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자료 좀
“으….”
“그, 그만해.”
질렸다는 듯한 기태랑과 비광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러든가 말든가.
부비부비.
1급이라 적힌 명찰을 열심히 볼에 부벼댔다.
1급이라니.
지금까지 넘볼 생각도 못 하고 있던 등급이었다.
“허, 허허…! 이렇게 좋아할 거 얼른 좀 오지 그랬나.”
지금 내 모습이 추하긴 추한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욕해도 항상 호탕하게 웃어줬던 강태황인데.
지금은 애써 나에게서 눈을 돌리며 커피만 홀짝이고 있었다.
“1급 심사 보면서 아주 개고생을 했어야 하는데 아쉽네.”
비광이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흔들자.
듣고 있던 강태황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비광을 바라봤다.
“너도 안 봤잖아. 특채로 바로 1급 된 놈이.”
“….”
눈으로 레이져를 쏘자 비광이 헛기침과 함께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맞다. 혹시….”
말끝을 흐리며 강태황에게 헌터청의 공개 발표에 관해 물었다.
통상 새로운 1급 헌터가 생기면 대대적으로 소개와 홍보를 하는 게 헌터청의 관례였다.
데몬이 판 치는 세상인 만큼 새로운 히어로의 등장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안정감을 주기 마련이었고, 동시에 헌터청의 강대해진 전력을 홍보하는 효과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번엔 특별히 이름은 비공개로 무기왕이 10급에서 1급이 됐다고만 할 거니까.”
“감사합니다!”
강태황에게 감사 인사와 함께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름과 닉네임, 나이, 각성한 능력 등을 발표하는 게 지금까지 해온 헌터청의 발표 내용일 텐데.
내가 가능하다면 무기왕이란 걸 숨기고 싶어한다는 걸 알기에 미리 배려해준 것이었다.
“물론 헌터청에선 자네 이름과 무기왕이란 닉네임이 연동된 만큼 관련된 사람들한테까지 숨기는 건 힘들겠지.”
“그건 괜찮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래 왔으니까요.”
솔직히 헌터청의 비밀 유지 능력에 대해선 조금 놀랐었다.
나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더라도 헌터청의 많은 이가 내가 무기왕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SNS나 언론엔 단 한 번도 유출된 적이 없었다.
무기왕이란 이름이 화제가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쭉 말이다.
헌터청의 보안 수준은 그야말로 훌륭 그 자체였다.
짝짝짝!
여기까지 말을 끝내자 강태황이 커다란 손으로 박수를 쳤다.
“공개 석상에 나서진 않을 테니 여기서라도 손뼉 쳐 줘야겠지. 1급 헌터가 된 걸 축하하네.”
“축하해.”
강태황과 기태랑의 축하에 감사합니다 하며 연신 고개를 숙이는 사이.
“이제 같은 1급이니까 말 편하게 해. 헌터청은 철저한 등급제니까.”
장난스러운 비광의 말이 들려왔다.
그 말을 듣고 있자니 뭐랄까.
굴업리 섬에 도착했을 때 듀린이를 우루루 끌고 온 모랑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실실 웃으며 커피 마시는 비광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어이!”
“푸훕!”
마시던 커피를 뿜어내는 비광과.
순간 정적이 찾아온 장관실.
머쓱.
뒷머리를 긁적이며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농, 농담입니다. 하하…!”
* * *
타고 올라왔던 엘리베이터로 오르며 1층 버튼을 눌렀다.
- 이제 이야기 좀 들어볼까?
비광이 뿜어낸 커피를 치운 후엔 그간의 여정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었다.
런던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으며 영상에 찍혔던 블라드는 어떤 힘인지에 대해서였다.
- 곤란하다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네. 개인적으로 궁금한 거니까.
강태황은 궁금해하면서도 부담 갖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지만, 나도 그다지 숨길 건 없었기에 막힘없이 이야기했었다.
물론 호텔에서 폭식 후 튄 거나 회중시계를 주워온 건 비밀로 했지만 말이다.
궁금해할 만하지.
세 사람은 내게 물으며 인터넷에 화제가 된 동영상을 보여줬었다.
내가 블라드로 신나게 델라르를 썰어 재끼는 영상이었다.
덜덜.
변해서 싸울 때랑 동영상으로 3자의 관점에서 보는 건 몹시 큰 차이가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은 데몬인 줄 알았을 거야.
나 역시 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동영상을 보면서 저게 사람 새끼가 맞나 싶었기 때문이다.
띵동! 1층입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중 1층에 도착했다는 엘리베이터의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옷 안에 고이 넣어뒀던 명찰을 꺼냈다.
# 대한민국 소속 1급 헌터. 백운.
이름 부분을 안 보이게 살짝 가린 후.
스윽.
고개를 돌리자 거만하게 앉아있는 꿀꿀이가 눈에 들어왔다.
위에서 대화를 나누며 살짝 초조했었다.
이 도야지가 날 두고 퇴근했으면 어쩌지란 걱정 때문이었다.
“누가 보고서 이딴 식으로 올리래?! 나 때는 글자마다 간격까지 다 줄자로 체크하면서 했다 이 말이야!”
문이 열리기 무섭게 들려오는 꿀꿀 소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꿀꿀이는 아까 내게 죄송하다 말했던 직원을 상대로 침을 튀겨가며 지겨운 라떼는을 시전하고 있었다.
지가 타 먹을 것 같지도 않지만 믹스 커피가 한가득 담긴 종이컵을 앞에 올려놓고 있는 건 물론이었다.
커피 처먹으러 출근하나.
내가 사두는 건 아니었으나 커피가 몹시 아깝다는 생각을 하며.
꿀꿀이 자리로 다가가 올려져 있는 커피잔으로 손을 뻗었다.
툭.
“나 때는 이딴 건 보고서라고 부르지도 않… 으억!”
꿀꿀이의 전혀 하얗지 않은 와이셔츠로 커피가 끼얹어졌다.
“뭐, 뭐야!”
뜨겁다며 호들갑 떤 꿀꿀이가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고개를 들었다.
당장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기세였다.
“아까 10급! 야 너 미쳤…!?”
어허… 10급?
그거 아니라는 의미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그렇다고 굳이 말을 건네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가소롭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내 목에 걸려있는 명찰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어…?”
10 대신 1이란 숫자를 발견해서일까.
당황하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꿀꿀이에게 입을 열었다.
“나 4급 때는 사무실에서 귓속말로만 소곤거리며 대화했었어.”
4급 해본 적도 없고 10급 전엔 백수였지만, 어쨌든.
톡톡!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어 번 두드려 준 후.
“그러니까 좀 조용히 해. 여기 전세 냈어? 그리고 커피 좀 그만 먹고. 혼자 다 먹겠네.”
마지막 말을 건넨 뒤 몸을 빙글 돌렸다.
“푸훕…!”
“풉!”
주변에서 들려오는 웃음 참는 소리를 뒤로하고.
저벅.
흡족한 미소와 함께 헌터청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1급 최고!
* * *
오랜만에 방문한 기업 대산의 본사 건물.
역시 대기업 클라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적의 기습으로 여기저기 박살이 난 상태였는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리모델링 되어 더 깔끔한 외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삐빅.
경비는 더 삼엄해졌구만.
바깥에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데만 이미 세 번째 신체 스캔 중이었다.
관련된 능력자들이 입구에 포진된 건 물론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대산에 방문해주신 걸 환영합니다. 어떤 업무 때문에 방문하셨나요?”
로비로 들어가 중앙에 있는 카운터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홍보실의 전수희 팀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약속은 따로 안 잡았어요.”
“네 알겠습니다. 홍보실이 워낙 바쁜 부서다 보니 약속을 따로 안 잡으셨으면 오늘 만나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지금 연락해보겠습니다.”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 로비를 둘러봤다.
습격했던 놈들은 잡았으려나.
저번까지도 여전히 조사 중이었다는 걸 보면 상대도 만만치 않은 세력인 모양이었다.
웬만하면 대산의 정보력에 금세 꼬리를 잡히기 마련인데 요리조리 잘 피해 다니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여보세요? 전수희 팀장님?”
“…?”
의아한 얼굴로 전수희를 부르던 직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요. 회선은 문제가 없는데 왜 안 들리지.”
직원이 이상하다며 다시 한번 전화를 걸려는 순간.
우당탕!
잠시 뭔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나 싶더니.
부리나케 달려오는 전수희의 모습이 보였다.
“저, 저기 오시네요.”
당사자의 깜짝 등장에 놀란 직원이 들었던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백운 님!”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드는 전수희를 보고 있자니.
댕, 댕댕이 같아.
갓댕이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수희 님!”
나도 부응해야 할 거 같아 열심히 손을 흔들자.
바로 앞까지 달려온 전수희가 숨을 헐떡이며 미소를 그려 보였다.
여전히 찹쌀떡을 연상케 하는 얼굴과 트레이드 마크인 커다란 동글 안경을 낀 전수희.
“갑자기 오셨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수, 수희 님 무릎이.”
전화를 받고 급하게 달려오다 어디에 갖다 박은 모양이었다.
전수희가 헤헤 웃으며 무릎을 문질러 보였다.
“워낙 튼튼해서 하나도 안 아파요! 이쪽으로 오세요.”
절뚝절뚝.
전화해 준 직원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은 전수희가 쩔뚝이며 날 안쪽으로 안내했다.
“오늘은 어쩐 일이세요? 혹시 회장님을 뵈러 오신 거라면 지금 외부로 출장 중이시라… 어쩌죠.”
“그건 아니에요. 오늘은 그….”
목적을 말하려는 순간 약간 망설여졌다.
회장인 소피아가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오라고 말하긴 했었지만.
다짜고짜 찾아와 자료실 좀 열어달라고 말하려니 너무 염치가 없는 건가 싶어서였다.
“아!”
손가락을 튕긴 전수희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뭔가 필요하신 자료가 있군요!”
“!?”
오랜 사회생활 덕분일까.
단번에 내 목적을 파악한 전수희가 밝게 웃어 보였다.
“정, 정확하십니다.”
“홍보실에도 자료가 꽤 있긴 하지만 다 대외홍보용으로 필터링을 거친 자료거든요.”
삑삑삑.
전수희가 빠르게 들고 왔던 패드를 터치했다.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하실 테니까 탐사 및 발굴 부서로 가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괜찮은 건가.
나완 아는 사람도, 접점도 전혀 없는 부서였다.
아무리 전수희와 최리아라고 해도 타 협력 부서인 만큼 껄끄러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수희 님. 저 때문에 곤란하신 건 아닌가요? 아예 다른 부서 같은데.”
“제가 자료를 보고 싶은 거면 불가능하겠지만요.”
전수희가 하던 걸 멈추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백운 님이 필요로 하시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전 부서 적극 협력하라는 소피아 회장님의 특별 지시가 있었거든요!”
삐빅!
하던 걸 마친 건지 패드를 도로 집어넣으며 전수희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탐사 및 발굴 부서 실장님이 자료실 열어놨다고 바로 올라오시래요!”
홀리…!
“그럼 올라 가시죠! 대산의 VVIP 백운 님!”
늠름하게 앞장 서는 전수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대산에 없을 회장, 소피아.
그저….
끄덕.
빛 그 자체.
멀리 있을 소피아에게 닿지 않을 감사 인사를 올린 후.
“얼른 오세요! 엘리베이터 도착했습니다!”
“넵! 갑니다!”
호다닥 전수희를 따라 탐사 부서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로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