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어두운 바다에선
해가 저물며 노을이 지기 시작한 시간의 항구.
노을을 받아 번쩍이는 은색 정장을 입은 비광이 바다를 바라봤다.
“더럽게 넓네.”
비광이 한숨을 내쉬며 사탕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밤바다 구경이나 하자고 여기서 죽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이 넓은 데서 뭘 하라는 거야.”
강태황에게 연락이 온 건 한창 카지노에서 카드를 치고 있을 때였다.
전화를 받기 무섭게 당장 인천 항구로 가라고 말했었던 강태황.
지금 자기는 그 일 때문에 몹시 바쁘니 설명은 가서 들으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강태황은 전화를 끊었었다.
“그냥 카지노에 죽치고 있는 꼴 보기 싫어서 보낸 거 아니야?”
이미 도착한 지 한 시간이 넘어감에도 마중 나오거나 뭔가를 알려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다시 카지노나 갈까.”
이쯤이면 많이 기다렸다 싶어 몸을 돌리려는 찰나.
띠리리리.
울리는 전화에 비광이 식은땀을 흘렸다.
도청 장치라도 붙여놓은 건지 확인해야 하나 싶은 순간이었다.
“여보쇼.”
# 이 새끼가? 장관 전화를 여보쇼라고 받는 놈은 너밖에 없을 거다.
비광이 별말씀을 하며 어깨를 으쓱 올리는 사이.
강태황이 의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 약속 장소에 잘 나가 있는 거지? 어디 근처 카지노 간 건 아니고?
“무슨 카지노예요. 아니 솔직히 말씀해보세요. 카지노 하는 꼴 보기 싫어서 저 보낸 거죠? 한 시간 넘게 서 있었는데 아무도 안 오는구먼.”
# 뭐? 아무도 안 왔다고?
비광이 한쪽 눈살을 찡그렸다.
왠지 모르게 심각해진 강태황의 목소리에 무언가 있다고 느껴서였다.
‘응?’
강태황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을 때 저 너머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항구로 등장한 한 대의 배엔 해양 경찰 마크가 그려져 있었다.
“바로 출발한다! 빨리 준비해!”
저벅.
비광이 다급하게 출발 준비 중인 경찰에게 걸어갔다.
뭔진 몰라도 자기가 한 시간 넘게 바다 구경하게 된 것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국가직 소속 헌터 비광인데요.”
“!!!”
바쁘게 움직이던 경찰들이 동작을 멈추며 비광을 바라봤다.
헌터청은 독립된 기관인 만큼 경례가 필요하거나 한 건 아니었으나.
한국에서 워낙 유명한 비광이기에 모두가 알아본 것이었다.
“바쁘신데 죄송하지만. 무슨 일인지 좀 알 수 있을까요?”
경찰 중 가장 높은 계급을 가진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팍에 신명우라는 명찰을 단 남자였다.
“저희한테 긴급 구조 신호가 들어왔습니다.”
“경찰이었나요?”
“아닙니다. 지금 나가 있는 대원은 없습니다. 단지 신호 코드는 정부 기관에서 사용하는 공용 코드였습니다.”
신명우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듯 손을 올린 비광이.
무언가 바쁘게 알아보고 있는 듯한 강태항에게 물었다.
“장관님. 원래 제가 만났어야 하는 게 헌터청 소속 배인가요?”
# 어! 맞아!
“알겠습니다. 제가 조금 있다 다시 연락 드릴게요.”
전화를 끊은 비광이 기다리고 있는 신명우를 바라봤다.
“저도 같이 좀 갈 수 있을까요?”
* * *
잠을 설쳐 시뻘게진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봤다.
어젯밤 쿄스케한테 전화를 건 후 이것저것 찾아보느라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었다.
안 되겠다 싶어 한숨 자려는 순간 쿄스케가 자료를 보내왔었고 말이다.
보통 놈들이 아니었구만.
최라아가 건넨 자료에서 본 사이조란 이름을 쿄스케에게 알려줬었다.
가능한 한도 내에서 알아봐 달라는 부탁과 함께였다.
- 이야 사이조라니.
전화를 받은 쿄스케는 잘 알고 있는 이름이라는 듯한 반응을 보였었다.
그리고 지금 보내온 자료를 보니 그런 반응을 보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야쿠자인데 워낙 세력이 넓어 정재계까지 손이 뻗어 있다라. 말세구만 말세야.
단순히 돈이 많아 유물 수집을 취미로 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끈끈한 커넥션이 있는 건지 일본 정부는 사이조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고 있었다.
대산에서 괜히 막힌 게 아니었구만.
정재계가 한통속으로 도와주며 보호해주고 있으니.
사이조가 일본 안에 있는 한 쉽게 건드는 게 힘든 건 당연했다.
- 히메지 소속 모리타 쿄스케로서는 들어주면 안 되는 부탁이지만, 개인적인 왕만두 친구로서라면 가능합니다.
장난으로 건넨 말인 줄 알았는데.
영향력을 보니 아무리 쿄스케라도 뒤를 캐내기 부담스러운 대상이었다.
그런 것치곤 하루 만에 호다닥 조사해 자료까지 만들어 보내줬지만 말이다.
왕만두 친구 최고…!
자료엔 사이조의 조직과 각 주요 간부의 이력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게 있다면 이력 중엔 유물이나 역사 관련된 게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 이력이 없다고 아무것도 안 한 거라 단정 지을 순 없어요. 가장 숨기고 싶은 부분이라 작정하고 감춘 걸 수도 있으니까요.
이에 대한 쿄스케의 표현이었다.
폭행, 공갈, 협박 등 오히려 잘 알려진 흉악한 이력이 위장용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음…! 훌륭하군.”
자료의 맨 아래를 보며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알아낸 건지 사이조 지부들이 위치한 장소와 현재 그곳에 머무르고 있을 간부 명단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이거면 충분하지.
각 위치를 확인하고 옆에 올려놓은 지도로 동선을 그렸다.
들를 곳이 많은 만큼 부지런하면서도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오케이.”
품 안으로 지도를 챙겨 넣고.
드르륵!
힘차게 베란다 문을 열어젖혔다.
자료를 보는 동안 어둠이 내리깔린 하늘.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
“쌍룡이 찾으러 가볼까.”
베란다 아래로 몸을 날렸다.
[이카로스 - 칼데아 윙]
* * *
백운이 일본을 향해 날아간 시각.
해양 경찰을 따라 바다로 나선 비광이 주위를 둘러봤다.
이리저리 라이트를 비추고 있긴 하나 아직까지 이렇다 할 만한 건 보이지 않았다.
‘실종이라.’
배를 타고 나오는 길에 비광은 인천 앞바다의 상황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아무 사고 없던 바다에서 언젠가부터 소리소문없이 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단순히 중국으로 향하는 밀항선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라진 주변 사람의 신고도 딱히 없었거든요.”
비광의 옆으로 다가온 신명우가 설명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이 사건이 물 위로 제대로 올라온 계기가 있었으니.
인천 바다를 거쳐 한국으로 오던 무역선이 통째로 없어진 것이었다.
“해양 경찰에서도 비상이 걸려 당시 가용한 수색정 세 척을 보냈었습니다.”
“발견된 게 있었나요?”
비광이 묻자 신명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수색을 나간 날 밤… 수색정도 연락이 끊겼습니다.”
“…!”
“이쯤 되니 뭔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헌터청에 지원 요청을 드렸었고요. 얼마 지나지 않아 헌터청에서 온 인력이 수색할 테니 대기하란 이야기를 들었었고. 무언가 소식이 들리길 기다리던 중에 구조 신호를 받은 겁니다.”
비광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도 지금 신명우가 말하고 있는 헌터청 인력이 오늘 자신과 만났어야 하는 헌터들 같았다.
‘뭔가 발견했구나.’
공식적으론 경찰을 지원 나온 거지만 명백한 타 기관이었기에.
인원들은 수색 중 발견한 걸 곧장 헌터청에 보고했을 테고, 그게 강태황까지 올라가 비광이 오게 된 것일 터였다.
항구에서 만났어야 하는 인원들은 구조 신호를 보내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리며 곤란에 빠진 듯하고 말이다.
톡… 톡.
배 난간을 두드리며 비광이 혀를 찼다.
헌터들이 이 바다에서 찾은 게 뭔지는 당장 알 길이 없지만.
그게 뭐가 됐든 현장에 있던 이들은 물론 장관 강태황까지 1급 헌터가 필요하다고 여겼다는 이야기였다.
‘음?’
정면을 바라보던 비광이 난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무언가 하얀색 물체가 바다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라이트 좀 저쪽으로 비출 수 있을까요?”
고개를 끄덕인 신명우가 배의 라이트 쪽을 바라봤다.
“진우야! 라이트 배 정면으로!”
신명우의 외침이 들리고 잠시 후.
“…?”
약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움직이지 않는 라이트에 비광이 고개를 돌렸다.
아무 대답이 들려오지 않은 건 물론이었다.
‘뭐야.’
비광이 난간에서 몸을 떼며 배를 살폈다.
많은 인원이 탄 건 아니더라도 배 안이 너무 고요했다.
“비광 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곧장 큰 걸음을 떼는 신명우에 비광이 손을 뻗었다.
“잠깐 가만히…!!”
촤아아아악!
비광이 신명우의 옷을 잡으려는 찰나.
바다에서 뻗어진 투명한 촉수가 신명우의 얼굴을 휘감았다.
“일월과…!?”
콰아아아!
촉수를 끊으려는 사이 이번엔 비광이 있는 쪽에서 거대한 빨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콰직!
휘둘러진 빨판을 피하는 사이 촉수에 끌려 바다로 사라진 신명우에.
비광이 망설임 없이 바다로 몸을 날렸다.
‘해파리…?’
들어가마자 보이는 녀석에 비광이 눈살을 찌푸렸다.
정확히는 해파리를 닮은 데몬이었다.
흉측한 이빨과 수백 개에 달하는 촉수를 가진 녀석이었다.
스르르….
‘쯧.’
데몬의 이빨 근처에서 피어오르는 핏물에 비광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누군가를 씹어 삼킨 듯한 모양새였다.
스륵.
비광이 뽑아낸 패 한 장을 신명우가 잡힌 촉수로 던진 후.
서걱!
잘린 촉수에서 튕겨 나온 신명우를 낚아챘다.
쑤우우우우욱!
등 뒤에서 거대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조금 전 비광을 덮쳤던 빨판이었다.
‘10월의 단풍.’
콰앙!
등 뒤로 생겨난 단풍이 빨판을 막아내자.
‘일단.’
비광이 곧장 정신 잃은 신명우를 데리고 배 위로 올라갔다.
싸울 땐 싸우더라도 신명우는 내려놔야 했다.
“푸하!”
올라가 급한대로 신명우를 배 안에 던져놓는 비광.
라이트가 있는 배 가장 위로 올라간 비광이 조금씩 불룩해지는 검은 밤바다를 돌아봤다.
‘두어 마리는 아니고.’
촉수와 빨판은 맛보기인 모양이었다.
배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솟아오르기 시작한 엄청난 크기의 데몬들.
대충 세봐도 스물은 넘어 보이는 숫자였다.
‘해산물 모둠도 아니고 어디서 이딴 게 우루루 튀어나온 거야.’
한 마리 한 마리가 일반 데몬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대한 덩치와 흉측한 생김새에 맞게 최소 A급은 되어 보이는 녀석들이었다.
아마 사라진 배들의 원흉일 것 같았다.
“키키킥! 또 먹이가 제 발로 온 건가!”
“허?”
또박또박 들리는 언어에 비광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말을 하는 데몬은 지난번 마룬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저놈이 대장인가.’
나타난 놈들 중 가장 거대한 몸집을 가진 데몬이었다.
대형 문어의 모습을 띠면서도 묘하게 사람 체형을 가져 기괴함이 느껴지는 생김새.
“너 사라진 배랑 사람들 어떻게 했냐?”
질문을 알아들은 건지 한 번 더 웃음을 흘린 데몬이 입을 열었다.
“맛있었지. 너무 너무 오랜만에 먹는 인간이었거든! 아! 물론 너도 곧 먹어치울 생각이다!”
황홀한 듯 울부짖는 문어에 비광이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라도 살아있는 사람이 있을까 물은 거였는데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겁 먹을 필욘 없다! 최대한 안 아프게 먹어….”
“야 해산물들.”
“…?”
전혀 겁먹지 않은 듯한 혼잣말에.
약간 당황한 문어가 말을 멈춘 채 비광을 쳐다봤다.
촤라락…!
“!?”
오묘한 빛을 띠며 비광 주위로 떠오르는 수십 장의 화투패.
배를 둘러싼 데몬들에게 비광의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 뒤질 준비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