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답은 라면이다
가만히 서 있는 도윤을 바라봤다.
신기한 일이었다.
직접 얼굴을 마주한 건 지난번 잠깐 문을 열었을 때가 끝인데.
어째서 이렇게 반가운 걸까.
도윤 님도 반가워하는 거 같고.
도윤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비웃는 게 아니라 반가울 때 짓는 진짜 미소가 말이다.
“두 번째 보는 건데 낯설지 않은 게 신기하군.”
도윤이 입을 열어 내가 느끼고 있는 바를 대신 말해주었다.
마치 오래 헤어져 있던 친구를 제대로 만난 느낌이었다.
수리검 덕이겠지.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수리검을 통해 공명을 거치진 않아 본 적은 없지만, 명백히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도윤은 수리검을 아꼈으며 수리검 역시 그런 도윤을 따랐다는 사실이었다.
우웅.
도윤을 만나 반가워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무기고의 수리검 역시 문을 뜯어내기 무섭게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수리검도 난리가 났는데요.”
“황송하군. 아직도 잊지 않고 기억해주고 있다니.”
도윤과 수리검에 대해 이것저것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사아아…!
문이 뜯겨나간 탓일까.
마차 안의 봉인 공간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신기한 공간일세.
분명 마차가 옮겨지던 건 망자의 길이었다.
그럼에도 마차 안은 완벽히 다른 공간이라니.
세상엔 내가 알지 못하는 게 많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는 순간이었다.
스윽.
흩어지는 공간을 잠시 구경하다 도윤에게 손을 뻗었다.
“자 가시죠! 수리검 만나러.”
피식 웃음을 터뜨린 도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스으… 후웅!
내가 있는 쪽으로 몸을 날렸다.
* * *
순식간에 사라진 마차를 바라보며.
음!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무기고 안의 수리검과 도윤의 영혼이 말이다.
수리검에도 게이지가 생겼네.
영혼과 함께여야만 성장이 가능한 무기고의 무기들.
유일하게 영혼이 없어 게이지가 존재하지 않았던 수리검도 이제 성장시킬 수 있게 되었다.
수리검은 어떤 방향으로 성장하려나.
무기마다 특징이 있었고 성장의 방향 역시 뚜렷했다.
피를 갈망하던 잭 더 리퍼는 성장을 하면 할수록 광기와 피에 물들도록 발전했고.
절대 부서지지 않는 유탈라스의 비늘 역시 점점 더 날 보호하는 것에 최적화되도록 성장했다.
라의 문양에서 얼음이 나오는 일은 없겠지.
아직 다음 성장까지 게이지가 남아있는 라의 문양이었지만.
얼음이 나오지 않을 거란 건 명확했다.
태양의 신이라 알려졌던 라가 사실은 얼음의 신이었다! 라는 반전만 없다면 말이다.
음 수리검은 보자.
수리검이 지금 가지고 있는 능력은 비젼.
내 몸을 수리검이 있는 위치로 바꿔 주는 능력이었다.
나중엔 건물도 옮길 수 있게 해주려나.
수리검을 얻었을 때 여러 실험을 해봤었다.
사람을 데리고 옮기는 것까진 가능하지만 일정 부피를 넘어서는 건 옮겨지지 않았었다.
옮길 수 있게 해주면 많은 게 가능해질 텐데.
김칫국이지만 벌써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한두 명이 아니라 수십 명을, 사람뿐만이 아니라 거대한 건물까지 옮겨버리는 능력.
활용할 수 있는 상황이 무궁무진했다.
행복회로 풀가동이구만.
게이지가 조금도 차 있지 않은 수리검을 보며 행복회로를 잠시 돌린 후.
자 그럼.
슥.
몸을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이제 어쩐다.
조금 전 돌리던 행복회로가 무색해질 만큼 머쓱해지는 순간이었다.
멋있게 가마 위로 등장해 달려들던 망자들도 도륙 내버렸고, 구하려던 도윤도 무사 구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나갈 방법을 모른다는 근본적인 문제점은 아직 해결 전이었다.
해결은커녕 길도 안 보이지.
황폐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한 망자의 세계.
잠시 여기저기를 둘러봤지만 보이는 거라곤 끝없이 펼쳐진 어둠뿐이었다.
휘이잉.
넌 낯선 땅에 버려진 세계 미아야! 라는 걸 알려주는 듯한 쌀쌀한 바람과 함께 말이다.
망자쉨도 한 마리 안 보이네.
현재 마차가 있던 위치는 이전과 달랐다.
지난번 로인과 함께 봤을 때보다 꽤 먼 곳까지 이동한 것 같았다.
그때만 해도 망자가 사방에 득실거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망자는커녕 개미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황폐한 땅을 막막한 마음으로 구경하던 중.
꼬로록!
해야 할 일을 다 마친 탓일까.
강력한 배의 외침이 들려왔다.
일을 했으니 이제 연료를 넣어달라는 신호였다.
평소보다 우렁차구먼.
생각해보니 시간이 꽤 지나긴 했다.
척유라, 찹쌀떡과 함께 고기를 먹은 게 마지막 식사였으니까.
긴장이 풀려서 한방에 몰려오는구만.
아테네의 목걸이를 사용하기 직전부터 지금까지 솔직히 긴장 상태였었다.
나의 배 역시 이런 긴장에 억눌려 제 목소리를 내고 있지 못했던 것.
저벅.
열심히 자기주장을 펼치는 배를 위해 걸음을 옮겼다.
마차에 나타나기 무섭게 휙 던져놨던 나의 짐꾸러미들.
당장 없으면 흙을 퍼먹어야 하는, 몹시 소중한 꾸러미인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아무렇게나 던져버렸었다.
어디 보자.
주섬주섬 꾸러미를 펼쳤다.
군 시절 더블백으로 치면 열 개 정도는 될 거대한 꾸러미.
꾸러미 속엔 별의별 게 다 들어 있었다.
일단 눈에 보이면 다 쓸어 담은 덕분이었다.
역시 이건가.
잠시 고민을 하다 손을 뻗었다.
금강산도 식후경.
야외의 쌀쌀한 날씨에서 땡길 수밖에 없는 음식, 라면.
유통기한이 긴 라면 만큼은 그 어떤 음식보다 많이 챙겨왔다.
자리부터 잡아볼까.
당장 부르스타에 불을 올릴까 했지만.
지금 서 있는 곳은 너무 한복판이었기에.
“오.”
적당한 암벽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 * *
스륵.
백운이 라면을 먹기 위해 자리를 옮기고 있을 때.
멀지 않은 장소에 앉아있던 이가 몸을 일으켰다.
“얼레.”
졸린 눈을 비비며 백운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는 남자.
백발의 더벅머리와 맑은 초록색 눈, 그런 눈을 더 돋보이게 만드는 안경을 쓴 남자였다.
남자는 별일이 다 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런 일이 다 있네.”
신기할 따름이었다.
적막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이 정도의 소란이라니.
꽤 오랜 시간을 망자의 세계에서 지내왔지만 처음 겪는 일이었다.
톡… 톡… 톡.
남자가 발을 까딱이며 턱을 어루만졌다.
툭.
발을 까딱일 때마다 발에 채는 여러 가지의 물건들.
정확히는 잡동사니에 가까운 물건들이었다.
여기저기 조립되고 변형되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다고 명확하게 정의 내리기 힘든 생김새였다.
“나 같이 들어오게 된 건가.”
남자가 이곳에 들어왔던 순간을 떠올렸다.
단편적으로 드문드문 끊겨있는 기억뿐이지만 어쨌든.
지금 생각해도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찔했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분명 오래도록 살았던 집의 지하였는데 1초도 안 된 순간에 이런 곳까지 와버렸으니.
아무리 강심장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저 친구도 아찔하겠지.”
물론 친구인지 아닌지 판단하기는 일렀다.
막상 가보니 하늘을 뒤덮는 아찔한 망자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느낌이 좋아.”
남자는 불확실성보단 자신의 직감을 믿는 주의였다.
세상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이론이나 근거에 반하는 감이더라도.
그 감을 따라가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남자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슥슥.
오랜만에 느껴진 감에 남자가 턱을 빠르게 문질렀다.
감각이 느껴지는 곳은 꽤 먼 거리였지만 괜찮았다.
아무리 오래 걸리고 위험할지라도 자신이 믿고 있는 감을 확인하기 위해 그 길을 가는 것.
그것이 남자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해온 일이었으니까.
저벅.
“왠지 말이야.”
툭툭.
남자가 발에 치이는 잡동사니들을 밀어내며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조금 전 감각이 느껴진 장소였다.
“감이 왔단 말이지.”
남자의 입가에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본능적인 직감에 의한 미소가 그려졌다.
“재밌을 것 같은 감이 말이야!”
* * *
보글보글.
츄릅.
침을 닦으며 끓어오르기 시작한 물을 응시했다.
물이 끓는 온도 100도.
시간의 진행은 상대적이라 하더니.
평소엔 그렇게 빨리 끓던 물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안 끓는 건지 조바심이 났다.
그렇게 몇 분이나 기다렸을까.
지금!
뽀작!
물이 끓는 걸 확인한 후 빠르게 라면 세 봉지를 뜯어냈다.
누군가 보면 도야지라고 놀릴 법한 양이겠지만 어쩌겠는가.
몸에 근육이 붙으며 필요한 열량도 그만큼 많아졌는데.
안 먹으면 근손실 확정이야.
물론 라면을 먹는다고 근손실이 막아질지는 의문이었지만,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스프가 풀어지며 코로 스며드는 맵싸한 라면의 냄새.
냄새만 맡았을 뿐인데도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바스락.
라면 스프를 투하함에 이어 꾸러미에서 청양고추를 꺼냈다.
국물 음식에서 빠지면 서운한 식재료.
몇 개만 넣어도 얼큰하고 시원한 맛을 내주는 마법의 재료였다.
타타타!
신나게 청양고추를 넣고 면까지 입수시킨 후.
짧지만 영원처럼 느껴지는 기다림을 시작했다.
“하아.”
점점 익어가는 라면을 보다 주변을 둘러봤다.
마차가 사라진 곳에서 이삼백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절벽 아래.
자연적으로 파인 건지 작은 동굴이 생겨 있었다.
세상일 참 알 수가 없어.
일주일도 안 되어 세 가지 세계를 오가다니.
어디 판타지 모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일이었다.
거기다 그런 곳에서 라면까지.
이건 소설에 나오지 않을 법한 이야기였다.
보통 다른 세계에 떨어지면 그 세계의 특이한 식재료와 음식을 만나기 마련인데 라면이라니.
거기다 보통 소설에선 새로운 동료를 만나는 장면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었다.
밥을 먹더라도 같이 먹고 무언가와 싸우더라도 함께 싸우는 그런 동료와의 만남 말이다.
역시 소설과 현실의 괴리는 엄청나.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는커녕 망자만 안 나와도 감사한 세계였다.
이곳이 아니더라도 이전에 갔던 데몬의 세계만 봐도 마찬가지였다.
공명으로 들어가 척준경을 만나긴 했지만 환경 자체는 사람이 사는 게 불가능한 곳이었다.
여기라고 다를 건 없겠지.
현실적으로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세계에.
만약 판타지 소설처럼 동료가 나타난다면 손에 장을 지진다는 생각을 하며 라면을 내려다봤다.
망자의 세계에서만 나는 특산물이 들어간 화려한 요리는 아니었지만.
뭐 어때!
보글보글.
맛있으면 그만이지!
내 입에만 맛있게 느껴지면 된 거 아니겠는가.
열심히 긍정회로를 돌리며 냄비의 뚜껑을 열자 수증기와 함께 꼬들하게 잘 익은 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따악!
잔뜩 집어온 나무젓가락을 하나 뜯어낸 후.
라면을 크게 한 젓가락 떠 입으로 집어넣었다.
후루룩!
시원하면서도 기분 좋은 면치기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들었으면 요란하게 먹는다고 욕했겠지만 지금 주변엔 개미 한 마리도 없었다.
라면으로 면치기를 하든 두루치기를 하든 볼 사람이 없는 장소.
어찌 생각하면 편하기도 하네.
의도치 않게 발견한 망자의 세계의 장점을 느끼며 다시 한번 큼지막하게 라면을 뜨는 순간.
“맛있어?”
누군가의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