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로즈
많은 인파로 북적이는 런던 도서관 앞.
“백운 님!”
날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는 건 런던의 헌터, 이사벨이었다.
호다닥!
빠르게 달려가 이사벨에게 인사를 건넸다.
“죄송하네요, 바쁘실 텐데.”
아직 공식적인 발표는 없지만, 아마 눈 코 뜰 새 없이 바쁠 게 분명했다.
에밀리아를 포함한 런던 헌터들이 사신이란 존재를 발견한 것부터,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의문사의 원인과 델라르라는 집단의 목적을 알게 되기까지.
이 모든 정보를 알게 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하루였다.
한 번에 주입된 정보가 워낙 많아 상황 정리에 과부하가 걸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난리가 나긴 했어요… 완전히.”
이사벨이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평생 접해본 적 없는 개념의 존재니까요. 위에서도 고민이 많으세요. 이걸 발표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다면 어떻게 내용을 구성해야 할지요.”
“이사벨 님도 계셔야 하는데 저 때문에… 죄송하네요!”
오늘 아침 눈을 뜨기 무섭게, 정확히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뒤.
이쯤이면 실례가 아니겠지 판단되는 시간에 어제 받아둔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었다.
소설 작가인 로즈와 관련하여 이사벨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에요, 아침 6시에 전화가 와서 놀라긴 했지만요! 저보다 에밀리아 님이 얼른 가보라고 하셨어요. 최대한 협조하라고요. 그리고…!”
휙휙.
누가 없나 주변을 두리번거린 이사벨이 몸을 바싹 붙여왔다.
“지금은 밖으로 나와 있는 게 꿀이거든요…! 말씀드렸다시피 헌터청은 아비규환이에요.”
“그… 그렇군요.”
작당모의를 하듯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이사벨.
“그럼 가볼까요?”
이사벨이 웃으며 도서관으로 앞장섰다.
“여기가 런던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거든요. 이곳에 없으면 영국에선 찾을 수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거예요.”
이른 아침부터 전화를 걸어 이사벨을 찾은 이유였다.
작가 로즈가 집필한 책을 더 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가장 오래된 버전부터 차례대로 말이다.
소설을 써내려 갈수록 각색을 거쳤을 거야.
작가가 되본 적은 없으나.
만약 내가 줄리아였고 아이작에 대한 걸 글로 쓴다면.
글쓰기에 익숙해지기 전인 첫 번째 책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가장 적은 각색과 가장 많은 감정을 담아 썼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의외네요. 건네면서도 백운 님이 읽어보실까 싶었는데. 바로 읽으시고 이런 적극적인 모습이라니…!”
“허허… 그… 그렇죠.”
소나타 윈스에서 아이작 뉴턴으로 변하는 이름을 본 순간.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 오우슅!!
혼자 있는 욕실에서 비명을 지른 건 물론이었다.
이사벨이 애너그램이란 걸 알려줬기에 떠올린 거겠으나.
직접 찾아낸 내 눈썰미를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칭찬하고 싶었다.
# 삐빅, 런던 헌터청 소속 4급 헌터 이사벨 루나트. 신원확인 되었습니다.
이사벨이 지문을 찍자 열리는 도서관의 입구.
눈이 닿는 모든 곳이 책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었다.
“으음…! 책 냄새 너무 오랜만이네요.”
이사벨도 도서관에 오는 건 오랜만인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쪽이에요.”
이전에 몇 차례 와봤던 이사벨이 앞장섰다.
- 팬 중에는 로즈 작가가 여러 명이 아닐까 라는 추측도 많아요. 엄청 드문드문 나오긴 하지만, 어쨌든 첫 작품부터 지금까지 몇백 년이나 같은 이름으로 책이 나오고 있거든요. 아니면 로즈란 가문에서 대대손손 이어 내려오며 책을 쓰고 있던가요!
몇백 년이나 책을 내고 있는 작가.
보통이라면 이사벨처럼 생각하는 게 정답이겠지만.
난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고 있었다.
로즈가 줄리아일 거라고 단정 지어놓은 상태에서 떠올린 가능성이었다.
살아있을지도 몰라.
리카르도나 민쿠 같은 다른 종족은 차치하고라도.
척준경과 척사율 같은 케이스가 존재했다.
아이작의 말대로라면 줄리아는 망자의 세계를 다녀갔어.
이미 보통 사람이라면 갈 수 없는 장소에 다녀온 것이었다.
예상할 수 없는 변화가 생기며 시간의 법칙이 바뀌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로즈… 로즈… 로즈! 여기네요.”
책장을 살피던 이사벨이 손을 들어 올렸다.
작품과 작품의 텀이 길어 드문드문 나왔다곤 하지만.
몇백 년에 걸쳐 나와서일까.
적지 않은 수의 책이 꽂혀있었다.
가장 오래된 건.
연도 별로 정리된 책을 훑어나갔다.
책 안에 단서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으나.
나도 모르게 무척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거에요! 로즈 작가가 맨 처음으로 썼다고 알려진 책!”
이사벨이 책을 빼내어 내게 건넸다.
생각보다 훨씬 깔끔한 외관의 책이었다.
“내용 보존을 위해서 양장본으로 다시 낸 책일 거예요.”
설명을 들으며 조심스럽게 책을 펼쳤다.
제발!
어디다 기도하는지는 불분명했으나.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부디 이 책 안에 단서가 있기를!
* * *
웅성웅성.
관광객이 잔뜩 몰려있는 사원을 바라봤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뉴턴과 다윈 같은 과학계 거인들의 묘가 안치된 곳이었다.
- 이제부턴 저 혼자 가볼게요.
책에서 원하는 내용을 찾는 와중에도.
이사벨의 전화는 쉴새 없이 울렸었다.
에밀리아가 날 도와주라고 보내 주긴 했으나.
다른 사람들마저 이사벨을 가만히 놔둔 건 아니었던 것이다.
- 도움이 필요하면 꼭 연락하세요! 꼭 요!
얼굴 한가득 미안할 표정을 지었던 이사벨은.
다시 한번 울리는 전화를 받으며 호다닥 달려갔었다.
스윽.
손에 들고 있는 메모지를 내려다봤다.
이거다 싶었던 내용을 적어 온 것이었다.
제발요!
일단 적어오긴 했으나.
솔직히 이게 단서일 거라고 확신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 매일 아침마다, 매일 밤마다. 그대를 기리고 있는 장소를 바라보며 난 잠에서 깨고, 또 잠에 들어.
아이작 뉴턴과 관련된 장소는 런던 곳곳에 있었지만.
기리고 있는 장소란 문장을 본 순간 떠오른 건 뉴턴의 묘였다.
진짜 아이작 뉴턴은 망자의 세계로 가버렸던 만큼 묘에 누가 있는 건진 모르겠으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저벅.
걸음을 옮기며 웨스트민스터 사원 주변을 둘러봤다.
조졌네.
날씨가 화창해서 그런지 사람이 많은 건 둘째 치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바라볼 수 있는 집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후우.”
머리를 쓸어 넘기며 사원 근처의 집들을 응시했다.
방심했네.
방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인기 많은 작가인 만큼 돈도 많을 테니까.
사원이 가장 잘 보이는 장소에 거대한 저택을 짓고 살지 않을까 란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저건 로즈의 저택이야! 하고 한눈에 발견하는 상상을 한 건 물론이었다.
가서 다 벨 눌러봐야 하나.
부재중이면 어떡하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것뿐이라면 빠르게 벨튀… 아니지, 벨 누르기를 해야 했다.
이거 말고는 딱히 단서라고 볼만한 것도 없었으니까.
“흐읍!”
짜악! 짜악!
두 손을 들어 볼을 후들기며 기합을 넣었다.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가볼…?”
사락.
첫 방문할 건물을 정하고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
옆으로 누군가 스쳐 걸어갔다.
햇빛에 반사되고 있음에도 약간의 갈색조차 띠지 않는.
영국에선 처음으로 보는 새까만 흑발이었다.
또각. 또각.
걸음에 맞춰 약간씩 흔들리고 있는 긴 흑발을 잠시 바라보다.
“로… 아니지.”
로즈라고 나오려는 말을 집어삼키며.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줄리아.”
이름을 부르고.
꼴깍.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삼켜졌다.
줄리아라고 생각되는, 꼭 줄리아였으면 하는 여자는 다음 발자국을 내디디려다 조금씩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스르륵.
여자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하.
약간 거리가 떨어져 있었음에도 선명히 볼 수 있었다.
보자마자 바다를 연상케 하는, 햇빛에 반사되어 아름다운 반짝임을 뽐내고 있는.
선명한 푸른색의 눈동자를 말이다.
* * *
이거 참.
작가의 이름엔 별다른 비밀이 없었다.
줄리아 로즈.
책에 풀네임을 써놓지 않았을 뿐.
작가 이름은 줄리아의 성이었다.
저벅.
천천히 보폭을 맞추며 걸음을 옮겼다.
“정말 놀랐어요.”
차분하면서도 연륜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책을 찾으러 갈 때 예상했던 대로.
줄리아 역시 살아있었다.
척사율과 마찬가지로 각성하지 않아서일까.
시간이 아예 멈춘 건 아니라 중년이 되어있는 줄리아였다.
“그 이름으로 불린 건 정말 오랜만이라서요. 몇백 년… 만이네요.”
말해놓고도 몇백 년이란 말이 이상하게 느껴진 걸까.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줄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백운 님이라고 하셨죠? 어떻게 안 놀랄 수 있는 건가요? 몇백 년을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잖아요.”
“전에 본 적이 있어요. 줄리아 님보다 더 오래 살아온 사람을요.”
줄리아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시 불가능이란 게 없는 세상이네요. 저와 같은 분이 또 있다니.”
스윽.
계속 걸으며 줄리아가 말을 이어갔다.
“백운 님도 정멀 대단하네요. 소나타 윈스에서 아이작 뉴턴을 읽어내고, 제가 써놓은 내용을 토대로 사원을 찾아오시다니.”
“하하… 이리저리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
약간의 정적이 흐르고.
줄리아가 걸음을 멈추었다.
“저….”
말을 꺼내려던 줄리아가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음.
그런 줄리아를 보며 얼굴을 긁적였다.
솔직히 처음부터 느껴지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여러 말을 건네고 있지만, 줄리아가 내게 묻고 싶은 건 따로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작에 대한 거죠?”
“…!!”
망설이던 줄리아가 얼굴을 들었다.
망자의 세계에서 아이작을 만났다고 했음에도.
줄리아는 단 한 번도 아이작에 대해 묻지 않았었다.
정확히는 묻는 걸 망설이고 있었다.
“….”
한 차례 심호흡을 한 줄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이작은… 어땠나요? 혹시….”
꽈악.
다시 한번 손을 움켜쥐는 줄리아에.
기다리지 않고 대답을 건넸다.
“아이작은 후회하지 않았어요.”
“!!!”
“줄리아 님을 다시 돌려보냈던 순간부터, 저를 만나게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고 말했고.”
내게 줄리아에 대해 말하던 아이작을 떠올렸다.
“줄리아 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아이작은 정말 행복해 보였어요. 마지막엔… 줄리아 님을 잊는 것만큼 큰 고통은 없다며, 스스로 망자의 세계에서 사라지는 걸 선택했고요.”
“그랬… 군요.”
그제서야.
왠지 모르게 긴장했던 줄리아의 얼굴로 평온한 미소가 그려졌다.
음.
눈을 감고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듯한 줄리아에.
얼굴을 살며시 옆으로 돌렸다.
정말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였다.
….
그렇게 잠시의 침묵이 지나가고.
마음을 추스른 듯한 줄리아가 고개를 들어 날 응시했다.
“아까 찾고 있는 게 있다고 하셨죠?”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작의 건틀릿이군요.”
“…!”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줄리아가 먼저 건틀릿을 언급했다.
후욱!
건틀릿을 말하는 줄리아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만큼.
실존하는지 안 하는지조차 모른 채로 무작정 찾으러 온 것이었다.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요?”
긴장된 목소리로 질문을 건네자.
“아이작이 망자의 세계로 사라진 이후.”
줄리아가 시원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제가 건틀릿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