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몰래 줍줍
푸우우우욱.
“끄… 끄어어!”
역시나는 역시나였다.
발끝이 닿았을 때부터 전율이 올라왔었는데.
몸 전체를 담그고 나니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휴우우우.”
한바탕 오지게 움직인 후 뜨끈한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있자니, 뭐랄까.
몸에 쌓였던 피로가 한방에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찝찝해 죽을 뻔했네.
피를 한데 모으는 만큼 끝나고 나면 온몸이 피에 절여져 있다는 것.
어디 피웅덩이에서 걸어 나온 듯한 몰골은 잭 더 리퍼 블라드의 유일한 문제점이었다.
괴물을 보는 눈이었지.
드락스를 마지막으로 델라르 놈들을 깔끔하게 정리한 후.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룰루랄라 걸어갔었다.
- 룰루루.
원래라면 노래까지 흥얼거리진 않았을 텐데.
드디어 데모닉을 무기고에 넣었다는 만족감과 안도감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왔었다.
- 룰….
물론 흥얼거림이 오래가진 못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 도착한 순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몰골이 어떤지 말이다.
가관이었지.
입을 벌리고 날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이 떠올랐다.
눈엔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많은 것들이 담겨있었다.
비명 안 지른 게 어디야.
새빨갛게 피를 뒤집어쓴 놈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왔으니.
같은 편이란 걸 알더라도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흠… 흠. 로… 로인 괜찮아?
나의 실책을 판단하고 뻘쭘한 마음에 옆에 있는 로인에게 말을 걸었었다.
- ….
로인은 내 기대에 부응해주지 않았었다.
다른 사람보다 한술 더 떠서 내가 무슨 다른 존재라도 되듯이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던 로인.
그 덕에 괜히 더 뻘쭘해지고 말았다.
뽀득뽀득.
그래도 다행이야.
비누칠을 하며 아까 이사벨에게 전해 들었던 걸 떠올렸다.
전투가 끝나고 런던 헌터청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피해 집계였다.
재산 피해는 아직도 집계 중인 것 같지만, 헌터청은 먼저 인명 피해 결과부터 알려왔었다.
# 사망자: 0명.
델라르의 공격에 부상자가 어느 정도는 있었지만.
모두 심각한 부상은 아니라 금방 회복될 거라고 이사벨은 말했었다.
- 전부 백운 님 덕분이에요!
상황을 정리하느라 이사벨의 몰골도 말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이사벨은 눈을 반짝이며 손을 부여잡았었다.
고생이 많겠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손을 뻗었다.
욕실로 들어오기 전 가지고 온 과자.
과자를 집어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와삭!
입 안으로 달콤쌉싸름한 과자의 맛이 퍼져 나갔다.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마저 맛없었다면 좌절하고 말았을 것이다.
“영국은 음식이 맛없다더니… 진짜였어.”
이사벨이 안내해 준 곳은 런던에서도 가장 크고 비싼 럭셔리 호텔이었다.
그럼에도 입맛에 맞는 음식이 하나도 없다니.
처음 와서 피쉬앤칩스에 데인 후 성공한 음식이라곤 방금 먹은 과자가 유일했다.
“한국 가서 김치찌개에 제육볶음 한 사바리 들이키고 싶다.”
작은 바람을 읊조리며 욕조로 몸을 기댔다.
밀려오는 노곤함에 스르르 잠이 들려는 순간.
“!!”
눈이 번쩍 떠졌다.
뜨끈한 목욕물에 정신이 팔려 잠시 잊고 있었다.
사사삭!
욕조에서 빠져나와 빨래 바구니로 걸음을 옮겼다.
피가 하도 많이 묻어 떡이 되어버린 옷.
쌓여있던 옷을 들어 올리자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 응?
드락스를 주님 곁으로 보낸 뒤 등을 돌리려는 찰나.
달빛에 반사된 무언가의 빛이 눈에 들어왔었다.
- 호다닥.
당장 씻고 침대로 눕고 싶었지만, 반짝이는 것엔 사족을 못 쓰는 나였기에.
빠르게 달려가 반짝이는 물체를 확인했었다.
- 시계…?
바닥에 놓인 건 원형의 회중시계였다.
몹시 오래된 건지 대부분 칠이 벗겨지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새겨진 문양이 뭔가 예사롭지 않은 시계.
시계를 보자마자 촉이 왔었다.
- 주워야 돼.
당장 주워야 한다는 강한 촉이 말이다.
아마도 회귀 전 오랜 유물관 생활에서 온 촉이었을 것이다.
- 호라닥!
촉이 오기 무섭게 허리를 굽혀 시계를 주워 바지춤에 숨기고.
주변을 둘러보며 목격자가 없는지를 확인했었다.
런던 박물관이 산산조각이 난 만큼 소중하게 보관 중이던 물품일 수도 있었기에.
조용히 주워 갈 생각이었다.
뽀득뽀득.
욕조로 가져가 시계에 묻은 흙먼지를 닦아냈다.
아까보다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시계의 문양.
“으음.”
문양을 이리저리 돌려봤으나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십자가를 그려놓은 거 같기도 하고, 원형의 랜스를 그려놓은 거 같기도 했다.
“음?”
시계를 들어 문양을 조명 쪽으로 돌리자.
희미한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 나는 두렵지 않다. 나는 이 일을 위해 태어났으므로.
뭐시여 이게.
새로운 발견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딱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여전히 출처나 사용법 같은 건 감이 오지 않았다.
- 내가 물건을 잘 보긴 하지.
머릿속으로 그리스 골목에서 만났던 감정사, 에밀리가 떠올랐다.
아테네의 목걸이를 보자마자 용도를 파악해냈던 에밀리.
당장 찾아가긴 힘들었으나 보여준다면 무언가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잘 챙겨둬야지.”
톡톡.
몇 시간 전까지는 아니었으나.
이젠 내 것이 된 회중시계를 소중히 어루만졌다.
나중에 근처로 방문할 기회가 생기면 골목으로 가볼 생각이었다.
띠리리리리리---!
시계를 잘 올려놓고 다시 몸을 담그려는 순간.
객실 안에 있는 전화벨 소리가 들려왔다.
이사벨 님인가.
현장이 조금 정리되고 연락이 갈 거라 했었는데.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슥슥.
대충 물기를 닦아내고 욕실을 나섰다.
“여보세요.”
# 백운 님,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셨는데 죄송해요.
수화기를 들자 예상대로 이사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닙니다! 말씀하세요.”
# 다름이 아니라 한국 헌터청에서 연락이 와서요.
흠칫.
훗카이도에서 메시지를 못 본 척 한 탓일까.
딱히 죄지은 것도 아닌데 몸이 움찔거렸다.
“하하… 거기서 왜 연락이 왔을까나. 누구한테 연락이 왔었나요?”
# 기태랑이란 헌터 분이셨어요. 이유는 알 거라고 연락이 왔었다고만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예상했던 이름에 고개를 끄덕였다.
갈 때가 되긴 했어.
아이작을 만나는 게 최우선이었기에 못 본 척 런던으로 오긴 했지만.
하려던 일을 마쳤으니 이젠 부름에 응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가려던 중이기도 했고.
런던으로 향하기 전에 공명했었던 누군가의 투구.
해일이 워낙 거세 어느 바다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으나.
투구 주인의 갑옷을 봤을 때 한반도 근처 바다일 가능성이 컸다.
대산에도 좀 가서 기웃거려 봐야지.
예나 지금이나 유물에 대한 정보가 가장 많은 대산인 만큼.
투구와 관련된 정보가 없는지 한 번 가볼 계획이었다.
“고맙습니다, 이사벨 님!”
# 네! 현장이 정리되면 다시 연락 드릴게요. 푹 쉬세요, 백운 님.
철컥.
고풍스러운 전통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나저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여기에 있는 걸 어떻게 벌써 알았지?
전투가 끝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영국 정부에 의해 방송사도 철저히 통제 중이라 들었는데.
내가 영국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안 걸까.
삑.
혹시나 싶은 마음에 티비를 틀었다.
# 콰가가가가가가!
“….”
티비를 틀자마자 나오는 몇 시간 전의 전투 장면에.
새삼스럽게 잊고 있던 걸 떠올렸다.
“디지털 미디어 시대였지.”
정규 방송은 아니었다.
촬영 또한 개인이 한 건지 아주 먼 거리에서 확대해 찍은 듯 했다.
멀리서 찍었고 어두웠던 만큼 내 얼굴이 나온 건 아니었으나.
날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만한 것들이 많이 찍혀 있었다.
“끌끌.”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서운 세상이여.”
* * *
“백운이지?”
“백운이네.”
“맞네.”
대한민국 중앙헌터청 장관실.
한데 모인 기태랑과 비광, 강태황은 다 함께 티비를 시청하는 중이었다.
흐릿한 화질에선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나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런던 한복판에서 싸우고 있는 게 백운이란 것을 말이다.
“저기서 뭐 하고 있는 걸까.”
“낸들 알겠냐.”
기태랑의 물음에 비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는 사람 중 백운은 단연코 예측불허 의외성 넘버원이었다.
“신출귀몰한 친구네.”
이쯤 되니 강태황도 뭔가 내려놓은 얼굴이었다.
이젠 익숙해지다 못해 질렸다는 듯한 표정.
“런던에 연락은 미리 해뒀어요.”
장관실로 향하기 전 이미 영상을 봤던 기태랑이기에.
백운이 있을 거라 확신되는 런던 헌터청으로 연락을 넣어뒀었다.
“오겠어?”
강태황의 못 미더운 물음에.
“올까?”
“모르지.”
기태랑과 비광이 짧은 질의응답을 주고받으며 동시에 어깨를 으쓱였다.
“자기가 오고 싶어야 오는 놈이니까요.”
기태랑의 대답에 강태황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왕 이렇게 퍼져버렸으니 조만간 정규 방송에서도 뿌려대기 시작하겠구만.”
“그렇겠죠, 저 날개와 비늘로 무기왕이란 것쯤은 금방 추측해 낼 테고요.”
“곧 VIP실에서 전화 오겠구만.”
“힘내십쇼.”
성의없게 강태황을 응원한 비광이.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화면 속에서 백운은 온통 피로 둘러싸인 상태였다.
“대체 저건 뭘까.”
“그러게.”
돌산에서 2년이란 시간을 함께 보낸 만큼.
비광과 기태랑은 백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 한계가 없다는 것.
백운이 강해지는데 한계가 없다는 것 역시 예상하고 있던 바이지만, 뭐랄까.
강해지는 속도가 예상을 뛰어넘다 못해 산산조각 내버릴 정도로 빨랐다.
“너도 처음 보는 거지?”
기태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운이 다른 능력을 선보일 때마다 기태랑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나같이 다 입이 벌어지고 혀를 내두르게 하는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 키하아아아아아아!
희미하지만 광기에 찬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에 있던 피가 모여들어 만들어진 피의 악마.
악마는 아무리 공격당해도 절대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더 맹렬한 공격을 퍼부을 뿐이었다.
“불사신이라도… 되는 건가.”
건너편에 있는 비광이 혼잣말과 함께 난처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그 반응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비광 역시 백운을 보며 기태랑과 같은 걸 느끼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
영상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장관실로 찾아온 정적은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장관실에 있는 세 사람이 영상을 보며 느끼고 있는 건 단순한 놀라움 같은 게 아니었다.
….
경외심, 그리고 본능에 의한 공포.
이 두 가지 감정이.
세 사람으로 하여금 장관실로 무거운 정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