 척준경.
그 외에 척준경이 내게 따로 부탁한 건 없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알 수 있다기 보단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남아있을 두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길 바라는 것.
궁극적으로 척준경이 가장 원하는 것일 게 분명했다.
“이런 거 밖에 없는데 괜찮아?”
동굴을 뒤적이던 민쿠가 거대한 담요를 가지고 나왔다.
- 혹시 입을 거 없나요?
그냥 날아가면 추우니 입고 갈 것 좀 달라고 민쿠에게 부탁했었다.
음.
민쿠가 가지고 나온 담요를 바라봤다.
성인 남성이 덮기엔 좀 모자란 담요였다.
충분해.
하지만 충분했다.
“네 괜찮습니다.”
민쿠에게 엄지를 세워 보이며 담요를 받아 들었다.
담요를 널게 펼치며 크기를 가늠했다.
“혹시 몰라서 먹을 것도 좀 넣었어.”
주섬주섬 주머니 꾸러미를 꺼내는 민쿠.
저벅.
담요를 펼친 채 주머니를 정리하는 민쿠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건 말린 거니까 가다가…?”
주머니를 건네려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담요를 발견한 민쿠.
민쿠가 뭐하는 거지…? 란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망태기가 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죠.”
“무슨 말이야…?”
자신을 노리는 내 눈동자를 봐서일까.
민쿠가 불안한 눈으로 뒷걸음질을 쳤지만.
와락!
“왜… 왜 이래!”
당황하는 민쿠를 담요로 휙휙 감아냈다.
숨을 쉴 수 있도록 쫑긋거리는 귀와 함께 얼굴만 남겨둔 채로 돌돌 감은 뒤.
떨어지지 않게 내 몸에 남은 담요 부분을 동여매었다.
꽉! 꽉!
“좋아!”
잘 매어진 매듭에 흡족해하는 사이.
“너… 너 설마…!”
내 의도를 알아챈 민쿠의 눈이 커졌다.
그런 민쿠에게 잔망스러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이카로스 - 칼데아 윙]
“질문은 받지 않는다!”
민쿠 입장에선 얼탱이 터지는 대답과 함께.
연기를 터뜨리며 하늘로 날아 올랐다.
* * *
여전히 더럽게 추운 강원도의 산골짜기.
딸랑 딸랑.
빨리!
한밤 중에 집으로 들이닥치는 건 예의가 아니었기에.
집 밖에서 방울을 울리며 척유라의 등장을 기다렸다.
왈왈왈!
멍멍멍!
방울이 울림과 동시에 먼저 달려 나오는 강아지들.
이전에 방문했던 날 알아본건지 강아지들은 몹시 반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역시 갓댕댕.
날 기억하는구먼.
그렇게 달려온 댕댕이를 격하게 쓰다듬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덥썩!
“….”
접근한 댕댕이들은 육포가 든 주머니만을 낚아챈 채 다시 집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역시 고양이가 최고야.
새삼스럽게 깨달음을 얻으며 고개를 젓는 사이.
끼익.
문이 열리며 척사율이 모습을 드러냈다.
“홀홀 역시 무사히 왔구먼.”
마치 내가 돌아올 걸 확신했다는 듯이 웃어 보이는 척사율.
“추운데 뭐하느뇨, 얼른 들어오지 않고.”
웃으며 들어오라고 손짓 하는 척사율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오늘은 혼자가 아닌데 괜찮을까요?”
“….?”
혼자가 아니란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척사율.
척사율이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열려는 순간.
슬금.
옆에 숨어있던 민쿠가 고개를 숙인 채 모습을 드러냈다.
“…!!”
민쿠를 보고 놀라며 잠시 말을 잃었던 척사율.
그런 척사율의 입가로.
잔잔하면서도 따듯한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