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여긴 어디
오?
망자의 세계에서 나와 얼마나 걸은 걸까.
하염없이 걸어도 나타나지 않던 길의 끝이 드디어 보이기 시작했다.
반짝.
길의 끝엔 균열이 있었다.
희미한 빛을 내며 묘하게 일렁거리고 있는 균열이었다.
드디어…!
균열이 날 어디로 인도할지는 미지수였으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무념무상으로 걷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아무것도 없는 길을 한참이나 걷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숨을 위협하는 데몬도, 나아감을 방해하는 함정도 없어 안전하기 짝이 없는 길이었으나.
오히려 그런 게 있었으면 할 정도로 극한의 지루함과 심심함을 이겨내야 했다.
학교에서도 벽 보고 서 있는 게 가장 힘들긴 했어.
고개를 끄덕이며 메고 있던 배낭을 고쳐 잡았다.
오는 길에 라면이랑 통조림만 먹느라 축 처져 있던 몸에 활력이 돌았다.
호다닥!
출구가 없어지거나 할 일은 없겠지만, 한시라도 빨리 길을 벗어나고 싶었다.
통통 튀는 뜀박질로 균열을 향해 내달렸다.
사아아…!
응?
바로 균열로 다이빙해야지 마음먹으며 길의 끝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위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에 고개를 들었다.
스르르.
고개를 올림과 동시에 눈으로 푸른빛이 일렁였다.
페샨의 눈이 발동했다는 건 한 가지를 의미했다.
원래의 눈으론 볼 수 없는 게 하늘에 있다는 것.
얼레?
어디서 나타난 걸까.
방금까지 눈이 발동하지 않은 걸 보면 지금 나타난 것이었다.
로인… 은 아니겠지.
그리스에서 만났던 사신 로인을 떠올리게 하는 생김새였다.
저마다 약간씩 다르긴 했으나 로인과 매우 흡사한 갑주를 걸치고 있는 무리.
못해도 스무 명은 넘을 듯한 숫자였다.
멋있네.
직접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지만 로인을 보며 멋있다고 느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로인은 사신 생김새의 갑주는 물론이고 무려 거대 낫까지 들고 있었다.
이건 못 참지.
간지의 로망 중 사신의 생김새를 완벽히 재현하고 있었으니.
눈이 반짝이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모여있으니까 더 멋있어.
로인이랑도 안면이 있으니 아는 척이라도 좀 해볼까 하는 순간.
스윽.
하늘에 떠 있던 사신들이 일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
거리가 멀어 무슨 상황인진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손을 흔들만한 분위기는 아니란 것이었다.
사신 무리와 나 사이로 약간의 정적이 찾아왔다.
….
잠시 날 내려다보던 사신들이 가지고 있는 낫을 치켜들었다.
하늘로 높게 들린 스무 개의 낫.
사신님들… 설마 아니죠?
처음 만난 사이였다.
대화한 적도 없어 말실수한 것도 아니었다.
공격할 껀덕지라곤 전혀 없었는데 저 움직임은 뭐란 말인가.
“저기요! 지금 혹시….”
먼저 적의가 없음을 보이려 입을 열었지만 말을 끝맺진 못했다.
스무 개의 낫으로 심상치 않은 힘이 모이는가 싶더니.
쐐에에에엑!
한순간에 휘둘러지며 투명한 에너지가 쏘아졌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날카롭게 날아드는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미친놈들이?
설마했던 공격을 지체 없이 쏘아내는 사신 놈들.
저런.
날아드는 에너지를 피해 뒤로 몸을 날렸다.
콰아앙!
길에 부딪힌 에너지에서 충격파가 발생했다.
서 있기조차 힘든 후폭풍에 몸이 뒤로 밀려났다.
땅을 디디며 앞으로 도약하려는 순간.
어.
내가 서 있던 곳은 길의 끝부분이었다.
뒤로 밀려난 후 디뎌지지 않는 발에 아래를 내려다봤다.
충격파 때문에 자연스럽게 균열로 뛰어들게 되었다.
[도윤 - 비젼 수리검]
수리검으로 다시 올라가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쐐에에엑--!
첫 공격을 피한 걸 확인한 사신들이 쉴새 없이 낫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수십 발의 포격.
포격 속으로 수리검을 던진다 한들 원하는 위치까지 도달하지 못할 터였다.
저런 샹.
[유탈라스 - 전신의태, 갑주]
콰가가가가!
피할 곳 없는 공중에서 공격을 받아내며.
스으으으…!
몸이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쿵…!!
공격을 얻어맞으며 나와서일까.
균열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땅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이런 뼈다귀 새끼들이!”
바로 일어나 하늘을 바라봤다.
다시 들어가려 했으나 날 뱉어낸 균열은 순식간에 사라진 뒤였다.
길의 끝에 도달해 신났었는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묻지마 공격이라니.
다치진 않았지만.
다치긴커녕 유탈라스의 비늘에 기스도 안 난 상태였다.
그럼에도 몹시 괘씸했다.
먼저 손을 흔들어 볼까 하고 있었는데 다짜고짜 낫부터 휘두르고 보는 사신 놈들.
뭐 이런 경우 없는 새끼들이 다 있지.
잠시 씩씩거리다 고개를 돌렸다.
몹시 괘씸했으나 당장 길로 돌아갈 방법은 없었다.
왜 공격당한 건가 생각해봐도 답이 안 나왔기에 나중을 기약해야 했다.
맨 앞에 있던 놈.
떨어지는 와중에도 무리의 선두에 있던 사신 얼굴은 똑똑히 봐뒀었다.
잊지 않게끔 눈을 감고 몇 번 놈의 얼굴을 되새긴 후.
기억했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괘씸한 마음을 억누르고 나서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긴 또 어디야.
유탈라스를 해제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둘러보며 떠오른 단어는 하나였다.
폐허.
뭐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
부서진 건물이나 땅에 널브러진 물건을 봤을 때 지구인 건 확실했다.
단지 멀쩡한 게 하나도 없는 게 문제였다.
도시는 아니지만 나름 규모가 있는 마을이었을 것 같은데.
제대로 폭격을 맞은 건지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음?
앞에 반으로 쪼개져 있는 간판을 바라봤다.
일본어네.
일본인가?
떨어지는 곳이 지구임은 확실하지만.
지구의 어디일지는 미지수라고 아이작은 말했었다.
어디 화산이나 바다 한가운데 안 떨어진 것만 해도 땡큐지.
일본이라면 썩 나쁘지 않은 도착지였다.
와본 적이 있기도 했고 한국이랑도 멀지 않으니.
방향만 특정된다면 칼데아로 하루면 돌아갈 수 있었다.
스윽.
박살 나있는 자재에 손을 올렸다.
손을 통해 뜨끈한 온기가 느껴졌다.
이 사달이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부르릉.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디에 떨어진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반가울 수밖에 없는 소리였다.
잘됐다.
태워달라고 해야지.
아직 말도 안 걸었지만 이런 곳에 버려진 사람을 내버려 두진 않겠지 생각하며.
차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군인인가.
후지산 사로카 사태 때 봤던 군용 차량이었다.
꽤 큰 먼지가 생기는 걸로 보아 한두 대가 아닌 듯했다.
끼이익!
몇 대가 나를 지나치는가 싶더니 흙먼지를 일으키며 멈추는 차량들.
착각일 수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날 둘러싼 듯한 느낌이었다.
차가 멈추기 무섭게 완전 무장을 마친 병력이 내리며 자세를 잡았다.
오늘 마가 꼈나.
둘러싸는 거 같더니만 기우가 아니었다.
철컥! 철컥!
차에서 내린 병사들이 곧장 화기를 겨누었다.
아까 사신 놈들처럼 바로 쏘진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 같았다.
“꼼짝 마!!”
카랑카랑하면서도 비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총을 겨누고 있는 쪽인데 겨눠지고 있는 나보다 훨씬 긴장한 목소리에.
스윽.
천천히 손을 들었다.
긴장은 왜 저쪽이 하는 거지.
의문이 들긴 했으나 어쩌겠는가.
아직 쏜 것도 아니었다.
데몬도 아닌데 막무가내로 뚜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벅.
조금 전 꼼짝하지 말려고 했던 군인이 헬맷을 벗으며 내게 다가왔다.
목까지 오는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여자였다.
“누구냐!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비장한 얼굴로 묻는 여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됐다.
망자의 세계에 있다가 균열을 통해 왔습니다…? 하면 바로 총 맞을 거 같고.
어쨌든 공식적인 신분을 말하는 게 가장 문제가 적을 것 같았다.
“한국 국가직 소속 10급 헌터 백운입니다. 수상한 사람 아니에요.”
“한국의 10급 헌터…?”
눈살을 찌푸린 여자가 더 수상한 눈초리로 날 바라봤다.
“전 일본 국가직 소속 헌터 미라코입니다. 신분을 증명할만한 게 있나요?”
말투는 존댓말로 변했지만 여전히 총구는 날 향하고 있었다.
경계와 의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증명을 요구하는 미라코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헌터청에서 받아둔 헌터 신분증이 배낭에 있었다.
“배낭에 있는데 좀 꺼내도 될까요?”
고개를 끄덕이는 미라코에 천천히 뒤로 메고 있던 배낭을 앞으로 옮겼다.
훼엥.
… 시벌.
어쩐지 가볍다 싶더라니.
어깨에 걸어뒀던 가방끈을 제외하고 배낭은 걸레 짝이 된 상태였다.
당연히 내용물도 어딘가에 다 토해내 버린 모습.
사신 새끼들!
멍하니 끈만 남은 배낭을 바라보며 사신을 욕하는 사이.
가까이 다가온 미라코가 다시 총을 겨누었다.
“일단 같이 가시죠.”
쯧.
어차피 차를 얻어 탈 생각이긴 했었다.
본부로 가면 신원 조회도 금방 될 터였다.
철컥.
“신원이 확인되면 바로 풀어 드리겠습니다.”
순순히 두 손을 내어주고.
“네, 어디로 타면 될까요?”
자연스럽게 탈 차량을 묻고 걸어가려는 찰나.
아.
무엇보다 내 신분을 빠르고, 확실하고, 효과적으로 증명해 줄 사람이 떠올랐다.
미라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 신분을 증명해주실 분이 일본에 계시긴 하거든요.”
“…? 누구시죠?”
여전히 의구심 가득한 미라코에.
흡족한 미소를 띠며 말을 건넸다.
“니시다 료코 장관님요.”
* * *
망자의 세계, 카사락의 성.
카사락이 찡그린 얼굴로 앞에 있는 사신들을 응시했다.
“언제부터 사신 따위가 멋대로 이곳에 드나든 거지.”
싸늘한 카사락의 목소리에 사신 무리가 몸을 움찔거렸다.
저벅.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사신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망자의 세계에서 지구로 향하는 길이 열렸습니다. 저번 이후로 다시는 길이 열리는 일이 없을 거라 하셨을 텐데요.”
사신의 말에 카사락이 조소를 머금었다.
“네놈들이 지름길이랍시고 망자의 길을 사용하는 건 되고, 망자의 세계에서 길을 여는 건 안 된다는 건가?”
“그것이 약속이었습니다.”
“클클…!”
스윽.
카사락이 비웃으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내가 무서워 직접 오지도 못하는 겁쟁이가… 약속을 논하는가?”
“…!!”
카사락 앞에 있는 사신, 정확히는 사신의 몸에 깃들어 있는 존재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지구로 향하고 있는 인간을 발견했습니다. 누굽니까? 그자는.”
이번엔 카사락의 눈이 커졌다.
“그자를 어떻게 했지?”
“사신이 아닌 자가 길을 이용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곧장 처형했습니다.”
“크… 크하하하하!!”
카사락이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
“처형이라….”
백운과 맺었던 맹약이 멀쩡한 걸 확인한 카사락이 고개를 흔들었다.
“안 건드렸어도 되는… 건드리면 안 되는걸.”
카사락의 입가로 비릿한 미소가 그려졌다.
“괜히 건드렸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