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악귀의 형상
에너지가 뿜어지기 직전인 하늘을 응시했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료헤이에겐 리볼버 몇 발을 갈겨주긴 했지만.
- 쉬이익!
료헤이를 태우고 있던 데몬 놈이 빠르게 피하는 바람에 별 의미는 없었다.
쯧.
멀어지는 료헤이와 데몬을 쫓진 않았다.
빛이 번쩍이는 걸 보니 내려올 준비를 마친 것 같았다.
당장 뿜어져도 이상할 것 없는 일렁임을 바라보며.
료헤이가 도망치며 떠들어 재낀 말을 떠올렸다.
- 닿을 수 없는 게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싸이비 종교다 보니 비유적으로 말한 거라 생각했었다.
신처럼 떠받들고 있는 데몬이다 보니 과장도 많이 섞였겠지 싶었는데.
실제로 리볼버의 탄환은 손에 닿지 않고 그대로 지나가 버렸다.
흐음.
탄환이 지나쳤다고 해서 죽일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일본으로 오기 직전까지 베다 온 게 망자였다.
내밀어진 손과 망자가 같은 법칙을 적용받진 않겠으나,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벨 수 있었던 건 상대가 망자여서가 아니었다.
닿지 않는 존재였기에 벨 수 있었던 것이다.
저 손모가지도 벨 수 있어.
[척준경 - 악귀참도]
오른손으로 악귀참도의 감촉이 느껴졌다.
여전히 검의 아랫단부터 손잡이까지 흑색 성해포에 둘러싸여 있는 상태였다.
사아아.
성해포 위로 뻗어있는 백색의 날에선 섬뜩한 예기가 흐르고 있었다.
달빛을 받아서인지 유난히 더 시리게 느껴지는 예기였다.
스윽.
고개를 들어 료헤이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당신의 나라가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발버둥치는 겁니까!? 그 쓸데없는 정의로움이 목숨을 잃게 만든 겁니다! 아득한 에너지에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후회하도록 하십시오!
료헤이가 마지막으로 뱉은 말이었다.
하여튼 싸이비 놈들이 말은 더럽게 많아.
고개가 절로 내저어지는 놈이었다.
너무 멀어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그 순간까지 지 할 말만 내뱉고 사라진 료헤이.
떨어지기 직전인 에너지만 아니었다면 당장 따라가 머리채를 잡고 쥐흔들었을 것이다.
쿠르릉… 콰아아아아아아!
온다.
쏟아지기 시작한 에너지에.
꽈악.
악귀참도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쓸데없는 정의로움이라.
입가로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아픈 데를 찌르고 있어, 싸이비쉨이.
구조물을 찾으러 나가기 전, 기지에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했던 생각들.
여기서 난 뭘 하고 싶어하는 건지, 뭘 위해 떠나지 않고 남아있는 건지.
료코에게 유물관 오픈이란 보상을 약속받기 전까지, 난 스스로도 모르겠는 마음에 긴가민가했었다.
난 정의의 용사나 선한 신이 아니다.
그렇기에 모든 죽음을 막을 순 없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모르는 이의 죽음까지 막을 수도, 막아야 할 의무도 없다.
지금까지의,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내 마인드였다.
마인드가 이렇다 보니 지금까진 항상 나를 위한 선택만을 해왔었다.
나의 강함을 위하여.
나의 무기를 위하여.
나의 친구를 위하여.
잊지 말자, 난 정의의 용사가 아니다… 라는 생각을 되뇌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평소 같았으면 내가 손에 넣을 수 없는 무기라는 걸 확인한 순간 떠났어야 했다.
그러지 못했지만… 아니지, 않았지만.
떨어지는 에너지를 마주하고 있어서일까.
이전보다 명확한 자기객관화가 되었다.
안 떠났을 거야.
료코가 보상을 제안하지 않아 내가 얻는 게 없었을지라도.
난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갑자기 인류애 넘치는 정의의 용사로 변신한 건 아니었다.
그저 난 막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재가 되어버릴 150만의 사람을 외면하며 고개를 돌릴 수 있을 정도로.
파앙!
연기를 터뜨리며 날아올랐다.
“차가운 인간이 아니었지.”
콰아아아아아!
눈을 똑바로 뜨기 힘들 정도로 강하고 거대한 에너지.
에너지를 똑바로 응시하며 악귀참도를 뒤로 젖혔다.
“오그라들지만… 오늘 이곳은.”
꽈아아악.
“내가 지킨다.”
스아아아아악!
* * *
얼레.
잠시 후면 떨어지는 에너지와 맞닿을 순간이었다.
이제 악귀참도를 휘둘러야지 하고 있었는데.
떨어지던 에너지를 포함하여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게 멈춰버렸다.
스윽.
휘두르려던 악귀참도를 내려놓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칼데아 윙과 악귀참도 두 개를 사용 중이었지만.
칼데아는 토라소에서 소화를 마치며 채워졌던 게이지가 사라진 상태였다.
나오기 전에 꽉 차긴 했었지.
망자의 세계에 있는 동안 악귀참도만 사용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많은 망자를 베고 카사락의 마법까지 베며 게이지가 충전됐었던 악귀참도.
망자의 세계란 특수한 상황에서 옴팡지게 사용한 덕에 벌써 찼네! 하고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오랜만… 이던가?”
굵으면서도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내게 악귀참도를 건넨 건 물론이고 검까지 알려 준 사람.
“안녕하세요, 스승님.”
꾸벅 고개를 숙이자 척준경이 손사래를 쳤다.
검을 배울 때도 스승이라 부를 때마다 어색하다고 하지 말라던 척준경이었다.
“스승이란 단어는 계속 들어도 적응이 안 되는군. 그나저나 뭘 어떻게 해야.”
가까이 다가온 척준경이 고개를 들었다.
코앞까지 와있는 밝은 에너지 기둥.
척준경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걸 마주하고 있는 거지?”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잠시 생각하다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요.”
시간이 멈춘 채 다시 보니 더 아찔하게 느껴지는 에너지였다.
무려 훗카이도 1/3을 날려버리는 힘.
그 힘 앞에서 난 검 한 자루를 쥐고 맞서려는 중이었다.
스윽.
다시 내게로 눈을 돌린 척준경.
잠시 응시하던 척준경이 입을 열었다.
“원래라면 무모하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만.”
싱긋.
척준경의 입가로 그려지는 묘한 미소.
“예외는 있는 법이니까.”
“하하… 그렇죠.”
예외여야 하지.
암, 그렇고말고.
예외가 아니면 그대로 에너지에 녹아 잿가루 엔딩이었으니.
절대 안 될 말이었다.
스륵.
척준경이 악귀참도의 성해포로 손을 뻗었다.
“자네도 사용해봐서 알겠지만, 악귀참도를 닿지 못하는 걸 베게 해주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어떤 건지는 망자의 세계에서 충분히 알게 되었다.
“성해포가 봉인하는 건 베는 범위… 간단하게는 닿을 수 있는 깊이라네.”
“깊이요…?”
애매모호한 말에 음… 소리를 내며 팔짱을 꼈다.
“악귀참도의 날은 때 묻지 않은 백색이지. 수많은 악귀를 베어 온 날이기도 하고 말이야.”
악귀를 베긴 벴구나.
사실 멋을 위한 이름인가라고 생각했었다.
닿지 않는 걸 베는 것과 악귀참이란 단어가 딱히 매칭되거나 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슥.
성해포에서 손을 올린 척준경이 날을 쓰다듬었다.
“악귀참도도 원래는 일반적인 검과 같았어. 벨 수 있는 것만을 베는 녀석이었지. 하지만 아무리 새하얀 백색이라 해도 수많은 암흑을 베다 보면 물 들기 마련. 진하게 뿌려졌던 악귀의 피가 스며들며 저주가 내려졌지.”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원래부터 이런 무기가 아니었다니.
“그럼 악귀참도의 능력은 저주로 생긴 거란 말씀인가요?”
척준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어야 할 걸 베지 못하게, 베어선 안 될 걸 벨 수 있게. 이것이 수천, 수만의 악귀를 베어낸 악귀참도에 걸린 저주라네.”
베면 안 되는 것까지 베는 힘.
지금까진 못 베는 것도 베게 해주다니! 하면서 신이 났었는데.
말을 조금 바꾸니 무척 위험해 보이는 능력이었다.
“여러 번 겪어 본 상황이라 알겠지만, 이곳을 나가면 악귀참도를 감싸고 있는 성해포가 풀릴 거야.”
“베면 안 되는 것에 뭐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금 아찔하네요. 성해포가 감싸져 있는 게 오히려 마음이 좀 놓이는 거 같기도 하고요.”
“완전히 풀리진 않을 거야. 하지만 더 넓게, 더 깊이 벨 수 있게 된 만큼.”
여기까지 말한 척준경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 뒤로는 말하지 않아도 알지? 라는 얼굴이었다.
위험한 힘이니 조심하라고 말하는 게 맞지만, 알아서 잘할 거라 믿는다는 의미였다.
왠지 악귀참도 성장 시점이 지금인 이유를 알 거 같기도 하고.
무언가를 파괴하기 위해 베어선 안 되는 걸 베는 순간이 아닌.
무언가의 파괴를 막기 위해 베지 못하는 걸 베는 순간.
훗카이도로 떨어지는 에너지를 베는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끄덕끄덕.
악귀참도로 어디까지 벨 수 있나 실험해보거나 하진 말자.
괜한 짓을 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나올 것 같았기에.
꼭 베어야 하는 것만 베자는 굳은 다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봐도 아찔해지는 에너지라 도망치는 게 현명하겠지만.”
시야가 닿는 하늘 전체를 채운 에너지를 보며.
척준경이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도망치기엔 늦은 거 같으니.”
싱긋.
척준경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잡고 있던 성해포를 당겼다.
“무조건 베고 살아남으라고, 1호이자… 마지막 제자여.”
장난스러운 응원을 끝으로.
멈춰있던 것들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 * *
[악귀참도 - 동기화]
콰아아아아아아아!!
엄청난 기세로 떨어지는 에너지에서.
스르륵.
성해포가 풀리고 있는 악귀참도로 시선을 옮겼다.
척준경의 말대로 완전히 풀어지는 건 아니었다.
감싸고 있던 날에서부터 손잡이의 중간까지 풀어진 성해포.
그와 동시에.
꿀렁.
…!
새하얗기만 했던 날로 정반대되는 흑색의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사악한지 느껴지는 기운이었다.
날을 뒤덮기 시작한 흑색의 기운은 백색의 기운과 뒤섞여 악귀참도의 도신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성질이 바뀌었다.
악귀참도의 도신은 더 이상 일반적인 날붙이가 아니었다.
흑과 백이 뒤섞여 일렁이는 기운의 결집체.
길이가 제한되는 날붙이와는 달리 기운이 허락하는 한 어디까지든 뻗어 나갈 수 있는 상태였다.
고오오…!
늘어나고 있는 도신에선 무언가의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악귀.
악귀가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은 없지만, 형상을 보며 본능적으로 떠오른 단어였다.
거대한 입을 쩍 벌리며 탐욕을 나타내는 흑색과.
그런 탐욕을 억누르고자 흑색을 휘감는 백색까지.
오싹하구만.
보기만 해도 사악함이 느껴지는 수천 개의 악귀 형상이 악귀참도를 뒤덮었다.
“후우.”
한 차례 심호흡했다.
자 그럼 악귀 여러분.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소리만으로도 아찔해지는 거대한 에너지를 응시했다.
딱 눈앞에 있는 것만.
꾸드득.
손에 최대한의 힘을 주며 하늘을 채운 에너지를 향해.
베어버립시다.
악귀참도를 휘둘렀다.
스아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