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하회탈
구름 사이로 비행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아래로 일본 땅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빨리 재방문하게 될 줄은.
훗카이도를 떠날 때까지만 해도 한참이나 있다가 다시 오겠지 했었는데.
가만히 있어도 계속 와야 하는 일이 생겨나고 있었다.
타국 최다 방문 중이니 이것도 인연이면 인연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악연인가.
어깨를 으쓱이며 바닷가 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지금 내려가고 있는 곳은 오키나와의 해안가였다.
방문하고자 했던 사이조의 지부 중 하나가 여기에 있었다.
- 한국이랑 가장 붙어있는 오키나와인 만큼 무언가를 주고받았다면 거기일 가능성이 높아요.
쿄스케의 말을 들으며 오키나와 지부로 가장 먼저 가야지 라고 가닥을 잡았었다.
정말 유물을 사이에 두고 사이조와 해신이 비밀리에 거래를 벌여왔다면.
보안이 빡빡한 하늘길보단 바닷길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더 높을 듯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로 오고 다니기 편한 오키나와 지부에 작은 거래의 흔적이라도 있을 것이었고 말이다.
저거구만.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상태에서 비행을 멈추고 아래를 살폈다.
여러 건물의 지붕엔 희미한 조명으로 커다란 귀신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쿄스케가 보내 준 자료에서 봤던 조직 사이조를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대놓고 있어도 되는 건가.
역시 보통 놈들이 아니구나 싶었다.
크고 예민한 사업은 죄다 숨겨놨다 할지라도 기본이 폭행에 공갈 협박 등 온갖 범죄를 일삼는 놈들이었다.
꼭꼭 숨어 있어도 모자를 판에 지붕에 문양까지 박아가며 대놓고 나 여기 있소 하고 있으니.
겁대가리를 상실했거나 진짜 든든한 빽이 있어 자신이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았다.
아니면 둘 다이거나.
사락.
일단은 건물 밖에 내려앉으며 환하게 밝혀진 입구를 응시했다.
시원하게 문양을 넣어놨던 것처럼 입구 역시 나 야쿠자요! 하는 우락부락한 덩치들이 잔뜩 모여있었다.
“쯔쯔즛! 나라가 아주 잘 돌아가는구만.”
걱정되지도 않는 남의 나라 흉을 보며 느긋하게 건물 주위를 살폈다.
처음엔 냅다 들어가서 다 뒤엎어 난장판을 만들고 멱살을 잡아볼까 했었지만,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난 1급 헌터니까!
괜한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뭐가 있을지 확실치도 않은데 괜한 신분 발각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증거 인멸하자고 나한테 뭘 한 것도 아닌 사이조를 무작정 다 베어 넘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도윤 - 비전 수리검]
먼저 수리검을 꺼내 그늘지고 어두운 곳에 조용히 내려놨다.
안에 어떤 놈이 있을지 모르니 미리 대비해 둘 생각이었다.
그때 가서 내가 무기왕이란 티를 팍팍 내며 무기를 휘두르지 않기 위해서였다.
“….”
덩그러니 놓인 수리검을 잠시 바라보다.
“미, 미안해 도윤!”
호다닥 고개를 숙여 사과를 건넸다.
도윤이 뭐라고 한 적은 없지만 좀 너무하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먼 나라 런던 화장실 변기부터 옆 나라 그늘진 수풀까지.
망자의 세계에서 구출하자마자 너무 막 굴리고 있는 것 같았다.
[잭 더 리퍼 - 면도칼]
꺼내든 면도칼을 내려다봤다.
수리검의 주인이 잭이었으면 훨씬 마음 편하게, 아무런 죄책감 없이 이리저리 굴렸을 텐데.
꽈악.
지금 목적은 사이조 섬멸이 아닌 쌍룡궁 찾기임을 인지하며.
면도칼을 거꾸로 잡은 채 입구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신나게 두들기기만 할 생각이었다.
내가 묻는 말에 만족스러운 대답이 나올 때까지 말이다.
스윽.
마지막으로 집에서 가져왔던 탈로 얼굴을 가리며.
사이조 침투 준비를 끝마쳤다.
* * *
사이조의 오키나와 지부.
“흐아암!”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호 실장 토모다가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켰다.
거대한 덩치에 온몸이 털로 뒤덮인 토모다는 보는 것만으로도 곰을 연상케 하는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미치겠구만.’
토모다가 어깨를 벅벅 긁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매일 같이 평화로운 하루가 지속되다 보니 온몸에 좀이 쑤셔 미쳐버릴 것 같았다.
“형님. 오늘도 지루해 미치겠는 하루네요.”
지루해하는 건 토모다 뿐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함께 대기 중인 요즈도 틈이 날 때마다 어깨와 목을 이리저리 돌려대고 있었다.
“형님이라니 이 새끼가! 실장님이지.”
핀잔을 주면서도 토모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평화가 싫은 건 아니지만 오늘같이 지루한 날엔 하루가 멀다고 치고받던 과거가 그립기도 했다.
“어디 정신 나간 놈 하나 없나. 먼지나게 두들겨 패주게.”
“그러게요. 지금 지루한 만큼 제대로 아작을 내줄 수 있을 거 같은데.”
토모다와 요즈가 주먹을 뚜둑거리며 슉슉 휘둘러 보았다.
말하면서도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과거엔 고만고만해 치고받았던 상대 조직도 이젠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커버린 사이조에 덤벼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머리에 총 맞지 않은 이상 없겠… 응?”
한숨을 내쉬던 토모다가 눈을 찡그리며 몸을 내밀었다.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모를 인간이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혼잔데요.”
요즈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다가오고 있는 건 딱 한 명.
집에서 자다 나온 건지 헐렁한 홈웨어를 대충 걸치고 있는 남자였다.
“저거 지금 뭘 쓰고 있는 거야.”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게 있었으니.
얼굴에 쓰고 있는 가면이었다.
모양새로 보아 한국 민속놀이 때 자주 쓰는 하회탈 같았다.
“무슨 병 있는 거 아닐까요? 자다 나온 듯한데.”
“뭐 잘됐네.”
어느새 가까워진 하회탈에.
“다들 기다리고 있어. 요즈랑 갔다 올 테니까.”
토모다와 요즈가 주먹을 풀며 앞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 * *
곰인가.
두 명의 덩치가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유독 커다랬다.
건물 한복판이 아니었다면 동물원에 온 건가 착각이 들 정도.
“안녕하세요.”
가까워진 덩치에 일단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다가온 곰은 깔끔한 정장 차림에 토모다 라고 적힌 명찰을 달고 있었다.
복장이 말끔한 만큼 먼저 대화로 풀어봐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이….
“너 뭐야 이 새끼야.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 몰라?”
불가능이란 걸 깨닫게 해주는 반응에 잠시 품었던 희망을 곱게 접어 넣었다.
전 세계 깡패는 한자리에 모여 교육이라도 받은 건지 어딜 가나 이 모양이었다.
“하아.”
“한숨? 이 새끼 보게.”
말을 무시하며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야츠모토 안에 있어?”
“!?”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눈에 띄게 놀란 토모다가 동공지진을 일으켰다.
적인지, 아니면 깍듯하게 모셔야 하는 손님인지 많은 번뇌가 느껴지는 눈이었다.
“다, 당신 누군데?”
살짝 쭈그러든 목소리에 조금 전 포기했던 평화 해결의 불씨가 되살아났다.
입만 사부작 잘 털면 안쪽까지는 무혈입성이 가능할 것 같았다.
다시 한번 대화해보자는 생각에 고개를 들어 토모다를 바라보는 순간.
“당신 누구냐고!!”
털이 수북한 곰 면상이 내 얼굴 바로 앞까지 불쑥 들이밀어 졌다.
쩌어엉!!
깜짝 놀라기 무섭게 귀로 들려오는 커다란 타격음.
“아.”
나도 모르게 질러 버린 주먹에 작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털곰처럼 생긴 면상이 나쁘다고 말하고 싶진 않았으나, 내 반사 방어를 발동시키기엔 충분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쿠웅!!
어느새 입구까지 날아가 축 늘어져 버린 토모다를 바라봤다.
“뭐야!!”
덤으로 부딪힌 문이 박살나며 지부에 큰 소란이 난 건 물론이었다.
곰 자식 때문에!
인상을 팍 쓰며 혀를 찼다.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싶어 순순히 대답하려던 찰나였는데 고새를 못 참고 날 위협하다니.
동굴에서 100일 동안 쑥과 마늘만 먹고 견뎌 사람이 된 한국의 곰과는 달리 일본 곰의 참을성은 아주 형편없었다.
“어…?”
토모다와 같이 왔던 덩치가 벙찐 얼굴로 입구 쪽과 날 번갈아 살폈다.
지금 일어난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해하려고 하지 마.”
쩌억!
더 이상 고민하지 않도록 뒤통수를 갈겨 재워 준 후.
“습격이다!!”
“저 하회탈 새끼 잡아!!”
입구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이조 조직원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입구를 통과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후우!”
더 이상 안 나오는 덩치들에 한숨을 내쉬며 옷을 털어냈다.
개미집이야 뭐야.
한 발자국 내디딜라치면 쉴 새 없이 튀어나오는 덩치들에 예상보다 도착 시간이 지연되고 말았다.
“너 뭐냐.”
묵직하게 들려오는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지부 건물의 가장 깊숙한 방.
스윽.
들고 있던 종이를 들어 다다미에서 가오 잡고 있는 남자의 얼굴과 대조해보았다.
고 사이에 운동을 좀 한 건지 사진보단 덩치가 커지긴 했으나.
내가 찾고자 했던 야츠모토가 확실했다.
“찾고 싶은 물건이 있어서 왔거든.”
“허어? 여기가 무슨 흥신소 같은 덴 줄 아는 거냐?”
야츠모토의 거들먹거림은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내가 쌍룡궁이란 유물을 찾고 있거든. 혹시 아는 거 있어? 해신이라고 한국 기업이랑 연관이 있을 거야.”
“!!”
순박하다고 해야 할까.
허술하다고 해야 할까.
입구에서 만난 토모다도 그렇고 사이조 놈들은 좀처럼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가 그걸 꼭 좀 찾아야 하거든. 그러니까 협조 좀 해줘.”
뒤에 널브러진 수백의 조직원을 가리켰다.
저렇게 되고 싶지 않으면 쉽게 쉽게 가자는 의미에서였다.
“하하… 하하하하하하하!!”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 야츠모토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하…!”
그렇게 잠깐 웃다 웃음을 그친 야츠모토가 몸을 일으켜 내게 다가왔다.
“네가 상황파악이 잘 안되는 모양인데. 뒤에 있는 놈들과 대 사이조의 간부인 난 태생부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척.
바로 앞까지 다가온 야츠모토가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난 사무라이다. 설령 죽음이 턱밑까지 드리워진다 해도 조직을 배신하는 짓 따윈 하지 않지. 만에 하나 네가 날 이겨도 내가 뭔가를 말하는 건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말 더럽게 많네.
드드드…!
언제까지 들어줘야 하나 하는 사이 야츠모토가 커다란 주먹을 뒤로 젖혔다.
“넌 여기서 아무것도 가져나가지 못할 거다. 심지어 들어올 때 가지고 온 그 알량한 목숨조차도 말이다!”
휘이이익!
눈앞으로 날아드는 주먹과 의기양양한 야츠모토의 얼굴을 응시했다.
건물에서 상황 파악이 제일 안 되는 듯한 야츠모토.
그런 야츠모토를 위해.
“하아아아!”
꼬옥 말아 쥔 주먹으로 입김을 한차례 분 뒤.
“죽을 거 같으면 말해.”
잘 달궈진 주먹감자를 야츠모토 얼굴로 뻗어냈다.
“그만 때릴게.”
쩌어어어엉! 퍽퍽퍽!
….
두들기기 시작하고 5분 정도가 지난 것 같았다.
희미해진 정신을 간신히 유지하며 주저앉는 야츠모토.
처음에도 험했는데 집중적으로 두들긴 탓인지 야츠모토의 얼굴은 한층 더 흉악해져 있었다.
스, 스윽.
조금 전 죽을 거 같다고 외치며 날 멈춰 세운 엄근진 사무라이 야츠모토가 고개를 들었다.
“저, 전부 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