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난중일기
공간이 흩어지며 변하길 잠시.
귓가로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휙휙.
고개를 돌려 도착한 장소를 둘러봤다.
어디 산속인지 사방이 수풀과 나무로 뒤덮여 있었다.
그 중심엔 적당한 크기의 초가집이 지어져 있었고 말이다.
꼴깍!
초가집을 보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창호지 문 너머 안쪽은 촛불로 밝혀져 있었는데.
그 안에서 앉아 있는 사람 그림자가 보였기 때문이다.
저벅.
집 방향으로 최대한 소리를 죽인 채 조심스럽게 발을 뻗었다.
몰래 들어가거나 곳간을 털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단지 주변에 깔려있는 엄숙함과 고요함을 보니 시끄럽게 굴면 안될 것 같아서였다.
저 안에…!
콧김을 내뿜으며 몇 발자국이나 움직였을까.
끼이익.
“!?”
문이 저절로 열리는가 싶더니.
화아아악!
엄청난 빨아들임에 몸이 집 안으로 옮겨졌다.
뭐, 뭐야.
무기와 공명을 시작한 이래 처음 겪어보는 상황.
이건 또 뭔가 하는 생각에 옮겨진 집 안을 두리번거렸다.
방문 근처가 촛불로 밝혀져 있음에도 방 안은 몹시 어두웠다.
밖에서 봤던 그림자의 주인 역시 보이지 않았고 말이다.
사락.
뭔가 잘못되기라도 한 걸까 생각하고 있을 때 너머에서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천천히 밝혀지기 시작한 작은 촛불 하나.
방안의 어둠이 걷히는가 싶더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찾아온 거겠지.”
위엄이 넘치면서도 엄청난 무게를 가진 목소리였다.
듣는 것만으로도 침이 꼴깍 넘어가며 몸이 살짝 빳빳해지는 느낌.
기….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뻣뻣한 목을 천천히 돌렸다.
촛불이 올려진 책상 너머.
아래로 길게 뻗은 하얀 수염과 가지런히 상투를 튼 흰 머리, 그리고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은 단단한 상체와 유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강인한 인상까지.
조선 최고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이 책상 너머에 앉아 있었다.
기아아아아악!!
이순신 장군임을 깨닫기 무섭게 호다닥 바닥으로 몸을 낮췄다.
엎드리는 걸 넘어 바닥에 껌딱지처럼 달라붙은 상태.
그렇게 고개를 조아리고 있자 건너에서 시원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재밌는 친구군. 폐하께도 그렇게 바짝 붙어 절을 올리지 않거늘.”
“자, 장군님! 만나 봬서…!?”
인사를 드리려는 찰나 그대로 신겨져 있는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빨려 들어온 탓에 요코하마 산의 흙과 놈들의 피가 묻은 신발을 신은 채로 들어온 것이었다.
기아아아악! 불경하다!
엎드린 채로 신발을 벗은 뒤 문을 열어 휙 내던져 버렸다.
최소한의 동작으로 다시 엎드린 건 물론이었다.
“어서 고개를 들게. 난 그런 인사를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특히 자네는 더더욱 더 그럴 필요가 없고 말이야.”
일단 장군의 말을 따라 고개를 빼꼼 들자.
이순신이 책상 앞으로 오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조선에선 책상 자리에 따라 상석이 나뉘지만, 그렇게 여기진 말아주게나. 그저 내 몸이 시원찮아서 움직이기 힘든 것뿐이니까.”
가리키는 장소로 슬금슬금 움직이며 조심스럽게 이순신의 몸을 살폈다.
하얀 한복 비슷한 옷 너머론 붉게 물든 붕대가 감아져 있었다.
계속해서 고통스러운 기침을 쏟아내는 건 물론이었다.
왜지…?
약간 의아했다.
이곳은 무기의 공간이었고 공간의 주인은 이순신 장군이었다.
생전에 어떤 상처를 입었든 무기 주인의 의지만 있다면 멀쩡했던 때로 모두 회복할 수 있을 터.
지금처럼 힘겹게 지낼 이유는 없었다.
다른 무기와 차이가 있는 건가.
이제껏 봐온 공간이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일단 추측만 하며 조심스레 몸을 앉혔다.
“자네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겐가?”
날 바라보다 질문하는 이순신에 잠시 멍 때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다, 당연하죠! 장군님께선 조선 최고의 영웅이시니까요! 당연히 제가 살고 있는 시대에도 대대손손 전해지는 중이고요.”
수도 한복판에 거대한 동상이 세워져 있음은 물론 한국의 모든 이가 당신을 존경하며 기린다고 말을 덧붙였다.
“그런가.”
턱수염을 어루만진 이순신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흡족해하거나 하는 웃음은 아니었다.
약간의 씁쓸함과 슬픔이 느껴지는 듯한 웃음이었다.
“나라를 끝까지 지키지 못한 이에겐 너무나 과분한 명성이군.”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물으려는 찰나.
입을 연 이순신이 말을 이었다.
“자네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해 말해 줄 수 있겠나? 예를 들어… 어떤 힘을 가지고 어떻게 나라를 지키는지 말이야.”
“예, 지금은….”
무릎을 꿇은 채 또박또박 현재 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각종 첨단 기술을 지닌 방어 체계가 있으며 각성의 등장으로 다양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했단 이야기였다.
“각성자라. 내가 살던 시대에도 종종 있었지. 밖으로 드러나진 않았으나 말도 안 되는 힘을 가진 이들이.”
옛날엔 몰랐지만 회귀 이후엔 나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도윤과 척준경, 코지로 등 역사에 제대로 기록되진 않았으나 모두가 엄청난 힘을 가진 강자들이었다.
“….”
턱수염을 쓸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순신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마음껏 물어보게나.”
“이곳은 장군님의 공간인데 상처를 치료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있는 건가요?”
단순한 궁금증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언가 이유가 있다면 내가 해결할 방법을 찾을 생각이었다.
그만큼 이순신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옆에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움과 힘겨움이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내가 선택한 거라네.”
“예…?”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이순신에 되묻자.
“아까도 말했지만 내겐 편하게 쉴 자격이 없다네.”
다시 한번 슬퍼지는 눈빛에 조용히 바라보고 있자.
이순신이 앞에 덮여 있는 책으로 손을 뻗었다.
“난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훌륭한 인간이 아니란 걸 보여주겠네.”
이순신의 말을 끝으로.
사락.
난중일기라 쓰인 책의 페이지가 넘어가기 시작했다.
* * *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들으라!”
노량해전이 끝난 직후.
모든 휘하 장수가 모인 방 안으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듣고 있던 노장이 책상을 내려치며 몸을 일으켰다.
“원균!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냐! 해전이 끝나고 채 이틀이 지나지 않았거늘! 모두가 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힘들어하는 게 자네 눈엔 안 보이는 건가!?”
“폐하의 명을 전하는 중입니다. 감히 그걸 막으시려는 겁니까?”
“이 고얀 놈이!”
노장이 분노하며 칼을 뽑아 들었다.
“네놈이 장군님을 시기하여 중간에서 거짓 보고를 올려온 사실을 모를 줄 알았더냐! 한산도 대첩, 명량 해전, 이번 노량 해전까지! 네놈의 계략으로 우린 제대로 된 지원조차 받지 못하고 싸워야 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왔음에도 결국 돌아오는 게 이따위 서찰이란 말인가!”
노장의 분노에도 원균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전투에 나서지 않아 생채기 하나 없는 깔끔한 얼굴.
그런 원균의 얼굴로 약간의 조소가 그려졌다.
“폐하께선 노량 해전까지의 공은 인정하겠다 하셨습니다. 허나 공을 세운 것과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받는 건 엄연히 별개의 일. 전 후자에 관해 전달하려는 겁니다.”
“이놈이 그래도!”
크게 분노한 노장이 정말 칼을 휘두르려는 찰나.
“그만.”
모두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아있는 게 다행이라 여겨질 정도로 만신창이인 이순신.
손을 들어 노장을 진정시킨 이순신이 고개를 들어 원균을 바라봤다.
“원균은 계속 읽게나.”
“크흠!”
크게 헛기침한 원균이 과장된 움직임으로 서찰을 빳빳하게 펼쳤다.
“그대가 왜군을 격퇴한 공은 놀랍기 그지없다. 허나! 지금까지 도깨비니 흉수니 하며 거짓된 존재의 보고로 추가 병력을 요청한 건 명백한 왕에 대한 기만이자 능멸이다! 이에 삼도수군통제사 지휘를 박탈하고 수도로 귀환할 것을 명한다!”
“이…!!”
이젠 일제히 일어나려는 장수들에 이순신이 고개를 저었다.
“도깨비와 흉수는 거짓 보고가 아니었네. 자네도 한 차례 봤으니 잘 알지 않는가?”
이순신이 고개를 내려 자신이 입은 부상을 바라봤다.
수많은 왜군을 격퇴하며 입은 상처도 있지만, 대부분이 아주 경미한 수준이었다.
이순신의 몸을 갉아 먹고 있는 대부분의 부상은 바다에 등장한 새로운 적에게 입은 것이었다.
“난 그런 걸 본 적이 없네만.”
원균의 뻔뻔한 반응에 이순신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다에 등장한 흉수를 발견하곤 주저앉은 채 살려달라며 울부짖었었던 원균.
지금의 원균은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한 뻔뻔한 얼굴로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
불세출의 영웅인 이순신에 대한 시기와 질투.
이 두 가지가 키운 괴물이었다.
“… 폐하의 명대로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는 내려놓겠네. 수도로도 돌아갈 테고.”
“장군!!”
자리에 앉아 있던 장수들이 이순신을 바라봤다.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순신이 수도로 돌아가는 건 뱀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았기에 절대 살아 돌아올 수 없음을 말이다.
“그럼 바로 채비를 하도록 하….”
흡족하게 웃으며 돌아서려는 원균에 이순신이 말을 이었다.
“마지막 전투가 끝난 다음에 말일세.”
“감히 폐하의 명을 멋대로 미루겠다는 건가!”
이번엔 이순신도 물러서지 않았다.
“엄청난 흉수의 군대가 몰려오고 있네. 여기서 막지 못하면 조선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게야.”
“또 허황된 이야기로 상황을 회피하려 하는가!!”
“원균.”
“!!”
이순신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르자.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느낀 원균이 말을 멈추고 이순신을 응시했다.
“자네가 날 어떻게 여기는지는 잘 알고 있다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야.”
이순신이 펼쳐진 지도에서 한 부분을 짚었다.
“지금까지 몰려왔던 수많은 흉수는 선발대에 불과하다네. 진짜 조선을 위협하는 적은 이제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것도 존재하지 않는 바닷속의 벗이란 녀석이 알려 준 건가?! 아주 그냥 미래의 일도 알고 있다고 말하지 그러나?”
원균의 말에 장수들이 손을 떨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원균 또한 수군과 함께 흉수와 싸워 준 현무의 존재를 직접 눈으로 봤었다.
덕분에 목숨까지 건졌으면서 이젠 이순신을 몰아넣기 위해 현무를 부정하고 있는 꼴이라니.
이순신이 아니었다면 당장 목을 자르고도 남았을 터였다.
“반복해온 언쟁을 또 하려는 건 아니네. 그저 자네도 조선을 위해 싸워온 전우라는 걸 알기에 내 간곡히 부탁함세.”
“자, 장군!”
장수들의 만류에도 이순신이 원균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 전투엔 지원이 꼭 필요하네. 그러니 부디 수도로 지원을 요청해주게. 나를 위해서가 아닌.”
고개 숙인 이순신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우리의 조선을 위해서 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