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기나긴 기다림 후에
눈이 가득 쌓인 곳으로 발을 디뎠다.
뽀드득.
발을 디딘 곳에서 나는 소리에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한해가 끝나 가는 12월이긴 했으나 이건 너무 심했다.
날씨가 춥긴 해도 서울엔 아직 첫눈조차 내리지 않은 상태였다.
무슨 겨울 왕국이냐고.
지리상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았다.
칼데아의 연기만 있다면 한 시간 내로 도착할 수 있는 거리.
그런 거리임에도 방한 대책을 강구 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게 놀라움 따름이다.
“하아아.”
공기로 흩어지는 입김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지붕에 솟은 굴뚝으로 눈 만큼이나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연기만 봐도 따듯함이 느껴지는, 추운 눈 속에서도 24시간 따듯한 온기가 사라지지 않는 집이었다.
알고 보니 좀 비슷해 보이네.
집을 중심으로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악귀참도의 공명 속에서 척준경을 만났던 장소.
척준경이 가장 행복했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인지 주변 풍경이나 집 자체는 꽤 많이 변했지만 말이다.
- 홀홀 미안하다니. 별말씀을 다 하셨구만.
척준경의 말을 전하자 척사율이 보인 반응이었다.
- 난 아버지를 한 번도 탓한 적이 없다네.
척사율이라고 아버지가 보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단지 아버지가 떠나야만 하는 이유를 이해했었다고 척사율은 말했다.
- 아버지가 아니면 많은 사람이 죽을 테니까. 그 사람 중엔 나도 포함일 테고.
척사율은 척준경이 홀로 싸워나간 이유를 알고 있었다.
데몬이 공간을 빠져나와 딸이 머무르는 세계를 어지럽히지 않도록.
딸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가 피로 물들지 않도록 척준경은 싸운 것이었다.
다행이야.
척사율에게 말하기 전.
솔직히 조금 걱정했었다.
처음엔 이해했더라도 오랜 시간이 지나며 자신을 떠난 척준경에 대한 원망이 깊어졌을지도 몰랐기에.
혹시나 척사율이 척준경을 사무치게 원망하고 있다면 어떻게 위로와 설득을 해야 할까 나름 고민했었다.
이제 만날 순 없겠지만 둘의 마음만큼은 엇갈리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 일에 참견하지 말자는 게 지론이지만.
이제 남이 아니니까.
확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내 무기고 안에 머무르고 있는 악귀참도와 척준경의 감각이 말이다.
어쨌든.
해피엔딩이네 해피엔딩이야.
척사율은 아버지를 원망하는 말 대신 새록새록 추억을 되살리며 이야기를 해주었었다.
척준경과 시장을 갔던 것과 꽃이 핀 봄날에 함께 거닐었던 이야기 등 듣기만 해도 마음이 따듯해지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나저나.
척.
거닐던 걸음을 멈춘 뒤 집 문을 바라봤다.
애는 왜 이렇게 안 나와.
얼어 죽겠구만!
어젯밤.
민쿠와 척사율은 오랫동안 쌓인 이야기를 위해 방을 건너갔고.
난 혼자 남겨지기 무섭게 스르르 몸을 뉘였었다.
가만히 대고 있으면 화상을 입을 것 같은 뜨신 방바닥.
가래떡 굽듯 이리저리 몸을 굴리며 온기와 평화를 즐겼었다.
- 벌컥!
척유라가 힘차게 문을 열어젖히기 전까지는 말이다.
- 그아악!
갑자기 문이 열려 놀라기도 했지만.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오는 찬바람이 무척 매서웠었다.
이미 따듯하게 구워진 몸이 이겨내기엔 상대적으로 몹시나 살인적인 추위였다.
그렇게 이불을 돌돌 말아 구석으로 피신한 사이.
힘차게 등장한 척유라가 입을 열었다.
- 가는 길에 나도 데려가.
첫 만남부터 당차기 짝이 없는 척유라였다.
처음엔 척사율과 민쿠가 얘기를 나누고 있으니 심심해 침투한 줄 알았는데.
척유라가 한 말은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 데… 데려가 달라니?
물론 말처럼 막무가내로 데려 가달란 건 아니었다.
이미 이야기와 절차는 끝나 있으니 서울에 있는 척사율의 지인에게 데려가 달라는 것이었다.
- 나 학교 다니려고.
첩첩산중의, 댕댕이를 타고 다니는 대장장이 소녀 척유라.
척사율의 옆에서 지내며 검 만드는 법을 배웠었고.
얼마 전엔 검을 만들다 대장장이와 관련된 능력을 개방했다고 했다.
- 할머니가 알아서 다 해뒀다고 했으니까 몸만 가면 돼.
척유라는 그렇게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대답을 기다렸었다.
내가 따신 이불을 벗어나지 못할 걸 알고 대답을 강요하는 모습이었다.
- 알았으니까 빨리 문 닫아줘.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난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준비는 해야 하니까.
목표했던 악귀참도를 얻었으니 앞으로 내가 향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도윤이 갇혀 있을 망자의 길.
데몬의 세계와 공기나 분위기는 많이 다르지만 이상하게 공통점이 많은 장소였다.
공기가 별로고.
분위기가 별로고.
주변에 돌아다니는 것들이 별로야.
두 장소의 공통점이었다.
아 하나 더 있네.
가는 것보다 돌아오는 게 더 힘들다는 거.
어찌 보면 데몬의 세계보다 난이도 자체는 더 높았다.
마지막까지 시간에 쫓기며 간신히 들어오긴 했지만 어찌 됐든 돌아올 수 있는 문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없었다.
국제 미아… 보다 더 심각한 미아가 될 수도 있어.
스윽.
고개를 내려 목에 걸려있는 아테네의 목걸이를 바라봤다.
도윤이 갇혀 있는 마차에 바인딩 되어 있는 목걸이.
사용해본 적은 없지만 왠지 모르게 사용법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사용하는 순간 곧장 망자의 길로 향해진다는 사실도 말이다.
흠 돌아오는 방법이라.
이전에도 잠시 고민했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제일 먼저 떠오른 건 그리스에서 만난 사신 로인이었다.
망자의 길을 드나들 수 있는 능력.
로인이라면 무언가 방법을 알 것 같았다.
같이 가달라 하는 건 안 되겠지만.
나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다.
그리스에서 한국까지 끌고 간 이후에 나도 잘 모르겠는 말을 대답이랍시고 해버렸으니.
아마 낫을 갈며 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애초에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니까.
페샨의 눈이 있는 나완 달리 일반 사람은 로인을 보지 못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정보조차 모으기 힘든 상황.
그만큼 로인을 찾는데 걸리는 시간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찾는다 해도 같이 갈 순 없어.
단순히 이전의 일 때문에 양심이 찔려서는 아니었다.
저번을 떠올려 봤을 때 로인이 망자의 세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건 극히 일부분의 길뿐이었다.
사신인 로인조차 조심스레 이동을 하던 세계.
아테네의 목걸이가 바인딩 되어 있는 건 계속해서 이동 중인 가마였다.
로인이 다니던 길은 고사하고 이동하는 순간 망자의 군대 한복판에 떨어질 수도 있었다.
가도 나 혼자 가야지.
물론 죽으러 간단 말은 아니었다.
난 어느 상황에서도 죽을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기약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을 떠난다는 표현이었다.
끼익.
“어.”
그렇게 망자의 세계에 대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척유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어디 피난 가?”
무슨 짐이 그렇게 많은 지 한 보따리를 싸들고 나타난 척유라.
그런 척유라를 데리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제 새로운 곳에서 살아야 하니까 다 챙겨온 거지.”
“…?”
새로운 곳에서 살아간다니.
어린 나이다 보니 학교 가는 게 새로운 도전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학교 갔다가 언제 또 돌아오는데?”
내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기는 척유라.
한참 고개를 갸웃거리던 척유라가 입을 열었다.
“한참 뒤에?”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는 날 뒤로 하고.
척유라가 묘한 미소와 함께 정면을 응시했다.
그런 척유라의 입에서.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없을 테니까.”
* * *
고요한 산속의 집 툇마루.
온 세상을 백색으로 만든 눈과 함께 잔잔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 소리에 맞춰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풍경 종 소리.
“예쁘네.”
“그러게.”
풍경 종의 아래.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눈으로 뒤덮인 산을 바라봤다.
얼마만 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이렇게 나란히 앉아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것이 말이다.
“민쿠야 넌 보이지도 않겠구만 어떻게 아느뇨?”
“….”
밤새도록 이어진 두 사람의 대화.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대화에 둘은 결국 밤을 새워버렸고.
대화의 와중에 쉴새 없이 눈물을 흘린 민쿠의 눈은 퉁퉁 불어 눈동자가 가려져 있었다.
“율아 넌 어떻게 눈물 한 방울 안 흘려?”
눈은 퉁퉁 불었지만 이전과 달리 신나게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 민쿠가 입을 열었다.
그런 민쿠의 질문에 척사율이 홀홀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울어서 민쿠처럼 앞이 안 보이면 안 되니까.”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척사율이 민쿠를 바라봤다.
누군가에게 민쿠를 보고 싶다 말한 적은 없었다.
안 그래도 힘들었을 민쿠를 떠나게 한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보고 싶어 할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었다.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이야.’
어제 백운이 데려온 민쿠를 본 순간.
척사율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다행이라 생각했었다.
얼굴도 많이 상하고 귀가 축 늘어져 있긴 했지만.
어디 다친 곳 없이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만났기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더 늦기 전에 민쿠를 만날 수 있었기에.
척사율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산딸기 쥬스 맛있다.”
“홀홀.”
쥬스를 홀짝이는 민쿠에 척사율이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야 줬구나란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스윽.
척사율이 눈 내리는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하늘을 보고 있자니 지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있었다.
“내가 정말 어렸을 적. 항상 아버지와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 눈 내리는 하늘을 바라봤었지.”
지금 생각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아버지는 매일 말씀하셨어. 나와 툇마루에 앉아 대화를 나눌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같이 있기만 해도 행복함이 느껴지는 사람과 함께 말이야.”
척사율의 말을 들으며 민쿠도 미소를 지었다.
당시 척준경이 느꼈을 행복이 어떤 느낌일지.
척사율과 툇마루에 앉아 있는 지금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씀하셨지. 인생에 있어 그런 친구 한 명을 만들 수 있다면, 그건 무척이나 행복하고 축복받은 인생이라고.”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씩 기대어지는 척사율을 느꼈다.
‘….’
“민쿠야.”
“응, 말해.”
척사율의 입가로 행복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네 덕에 내 인생은 무척 행복하고, 또 축복받은 인생일 수 있었구나.”
“나도야.”
스윽.
민쿠가 어깨에 기대어진 머리를 토닥였다.
“이 못난 친구가 소원이 있는데 당연히 들어주겠지?”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는 목소리에.
민쿠가 목까지 올라온 울음을 삼키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무슨 소원이든 꼭 들어줄게.”
민쿠의 대답이 만족스러워서일까.
잠시 숨을 고르던 척사율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행복하게 살아다오.”
“…!!”
“길이 엇갈렸지만 이젠 제대로 찾아왔으니. 죄책감 같은 건 지나온 길에 묻고.”
꼬옥.
척사율이 민쿠의 손을 잡았다.
“행복하게 살아다오.”
귀로 또박또박 들려온 친구의 소원에.
민쿠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공기로 흩어지는 입김을 잠시 바라본 뒤 민쿠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게. 꼭… 그렇게 할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눈 덮인 고요한 산속 집.
집에서 들리는 건 지붕에 매달린 풍경 소리뿐이었다.
스윽.
잔잔히 퍼지는 풍경 소리와 눈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민쿠가 척사율의 머리로 얼굴을 기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