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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왕이 헌터로 회귀했다-258화 (258/473)

258화. 커피

다음날 새벽.

호텔 옥상으로 올라가 기지개를 켰다.

목욕하고 맥주 마시고 고급 침대에서 늘어지게 자서인지 몸은 부쩍 개운해져 있었다.

“흐으읍.”

상쾌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주변을 둘러봤다.

여전히 현장 정리가 한창인지 런던 곳곳은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저벅.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습관인 건지 항상 조용히 나타나는 녀석이었다.

“가려고?”

로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선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니까요. 돌아갈 생각입니다.”

“그 하만인가 하는 사신은?”

싸움이 끝나고 나서 들었었다.

드락스가 죽으며 권능에 당했던 이들이 무사히 깨어났고.

그중엔 과거 델라르의 장로였던 사신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번에 모인 사신들과 함께 새로운 조직을 구성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또 허튼짓하는 거 아니야?”

의심 섞인 물음에 로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오랜 시간 규율을 지켜온 자입니다. 앞으로도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잘 지켜나가겠죠.”

“사람들 목숨은 그대로 거두는 거고?”

이번 질문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날 응시하는 로인.

잠시 후 생각을 마친 건지 로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백운 님은 사신들이 하는 일을 납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정해진 운명을 몇 번이나 뒤집어왔으니까요.”

로인의 말대로였다.

살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목숨을 거두는 것.

내가 느끼는 사신의 역할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백운 님이 규격 외라 가능한 일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지금까지 운명이 변하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백운 님이 연관되었을 때를 제외하고요.”

“으음.”

로인의 말대로 납득이 시원하게 안 되는 건 맞았지만.

그렇다고 사신이 하는 일을 무작정 비난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납득을 떠나 그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일이었고, 상대의 삶을 존중하여 운명의 마지막 순간에 다다라서야 목숨을 거둬왔으니까 말이다.

“너도 그럼 하만이란 사신이랑 같이 가는 거고?”

로인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같이 가자고는 했지만, 거절했습니다.”

스윽.

로인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제겐 더 이상 사신의 힘이 남아있지 않거든요.”

지난번에 로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스에서 내가 운명을 부수는 걸 본 이후 목숨을 거두지 못했었다고 말이다.

어떻게 쓴 거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목숨을 거둬 채우지 않으면 갑주는 물론 무기 사용도 불가능하다 했었는데.

그리스 이후로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로인은 어떻게 갑주를 유지하며 델라르와 싸웠던 걸까.

설마.

“너 델라르와 싸울 땐 어떻게 갑주를 유지한 거야?”

로인의 말을 의심하거나 해서 물은 건 아니었다.

그저 한 가지 우려가 떠올라 물은 것이었다.

“지금까진 제 생명력을 대신 소모해 갑주를 사용해왔습니다.”

“…!”

우려했던 대로였다.

싸움이 지속할수록 부쩍 지치고 힘들어 보였던 로인.

생명력을 소모하느라 그랬던 것이다.

“사신의 힘이야 다시 목숨을 거두면 채워지겠지만….”

“거두지 않을 생각이구나.”

“정확히는 못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만 님을 따라가지 않기로 한 거고요.”

“….”

복잡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자.

로인이 말을 이어갔다.

“그런 눈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백운 님 때문이 아니니까요. 전부 제 선택이었죠.”

끼익.

뒤에서 문이 열리며 아일라가 모습을 나타냈다.

조용히 나타난 아일라를 보고 있자니 뭐랄까.

조금 전 로인을 향해 들었던 걱정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여러 가지 의미를 찾으며 살아가 볼 생각입니다.”

아일라를 바라보고 다시 날 응시하는 로인의 입가로.

…!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해맑은 미소가 그려졌다.

* * *

똑똑.

“네, 나가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잠시 후.

열린 문 사이로 긴 머리를 올려 묶은 줄리아가 얼굴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줄리아 님.”

예의 바르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뜻밖의 방문이어서인지 눈을 크게 뜨는 줄리아.

“좀 이른 아침이죠?”

밝게 웃어 보인 줄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어서 들어오세요.”

“넵!”

옆으로 비켜선 줄리아를 지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오.

들어가자마자 느껴진 건 포근함이었다.

처음 방문하는 집임에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온기와 분위기.

줄리아와 잘 어울리는 집이란 생각이 들었다.

“원하는 건 손에 넣으셨나요?”

뒤따라 오던 줄리아가 호기심 넘치는 얼굴로 물어왔다.

척!

뒤를 돌며 줄리아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완벽하게요! 다 줄리아 님 덕분입니다!”

“별말씀을요.”

오늘도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줄리아는 내게 묻지 않았다.

건틀릿을 손에 넣으려는 이유를 말이다.

아이작의 친구니까…인가.

맑게 웃는 줄리아를 고마운 마음으로 바라보다.

부시럭.

품에서 A4 용지 크기의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건…?”

고개를 갸웃거리는 줄리아에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주입식 교육의 결과물이라고나 할까요.”

“주입식 교육…?”

의아해하는 줄리아를 보며 공명 속에서 행해진 교육의 현장을 떠올렸다.

누군가 보면 부럽다고 입을 틀어막을 만한 광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날 교육했던 건 무려 세기의 과학자 아이작 뉴턴이었으니까.

- 너무 많아.

물론 그곳에서 뭘 배웠냐고 묻는다면.

대답하는 게 쉽지 않았다.

배워온 게 어렵거나 해서는 아니었다.

뭐랄까, 당당하게 말하기엔 약간 무리가 있는 걸 배워왔기 때문이다.

“혹시 커피랑 설탕, 프림 있나요?”

“있긴… 한데요.”

“일단 궁금증은 잠시 넣어두시고 안내 좀…!”

여전히 의문 가득한 줄리아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말씀하신 것들은 여기에 있어요. 제가 타드려도 되는데요.”

“그건 안됩니다!”

강하게 부정하며 잘 정돈된 식탁 한쪽을 가리켰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만들어야 하거든요.”

약속이라.

마지막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며.

포트에 물을 담아 끓였다.

- 집중해, 온도를 놓치면 안 되니까.

스승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끓는 물 위로 쉴 새 없이 손을 왔다리갔다리 했다.

아이작의 방에 온도계 따위는 없었기에.

손바닥의 감각으로 적절한 타이밍을 파악할 수 있게끔 몇 번이고 물을 끓였었다.

- 황금 비율 잊으면 안 돼. 조금이라도 흘리면 큰일 나니까. 넣기 전에 손 떨림 여부를 꼭 확인해.

처음이었다.

다소 맹한 아이작이 그토록 집중해서 무언가를 강조했던 것은 말이다.

호달달달.

손은 떨리지 않았지만, 마음이 떨렸다.

누군가는 고작 커피 끓이기에 무슨 마음까지 떨리냐고 묻겠으나.

그건 모르는 소리였다.

난 지금 몹시 중요한 역할을 수행 중이었다.

몇백 년은 물론 공간을 뛰어넘은 사랑의 커피란 말이야!

아이작의 커피 연구는 심심풀이 땅콩으로 시간이나 죽이자고 한 게 아니었다.

이젠 직접 만날 수 없는 줄리아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어 최선을 다해 준비한 것이었다.

탁!

마지막 프림 한 스푼을 정확한 비율로 집어넣고.

커피에 담긴 스푼을 천천히 휘저었다.

- 훨씬 더 정성스럽게 젓도록 해.

가르침 받은 대로 몹시 정성스럽게 말이다.

완벽해!

스스로가 실전파임을 다시 한번 깨달은 후.

완성된 커피를 들고 줄리아에게 걸어갔다.

스윽.

여전히 내 기행을 의아해하고 있는 줄리아의 앞으로.

커피를 내려놨다.

“세기의 과학자 아이작 뉴턴이 연구한 황금비율 커피에요.”

“…!”

“당연히 줄리아 님을 위해서고요.”

눈이 커진 줄리아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아이작이 전해달라고 했어요. 밤마다 몰래몰래 연구했었는데 이제야 완성됐다고요.”

“푸흡.”

얘기를 듣던 줄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의자에 등을 기대며 허공으로 시선을 옮기는 줄리아.

행복한 추억을 떠올리는지 눈을 감은 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항상 구박했었거든요. 아이작의 커피가 세상에서 제일 맛 없다고요.”

“줄리아 님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맛없었나 보네요.”

“네, 대체 뭘 어떻게 넣은 건지 너무 써서 도무지 삼킬 수가 없었어요.”

눈을 뜬 줄리아가 말을 이어갔다.

“그럴 때마다 아이작은 말했어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너만 먹을 수 있는 최고의 황금 비율 커피를 만들어 줄 테니까 기다리라고요.”

아이작에게도 들었었다.

갑작스레 망자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했었다고 말이다.

“….”

작은 한숨을 내쉰 줄리아가 커피잔으로 손을 뻗었다.

긴장한 건지 동작 하나하나가 몹시 조심스러운 줄리아였다.

꼴깍.

그 동작 하나하나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아이작 뉴턴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커피라니.

그리고 그 상대가 살아 숨 쉬며 직접 커피를 마시려는 중이라니!

“향이 정말 좋네요.”

잔을 들어 잠시 향을 즐긴 줄리아가.

마침내 잔을 입에 대고 천천히 기울였다.

“….”

한 모금 넘긴 줄리아가.

조용히 잔을 내려다봤다.

“정말이지… 지금까지 먹어본 커피 중에.”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줄리아의 입가로.

“최고로 맛있는 커피네요.”

행복한 미소가 그려졌다.

* * *

뚜두둑.

크게 기지개를 켜며 해가 진 하늘을 올려다봤다.

- 내일은 총리님이 직접…!

낮에 만난 에밀리아와 이사벨은 다음날에 있을 여러 가지 스케쥴에 대해 말해줬었다.

하나 같이 영국에서 가장 높은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는데.

런던에서 내가 한 일에 대해 감사를 전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한 세월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사벨과 에밀리아에겐 엄지를 세워 보였으나.

내일까지 런던에 남아있을 생각은 없었다.

해야 할 일도 다 끝났으니까.

싸움이 끝나고도 남아있던 건 어디까지나 아이작이 한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였기에.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만큼 이젠 떠날 때였다.

“달빛 좋고.”

[이카로스 - 칼데아 윙]

“바람 좋고.”

느긋하게 날개를 펄럭이며.

“떠나기 딱 좋은 날씨구먼.”

하늘로 날아올랐다.

* * *

한반도 근처 바다.

꿀렁.

해가 진 새카만 바다에서 무언가 일렁이기를 잠시.

번쩍.

깊은 바닷속에서 붉은색 광채를 뿌리며 거대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

조용히 바다 저 너머를 바라보던 존재가 입을 열었다.

“지키던 이가 사라졌으니.”

꿀렁…! 꿀렁!!

존재의 주변으로 거대한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지워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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