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길은 스스로
비광과 데몬들 간의 전투가 벌어진 인천 앞바다.
“허억!”
잃었던 정신을 되찾으며 신명우가 몸을 일으켰다.
“콜록!”
물을 먹은 탓인지 거칠게 기침한 신명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라이트 담당의 대답이 없어 직접 올라가 보려던 참이었었다.
무언가가 얼굴을 감싸는가 싶더니 바다로 끌려들어 가며 기억이 사라졌었고 말이다.
저벅.
간신히 발을 뗀 신명우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닷속에 있어야 하는 자신이 어떻게 배 내부에 올라와 있는지 의문이었다.
“…!”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펼쳐진 광경에 신명우가 입을 벌렸다.
배 주변 바다는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피의 주인으로 보이는 거대한 데몬 사체가 둥둥 떠 있는 건 물론이었다.
스윽.
위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신명우가 고개를 들었다.
배의 가장 위쪽 라이트.
라이트에 걸터앉은 비광이 밖으로 나온 신명우를 보고 몸을 일으킨 것이었다.
“일어났어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묻는 비광에 신명우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몹시 덤덤한 목소리와는 별개로 비광의 은색 정장은 다량의 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비, 비광 님!”
걱정 가득한 신명우에 비광이 손을 휘휘 내저어 보였다.
“내 피는 한 방울도 없어요.”
신명우가 놀란 눈으로 다시 한번 바다를 살폈다.
대충 봐도 엄청난 수인 건 물론 하나같이 강력해 보이는 데몬들 뿐이었다.
바다에 떠 있는 게 저 정도지 비광이 직접 마주한 건 훨씬 많을 수일 터.
그걸 혼자서 다 처치하며 조금의 상처도 없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 데몬들은 다 어디서 온 걸까요…?”
“글쎄요.”
비광이 눈을 찡그리며 바다를 돌아봤다.
‘어디서 나온 놈들일까.’
처음엔 다른 국가 해역에서 넘어온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닌 듯했다.
해역 사이엔 영역 침범을 대비한 각종 경보 시스템과 군 함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 정도 되는 데몬이 우루루 경계를 넘었는데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해역 경계와 현재 비광이 위치한 바다 사이.
즉 한국의 해역 내부 어디에선가 갑자기 튀어나왔다는 소리였다.
“명우 님. 항구로 돌아가시죠.”
“잠시…!?”
자기 동료를 찾는 듯한 신명우에 비광이 고개를 흔들어 보이자.
슬픈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던 신명우가 조종실로 걸음을 옮겼다.
“하아.”
비광이 한숨과 함께 바닷물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직 뭐가 뭔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한반도 바다에서.’
비광의 시선이 어두컴컴한 바다 한가운데를 응시했다.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
* * *
오키나와를 떠나 도착한 사이조의 요코하마 지부.
뭐지.
지금쯤이면 깨어났을 야츠모토의 전화를 받고 우루루 대기 중일 거로 생각했었다.
막상 도착하니 우루루는 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이 고요했지만 말이다.
단체소풍이라도 갔나.
아까와 마찬가지로 하회탈 세팅을 완료한 후 지부로 걸음을 옮겼다.
음.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부분은 사람이 없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무슨 대청소라도 하는 것마냥 지부의 정문이 시원하게 열려있었다.
마치 올 걸 알고 있었으니 어서 들어오라는 것 같았다.
저벅.
뭐가 됐든 초대를 받은 것 같으니 멈추지 않고 안으로 쭉쭉 들어갔다.
두어 대는 덜 때려야겠다.
들어온 내가 어두울세라 불까지 다 켜두고 나가는 친절함까지.
요코하마가 도시적으로 오키나와보다 친절한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함정 같은 것도 없고.
큼직큼직하게 걸었더니 어느새 건물 내부였다.
금방 빠져나간 건지 약간의 온기가 남아있는 건물.
사용하던 것들로 보이는 물품들도 전혀 정리되지 않은 채 테이블 위에 그대로 올려져 있었다.
드르륵.
뭔가 열어보고 싶게 생긴 미닫이를 열어젖히자.
한쪽을 가득 채우는 설계 도면이 나타났다.
산을 나타내는 듯한 삼각형 안에 그려진 사각형 형태의 건축물이었다.
“시발…?”
도면을 살피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대충 봐도 야츠모토가 말했던 금고를 나타내는 듯한 도면.
도면을 보니 산 어디에 금고가 위치한 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위치가 무척 놀라웠다.
어디 외진 곳에 동굴이라도 판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먼.
금고가 산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았다.
산 내부를 완전히 깎아내고 거대한 사각형 금고를 채워 넣은 형태였다.
금고는 대충 봐도 웬만해선 안 뽀개지는 특수한 소재 같았고 말이다.
“친절하게 입구도 표시되어 있네.”
무슨 생각이지 이 새끼들.
지나친 친절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대체 뭘 준비해놨길래 이리 자신감 넘치는 행동을 하는 걸까.
무조건 잡을 수 있다는 건가.
어디서 기다리고 있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큼지막하게 표시된 금고의 입구.
산 한쪽을 무너뜨리지 않는 이상 금고에 닿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대충 봐도 동굴 형태로 되어 있어 매복하기도 쉬울 것 같았다.
뭐.
도면을 보다 어깨를 한 번 으쓱인 후.
오라면 가야지. 어쩌겠어.
들어왔던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 * *
요코하마 산속 금고.
“하!”
금고 중앙에 선 중년의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넘겨진 회색 머리와 눈동자.
보는 것만으로도 탁함과 차가움이 느껴지는 생김새의 남자였다.
“카진 님. 저놈을 활개 치게 놔둬도 괜찮을까요? 이대로 자료만 들고 튀기라도 한다면…!”
“걱정하지 마라, 미유.”
부하를 안심시키며 사이조의 회장 카진이 앞에 놓인 모니터를 응시했다.
본부 여기저기를 들쑤신 후 마지막엔 CCTV를 향해 손까지 흔들어 보이고 사라진 하회탈.
정체는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만난 미친놈이란 생각에 카진이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오키나와 지부를 혼자 쳐들어간 놈이다. 중간에 쫄아서 도망갈 놈이었다면 애초에 그러지도 않았을 거야.”
- 카진 님! 야츠모토입니다!
야츠모토의 전화를 받으면서도 카진은 크게 놀라진 않았었다.
어쩐 일인지 어제부터 사이조의 뒤를 캤었던 히메지 성.
늦든 빠르든 무언가 꾸미고 있을 거란 예상은 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상치 못하게 빠르고, 말도 안 되게 무식한 방법으로 쳐들어올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같잖은 성 하나 가지고 무게 잡는 게 항상 눈에 거슬렸었는데.’
카진은 쳐들어오는 하회탈을 쉽게 죽일 생각이 없었다.
팔다리가 잘렸든, 목 반쪽이 덜렁거리든, 어떻게든 생포해서 모든 정보를 불게 할 셈이었다.
마지막엔 눈 뜨고 못 볼 정도로 처참하게 만들어 히메지 성으로 보내는 것도 잊지 않을 생각이었다.
저벅.
자리에서 일어난 카진이 천천히 금고를 거닐었다.
투명한 강화 유리 아래로 가지런히 전시된 조선의 유물들.
금고라기보단 하나의 거대한 전시장을 연상케 하는 장소였다.
‘황홀하군.’
이순신과 관련된 유물은 바닥에서도 정중앙에 위치해 있었는데.
카진은 금고에 머무르며 몇 시간이고 이 위를 왔다갔다하는 걸 정말 좋아했다.
마치 일본 선조들도 어쩌지 못했던 이순신과 조선을 통째로 짓밟는 듯한 우월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카진이 가장 좋아하는 자리가 있었으니.
저벅.
걸음을 옮긴 카진이 철로 만들어진 관 위에 섰다.
해신 이수천에게 가장 큰돈을 들여 공수한 것이었다.
‘겨우 내 발아래에 있는 자 때문에 전쟁을 그르치다니.’
딱한 마음에 카진이 혀를 찼다.
만약 자신이 그 시대에 살았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터였다.
“회장님.”
카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는 사이.
금고의 책임자인 미야몬이 다가왔다.
거대한 도끼와 갑주를 찬 채 완전 무장을 끝낸 모습이었다.
“준비 완료됐습니다. 전 인원 입구에 배치했고 금고 보안 시스템도 가동했습니다.”
“그래.”
고개를 돌린 카진이 금고의 입구 방향을 응시했다.
산에서 금고에 닿을 수 있는 유일한 길.
이제 곧 도착할 하회탈의 무덤이 될 장소였다.
‘도착이나 하면 다행이겠지만 말이야.’
사이조의 금고 보안 시스템은 단순히 안에서 걸어 잠그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금고를 노리는 괘씸한 침입자.
그런 침입자에게 확실한 죽음을 선사해주기 위해 카진이 엄청난 돈과 시간을 들여 산 곳곳에 배치한 시스템이었다.
이번엔 경우가 경우다 보니 숨은 붙여놔야 하겠지만 말이다.
“자 지부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 테니. 여유롭게 기다리….”
쿠구구구….!!
“…?”
엄청난 흔들림에 카진이 테이블을 움켜잡았다.
‘흔들리다니…?’
카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곳은 산을 파내 크기에 맞춰 집어넣은 금고였다.
지진으로 땅 전체가 흔들리지 않는 이상 이런 진동이 발생하는 건 불가능했다.
… 쿠웅…!
“지금 분명…?”
쿠웅…!
몇몇의 인원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달려나가고.
나머지 금고에 남은 인원들이 미세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딱히 어디에서 들려온다기보단 사방에서 진동과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멎었…다?”
사라진 진동에 내심 안심하면서도.
회장 카진이 불안한 눈빛으로 천장을 살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엄청난 불길함이 엄습해 오고 있었다.
“나간 인원들은 아직인가? 왜 아직도 아무런 보고가 없어?”
심기가 불편해진 카진에 미유와 미야몬이 대답하려는 순간.
콰아아아아아앙!!!
“!!!”
지금까지완 비교가 안 되는 엄청난 굉음이 들려오며, 투명한 금속으로 이루어진 금고의 천장으로.
스륵.
새어 들어와선 안 되는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 * *
산 전체가 무너져도 견딜 수 있게 만들어졌다는 금고.
금고의 재질이 약했다면 사이조가 안내한 대로 입구를 통해 들어갔겠지만, 튼튼하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굳이 뻔한 함정으로 걸어 들어갈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
길은 스스로 개척하는 법이지.
암! 그렇고말고.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콰아아아아아아---!
산산조각 나 무너지고 있는 산을 바라봤다.
수리검을 들고 몇 대 갈겼지만 영 부서질 기미가 안 보였기에.
- [유탈라스 - 1단계 의태]
진심 펀치를 산 정상에 꽂아버렸었다.
그 결과로 산은 아이스크림 녹듯 무너져 내리는 중이었고 말이다.
뭐야 저건.
무너지는 중간중간에 기계로 보이는 것들이 잔뜩 뒤섞여 있었다.
설계 도면에 저런 건 없었는데 아마 뭐 보안 시스템이라거나 그런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이젠 쓸모없는 고철덩어리가 되어버린 만큼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만.
콰가가가가…!
오.
구름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고 있기를 잠시.
무너져 내린 산 중앙으로 정사각형 모양의 금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금속인지는 몰라도 투명해 안이 훤히 보이는 금고였다.
그럼.
연기를 흩날리던 칼데아를 해제하며.
가볼까.
아래로 하강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