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왕이 왕에게
머선 일이냐 이건 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늘로 솟아있었던 수많은 돌무더기가.
두두두두두두!
땅으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파지직…!
떨어지는 돌무더기에는 익숙한 붉은색 스파크가 감아져 있었다.
스윽.
뒤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건축물의 하늘엔 어느샌가 균열이 열려있었다.
확실하진 않아도 노운이 말했던 세계를 잇는 문인 것 같았다.
그리고.
파즈즈…!!
노운이 있었다.
건축물의 위.
손바닥을 바닥에 댄 채 노운이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돌무더기를 감싸고 있던 붉은 스파크는 노운의 손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허공을 타고 올라 돌무더기를 감싸버린 스파크.
돌무더기의 힘을 빼앗고 바닥으로 추락시킨 힘의 정체였다.
싱긋.
…!
노운이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 번이 최대야.”
문을 여느라 이미 많은 힘을 소진했을 노운.
조금 전 돌무더기를 끌어내린 정체불명의 힘이 노운이 가진 최후의 힘이었다.
털썩.
이젠 서 있을 힘도 없어서일까.
노운이 숨을 몰아쉬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문은 열어놨어.”
“….”
척.
노운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조금 전 노운이 사용한 힘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노운은 약속한 것들을 지켜 준 것은 물론 날 위해 마지막 힘까지 짜내 카사락의 마법을 무효화시켰다.
여기만 정리하면 되겠구나.
스윽.
고개를 돌려 카사락과 망자의 군대를 바라봤다.
어째서인지 군대는 멈춰있었고 책을 들고 있는 카사락의 푸른 안광은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믿었던 에너지 구체가 베인 것도 모자라 노운의 힘에 두 번째 마법이 무효화되기까지.
당황을 넘어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책에 남은 힘이 없나 봐.”
“!!”
다시 한번 푸른 안광이 크게 요동쳤다.
정답이구만.
처음 봤을 때 카사락의 책엔 푸른 기운이 잔뜩 둘러져 있었다.
지금은 완전히 사라져 낡은 책의 모습을 하고 있는 카사락의 마법서.
두 번의 마법에 가용한 모든 힘을 쏟아부은 모양이었다.
내 차롄가.
더 이상 신경 쓰이게 하는 마법 구체는 없었다.
다시 만들 수 있는 힘도 당장은 없는 듯하니.
남은 거라곤 아래에서 굳어 있는 망자들뿐이었다.
스릉.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연기를 일렁이며.
“책을 다시 펼칠 수 있게 되기 전에.”
검을 들어 카사락과 망자의 군대를 겨누었다.
“끝내주마.”
* * *
카사락이 하늘을 바라봤다.
태양이 없는 세계였으나 하늘은 대낮처럼 밝았다.
하늘만 놓고 본다면 푸른 빛이 가득해 아름답다고도 느껴질 수 있는 광경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크라라아아… 아.”
“크르… 크르륵…!”
그 광경을 만들고 있는 게 망자의 죽음이란 것이었다.
‘….’
카사락이 무참히 쓸려나가고 있는 군대를 바라봤다.
오랜 시간 단 한 개체도 소멸되지 않았던 망자인데.
지금은 한 명의 남자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가고 있었다.
콰앙! 콰앙! 콰아아악!
말도 안 되는 스피드와 힘이었다.
스르르…!
칼데아의 날개를 이용해 순간이동에 가까운 이동을 하면서도.
백운의 검이 만들어내는 결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물결.
마치 음율을 타고 끝없이 이어지는 물의 흐름 같았다.
“크라악!”
흐름이 지나가는 곳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가루가 된 망자와 소멸되며 발생한 푸른빛을 제외하면 말이다.
스윽.
카사락이 고개를 내려 마법서를 응시했다.
백운의 말대로 마법서는 그 힘을 다한 상태였다.
오만한 인간 때문에 화가 나 무리하게 힘을 끌어올린 탓이었다.
스르르.
물론.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흩어졌던 마나가 마법서로 모이고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린다면 다시 마법을 쏟아낼 수 있을 터였다.
‘다시 쏟아낼 수 있을 터인데…’
이상했다.
사라졌던 힘이 돌아오는 것임에도 카사락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되려 탄생 이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낯선 감각이 밀려왔다.
의구심.
‘돌아온다고 한들, 이길 수 있는 것인가.’
백운은 칼데아의 날개를 가지게 되었고 곧장 카사락을 향해 날아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카사락을 죽이는 걸 넘어 망자의 세계 자체를 부숴버리겠다는 듯이.
백운은 닥치는대로 망자들을 베어내고 있었다.
‘알고 있는 건가.’
죽어선 안 되는 망자가 죽는다는 것 자체가 카사락이 지켜왔던 질서가 흔들리는 걸 의미했고.
죽어 나가는 망자가 늘어난다는 것은 곧 질서는 물론이고 카사락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걸 뜻했다.
‘무너지고 있다.’
저릿.
의구심에 이어 또 다른 감각들이 연달아 밀려왔다.
공포와 무기력감.
백운에 의해 망자의 세계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음에도.
카사락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카사락이 백운과 구체가 만나기 직전을 떠올렸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알 것 같았다.
구체를 마주하고 있는 백운을 보며 카사락이 느낀 건 분노가 아니었다.
낯선 감정이라 분노로 감추어 내긴 했으나.
그것은 명백한 불안이었다.
그래서 마법서의 남은 힘을 전부 쏟아부은 것이었다.
그마저도 연금술사의 미지의 힘에 의해 가로막혔지만 말이다.
‘운명의 장난인가.’
카사락이 하늘에 열려있는 균열 문과 건축물에 주저앉아 있는 연금술사, 그리고.
콰아아앙!!
“크라아아악!”
칼데아를 단 채 쉴새 없이 망자들을 쓸어내고 있는 백운을 응시했다.
카사락이 가장 중요시했던 질서를 위협하는 모든 요소가 한자리에 모여있었다.
‘이길 수 없다.’
저벅.
카사락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더 무너졌다가는 돌이킬 수 없었다.
더 싸운다고 한들 이길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망자의 세계에서 내보내야 했다.
척.
멈춰 선 카사락이 입을 열었다.
“그만!!”
* * *
…?
카사락이 외침이 들려오고 잠시 후.
개떼처럼 달려들던 망자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스윽.
고개를 들어 날 보고 있는 카사락을 응시했다.
처음에 비하면 턱없이 적지만 카사락의 마법서엔 푸른빛이 돌고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내게 마법을 쏘아낼 수도 있었을 터.
하지만 카사락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날 보며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
스륵.
카사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내주마.”
“뭐…?”
의외의 말이 들려왔다.
하도 질서를 운운하길래 모든 망자가 가루로 변할 때까지 싸울 줄 알았는데.
보내준다니.
“문은 열렸다.”
카사락이 손을 들어 하늘에 열려있는 균열을 가리켰다.
“막지 않을 테니 가거라.”
“….”
망자를 겨누고 있던 검을 내리고 카사락을 응시했다.
“거짓말이 아니야.”
뒤에서 노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봐도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무언가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하지만.
저벅.
날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카사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뜻밖의 행동이었는지 안광이 흔들리는 카사락.
“크라아아!”
자신의 왕에게 다가가서일까.
물러나 있던 망자 몇 마리가 길을 막았다.
서걱! 서걱!
망설임 없이 망자를 베어버리자.
“물러서라.”
길을 막지 말라는 카사락의 명령이 떨어지고.
“크르르…!”
수천… 아니, 어쩌면 수만 마리에 육박할 망자들이 길을 열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홍해의 기적을 떠올리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척.
카사락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카사락은 여전히 말에 탄 채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가까이 와 바라보니 명확하게 알 것 같았다.
애써 감추려 하고 있으나.
그것은 감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씨익.
“무섭구나.”
“!!!”
“크라아아아악!!!”
“키아아악!!”
왕에 대한 모독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명령이 있어 당장 들려 들진 않았으나 망자들은 당장에라도 날 찢어 죽일 듯이 울부짖었다.
고오오오…!
안광만 흔들리는 게 아니었다.
치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건지 안광과 더불어 카사락의 몸 전체가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던가 말던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얼굴의 웃음기를 지우며 고개를 까닥였다.
“내려와, 이 새끼야. 내려다보지 말고.”
“감히 지금 누구한테….”
카사락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지만 들어 줄 생각은 없었다.
“오랫동안 자서 그런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스릉.
“네가 날 보내주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위치라고 생각해?”
“!!”
“네가 정해라.”
검을 들어 주위에 있는 망자들을 가리켰다.
“얼마가 걸리든 마저 다 죽이고 나갈지, 아니면 여기까지만 하고 조용히 문으로 나갈지. 만약 후자를 원한다면.”
톡.
“내려와서.”
악귀참도의 검 끝으로 발 앞의 땅을 가리켰다.
“무릎 꿇어.”
“!!”
분노하거나 놀랄 수 있는 경계를 넘어버린 것 같았다.
괴성을 지르던 아까와는 달리 망자의 군대로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그리고 내가 필요로 할 때 한 번, 나를 위해 싸워라.”
셀 수 없이 많은 수의 망자.
모든 망자의 눈이 자신들의 왕인 카사락에게 향해 있었다.
“그럼 더 이상 죽이지 않고 나가주마.”
말을 건네며 어깨로 솟아있는 칼데아의 반응을 살폈다.
수 천의 망자를 베어서일까.
연기를 터뜨리며 날뛰었던 아까와는 달랐다.
이쯤이면 됐다는 듯 차분한 상태.
“….”
짧은 순간이었지만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한 걸까.
카사락은 조금 전처럼 감히란 단어를 사용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나와 악귀참도, 망자들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도저히 못 하겠다면.”
움직일 기미가 안 보이는 카사락에 천천히 악귀참도를 들어 올렸다.
언제까지고 기다려 줄 생각은 없었다.
그 순간.
철컥.
카사락이 말에서 내려 땅으로 발을 디뎠다.
이제야 어느 정도 맞추어진 눈높이.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카사락과 눈을 마주쳤다.
“….”
한동안 말없이 날 바라보던 카사락.
스륵.
카사락이 천천히 무릎을 굽히며.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 * *
“하하…”
노운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대단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눈앞에선 말도 안 되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오랜 시간 군림해 온 망자의 왕, 카사락.
카사락은 지금 다른 세계에서 온 왕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현명하네.”
긍지 높은 카사락이었으나.
깨달은 것이었다.
같은 왕이지만 앞에 있는 백운은 다른 차원의 힘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우루루루루…!
“…!!”
카사락이 무릎을 꿇은 것을 시작으로.
백운을 둘러싸고 있던 엄청난 수의 망자가 몸을 숙이기 시작했다.
파도가 밀려오듯 순차적으로 몸을 낮추는 망자의 군대.
“….”
백운에게 무릎을 꿇은 건 단순히 망자의 왕뿐만이 아니었다.
망자의 세계.
하나의 세계 전체가 패배를 인정하고 백운에게 고개를 숙인 것이었다.
스윽.
노운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균열의 문을 여는 것으로 자신이 약속했던 바는 모두 이행했다.
이제 남은 건 하나의 세계를 무릎 꿇린 왕에게.
저벅.
“부탁하러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