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노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날이었는데.
- 뭐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줄리아가 무언가 잘못을 한 것도 아니었다.
줄리아는 그저 밝은 얼굴로 내게 걸어왔을 뿐이었다.
- 콰아아아!
처음 느껴보는 힘이었다.
닿는 것만으로도 살이 시려오는 이질적인 힘.
힘은 연구실 중앙으로 거대한 소용돌이들 만들었고, 그 위에 있던 줄리아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 줄리아!!
삼켜지고 있는 자신조차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기에.
줄리아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이겨낼 수 없는 힘에 끌려가며 겁을 먹은 채.
가장 믿을 수 있는 이를 향해 본능적으로 손을 뻗는 것만이 줄리아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장갑이…!
연구실엔 장갑이 없었다.
연금술을 증폭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장갑.
이제 와서 가지고 올 시간 따위는 없었다.
당장 눈앞의 균열이 닫혀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등가교환의 법칙]
장갑이 없기에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다른 대가를 치러서라도 연금술의 힘을 키워 균열을 열어야 했다.
균열이 사라지며 목적지를 완전히 소실하기 전에 말이다.
- 대가는.
한 손은 균열로.
다른 한 손은 내 몸으로 가져갔다.
- 그라비티 디바이스.
고민하지 않았다.
망설이지도 않았다.
곧장 닫히려는 균열을 비틀어 열었고.
- 줄리아!
어딘가에 홀로 떨어져 있는 줄리아와 나의 몸을 뒤바꾸었다.
“….”
스윽.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원래라면 주변을 둘러보며 이곳이 어딘지를 파악했을 테지만.
불가능했다.
줄리아를 데려가는 내 연금술에 검을 휘둘렀던 존재.
말을 탄 채로 날 내려다보고 있는 이세계의 존재가.
“넌 무엇이냐.”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 * *
자신을 이 세계의 왕이라 밝혔던 카사락.
카사락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채 조용히 자리를 떠났었다.
의외였다.
들고 있는 칼을 휘두르거나 거느리고 있는 병사를 시켜 날 죽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자리를 떠나다니.
저벅.
망자의 세계.
육신을 잃은 자들의 종착지라고 카사락은 설명했었다.
- 보통은 올 수 없지만 말이다.
처음엔 죄를 많이 지어서 오는 지옥인가 했는데 그렇진 않은 듯했다.
죽는다고 무조건 오는 곳은 아니며 계기가 필요한 것 같았다.
지옥은 아니어서 다행인가.
“후읍.”
걸음을 멈추고 숨을 들이켰다.
아니라고는 했지만 지옥이라 해도 충분히 믿을만한 장소였다.
분명 호흡을 하고 있음에도 숨이 막히는 답답한 기분.
공간을 메우고 있는 공기 자체가 탁한 것 같았다.
스윽.
고개를 들어 정면에 펼쳐진 길을 바라봤다.
눈앞엔 끝없는 황무지와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하고 떨어진 이세계.
어차피 육신은 사라졌다.
다시 돌아가지 못할 테니 천천히 거닐어 볼 생각이었다.
“줄리아.”
겁에 질려 있던 줄리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이곳에 떨어져 있다는 건 연금술이 성공했다는 걸 의미했으니.
이제 바라는 건 줄리아가 잠시나마 봤던 광경을 잊은 채 무사히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저벅.
걸음을 옮기며 줄리아의 얼굴을 떠올리던 중.
…?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
소용돌이에 집어삼켜 진 순간.
줄리아는 내게 손을 뻗었었다.
내 이름을 부르면서 말이다.
스륵.
이상했다.
줄리아가 부른 그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 * *
파지직…!
돌아다니며 주운 물건들에 연금술을 사용했다.
아무것도 안 하기엔 시간이 너무 남아서도 있지만.
무리해서라도 연금술을 사용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
내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을 땐 잠시 일어난 현상일 거라 생각했었다.
조금만 지나 이 세계에 적응하면 다시 기억날 거라고 위로하면서.
하지만, 아니었다.
여전히 내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파지… 직.
문제는 이름뿐만이 아니었다.
몸과 머리에 새겨져 당연시되었던 모든 것들이 잊혀지고 있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연금술도 마찬가지였다.
수천수만 번을 사용했던 나의 능력인데.
어느 순간부터 방법이 흐릿해지며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으득.
입술을 깨물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잊어가고 있다니.
이곳에서 나란 존재를 기억하는 건 나 자신 하나뿐인데.
그마저도 잊혀지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스슥.
들고 있는 쇠를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
어두운 황무지의 모랫바닥.
내일이면 사라질 터였지만 그려야 했다.
슥. 슥.
전체적인 얼굴의 형태를 그리다 손을 멈췄다.
빠드득.
세게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매일같이 그리던 얼굴이 있었는데.
잊어선 안 되는 얼굴인데 그릴 수가 없었다.
툭.
쇳조각을 내려놓고 하늘을 바라봤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절대 잊어선 안 되는 사람인데.
“기억이… 안 나네.”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턱.
떨어져 있는 쇳조각을 집어 반대편 손목을 향해 휘둘렀다.
사락.
역시 허사였다.
몇 번인지 모르겠지만 수도 없이 시도해봤었다.
“….”
잠시 그렇게 멈춰있다가 천천히 몸을 눕혔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스륵.
내일은 더 이상 잊지 않기를 바라며 잠이 드는 것뿐이었다.
* * *
망자의 세계에 도착하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걸까.
가끔 궁금하긴 했지만 알 방법은 없었다.
해가 뜨고 지는 세계가 아니었기에.
시간을 가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리 아프네.”
자리에 앉아 저릿한 다리를 두드렸다.
일어나서 하는 일이라곤 주변을 돌아다니는 게 전부였다.
자박.
멀지 않은 곳에서 지나가는 망자를 바라봤다.
돌아다니다 망자를 처음 마주쳤을 땐 깜짝 놀랐었다.
이곳에 도착한 날 카사락과 군대를 보긴 했으나.
인간이 아닌 존재의 생김새가 단번에 적응될 리 없었기 때문이다.
- 스으윽.
깜짝 놀란 나와 달리 망자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었다.
마치 내가 공기 중 일부라고 여기는 것처럼 조용히 지나칠 뿐이었다.
“에휴 쟤나 나나.”
그다지 호감이 가는 생김새는 아니었으나.
어째서일까.
이상하게 마음이 가는 존재였다.
으쓱.
어깨를 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아.”
한숨과 함께 팔을 짚으며 하늘을 바라봤다.
기분이 이상했다.
“대체 뭘까.”
무언가 기억이 나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종종 밀려오는 정체불명의 감각이 뭔지 궁금할 뿐이었다.
절대 잊어선 안 되는 걸 잊고 있는 이 감각.
그냥 기우겠거니 넘기기에는 몹시 찜찜하면서도 선명한 감각이었다.
“잠을 못 잤나.”
스윽.
다시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지루하다 지루해.
매일 매일이 다를 것 없는 하루였으니 안 지루한 게 이상했다.
무언가 작은 변화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고오오오오…!
“!!”
어둡기만 하던 하늘로 몇 줄기의 푸른빛이 솟아올랐다.
처음이었다.
움직이는거라곤 자신과 망자뿐이던 세계에 찾아온, 적어도 내가 본 첫 번째 변화였다.
저벅… 저벅… 저벅…!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확신이 들었다.
저곳으로 가야 했다.
* * *
빠르게 걸어 도착한 곳엔 한 남자가 있었다.
이럴 수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사람이었다.
육신이 존재하는, 온기가 존재하는 진짜 사람.
망자의 세계에 온 후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었다.
후루룹!
남자는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국물 속에 담겨 김이 풀풀 나는 면이었다.
꼬로록.
…?
배에서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겐 당연한 소리였지만 내겐 아니었다.
망자의 세계에 온 후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에도 난 배고프지 않았다.
더 이상 무언가를 넣지 않아도 되는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저벅.
나도 모르게 남자에게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매콤하면서도 맛있을 것 같은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저벅.
꽤 가까이 다가갔음에도 남자는 날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저게 뭘까.
남자가 먹고 있는 게 뭔지 너무 궁금했다.
조금 더 망설였다간 남자가 전부 먹어버릴 것 같았기에.
성큼.
크게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맛있어?”
* * *
피식.
백운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리며 노운이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만남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세계를 떠돌기만 할 뿐이었으니.
당장 본능이 앞서 백운이 먹고 있는 라면을 뺏어 먹었었다.
‘맛있었지.’
입으로 들어오는 면의 맛은 엄청났었다.
백운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어느샌가 옆으로 와 같이 라면을 먹고 있었다.
한 젓가락이라도 더 먹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면서 말이다.
저벅.
카사락 앞에 서 있는 백운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라면을 먹고 난 후였나.’
정확한 시점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백운과 몇 마디를 나눈 시점.
어둡기만 하던 머릿속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점점 캄캄해지기만 하던 지금까지와는 정반대되는 상황.
- …!!
그리고.
잊고 있었던 것들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완벽한 기억은 아니었으나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종종 느껴지던 서글픈 감각.
잊어선 안 되는 걸 잊고 있다는 그 감각의 정체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 ….
백운과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한 이유는 명확해졌다.
규율을 어기며 망자를 베어낸 백운.
백운 덕분이었다.
망자의 세계가 가지고 있는 모든 규율과 질서를 거부할 수 있는 권능.
백운은 망자의 세계를 능가하는 권능을 가지고 있었고 그 영향이 나에게까지 끼친 것이었다.
‘… 다시 잊어버릴 순 없어.’
기억을 되찾으며 노운은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소중한 것을 망각한 채 살아왔는지를 말이다.
‘절대로.’
꽈악.
주먹을 움켜쥐며 노운이 한 발자국을 더 내디뎠다.
“노운!”
날 돌아본 백운이 손을 흔들었다.
그런 백운을 향해 미소를 지어줬다.
“괜찮아?”
다가온 백운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내려다봤다.
함께 한 시간은 오래되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앞에 있는 친구는 재밌고, 또 좋은 사람이었다.
“뜸 들이는 거 보니 부탁을 말하러 왔구만.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빨리 말해! 다 들어줄 테니까!”
눈치 빠른 백운을 응시했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말해야 했다.
백운은 곧 떠날 것이었고, 그럼 다시 제자리였다.
‘….’
인간일 때의 나를, 내 이름을 다시 망각하는 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줄리아.’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
보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사람의 이름을, 목소리를, 얼굴을.
함께 했던 수많은 순간을 다시 잊는다는 건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다.
“백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왕이시여, 망각으로부터 절….’
얼른 말해보라고 재촉하는 백운을 향해 미소를 그렸다.
‘자유롭게 하소서.’
“날 죽여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