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마지막 싸움
부탁을 받은 원균이 떠나고 며칠이 지난 시점.
어둠이 내리깔린 고요한 바다를 바라보며 이순신이 미소를 머금었다.
‘이렇게 조용하고 아름다운 바다이거늘.’
종종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지금까지 해온 수많은 전투가 꿈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고요한데 포와 탄이 오가며 셀 수 없이 많은 이의 피가 뿌려졌다니.
차라리 일어나지 않았으면 참 좋았을 일들이었다.
“장군.”
이순신 곁으로 부관인 김태수가 다가왔다.
잔뜩 얼굴을 찡그린 채로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김태수.
부관을 바라보던 이순신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어찌 그런 표정을 짓는 게냐? 누가 보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겠구나.”
가볍게 농을 건네는 이순신에 김태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원이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직도 수도에서 군대가 출발하긴커녕 집결 명령도 떨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현무가 일러 준 날까지 하루가 남은 시점.
지원이 도착할 거라면 이미 와서 내일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그런가.”
이순신이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었다.
아무리 원균이 무능하고 시기와 질투로 많은 걸 망친 자라 할지라도.
조선을 위하는 마음이 같다면 이번만큼은 들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수도에 다녀온 병사의 말로는… 도착한 원균이 또다시 장군님을 모함했다고 합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흉수 군대를 핑계로 군사를 모으고 역모를 꾀한다는 듯이요.”
“원균 그 자도 참 열심히로구나.”
“장군!”
마치 다른 사람 일인냥,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는 이순신에 김태수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 기대를 걸었던 지원마저 무산되며 상황은 최악에 치달아있었다.
홀로도 왜군을 가루로 만드는 엄청난 무력을 가진 이순신이었지만.
이런 이순신의 몸도 잠시의 휴식도 없이 강행군을 이어온 탓에 이미 만신창이 상태였다.
이제 곧 등장할 흉수는 왜군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강적일 테고 말이다.
“장군.”
망설이던 김태수가 이순신을 올려다봤다.
오랜 시간 이순신을 모셔온 김태수였기에.
이순신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환경과 대우 속에서 전투를 치러온 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떠나시지요. 남은 장수들도 이미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게냐.”
“장군께서 목숨을 걸 이유가 없습니다. 나라가 장군을 버렸습니다. 마지막 전투에서마저 우릴 등지지 않았습니까. 원균이 아무리 이간질을 했어도 폐하께서 그걸 눈치채지 못하진 않았을 겁니다. 따르는 이가 많아진 장군이 여기서 죽길 바라는 겁니다. 장군께선 충분히 싸우셨습니다. 이제 그만…!?”
말을 이으려던 김태수가 어깨로 얹어진 손을 바라봤다.
“태수야.”
나지막한 음성에 김태수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김태수가 관직을 얻은 직후엔 단 한 번도 편하게 이름으로 부른 적 없던 이순신이었다.
“내가 버림받았다는 건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아무리 목숨을 걸고 싸운다 한들 돌아간 수도에서 날 기다리는 건 씻을 수 없는 오명과 죽음뿐이란 것도 말이다.”
“그렇다면…!”
한숨을 내쉬며 이순신이 말을 이어갔다.
“나 또한 사람인데 어찌 너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겠느냐. 종종 생각하곤 했었다. 내가 무얼 위해 이렇게까지 싸워야 하는 건가 하고 말이다.”
고개를 내린 이순신이 몸에 걸친 옷감을 가리켰다.
“이 옷을 준 건 마을의 어린아이였다. 이제 막 바느질을 배워 옷 만드는 걸 즐거워하고 있더구나.”
이번엔 옆에 내려놓은 보따리를 가리켰다.
“우리가 지금 먹고 있는 음식들 역시 나라에서 온 게 아니다. 모두 없는 살림의 이들이 자신의 몫을 떼어 나눠 준 것들이지.”
“….”
“내일 전투에서까지 우리 모두를 버린 나라를 위해 싸울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난 그저.”
고개를 돌린 이순신이 불이 밝혀진 너머의 마을을 응시했다.
“우릴 믿고 있는 백성을 위해 싸우고자 한다. 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마지막까지 저들을 지키고 싶구나.”
“….”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김태수가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든 이순신을 설득하려던 생각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내일 전투를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미소 짓는 이순신에게 고개를 숙이고.
김태수가 몸을 돌려 병영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아.”
다시 바다로 몸을 돌린 이순신이 깊은 한숨을 뱉어냈다.
차가운 공기 사이로 흩어지는 입김.
그 입김을 바라보던 이순신이 슬픈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옵건데.”
이순신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반드시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 * *
결전의 날.
느지막한 오후에 준비를 마친 김태수가 이순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장군, 출정 준비를 마쳤습니다.”
조용히 아뢰고 잠시 후.
“…?”
아무 소리도 안 들리자 김태수가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가 안 들려오는 건 물론 방 안에선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무언가 불안함을 느낀 김태수가 방문을 열어젖혔다.
“!!”
텅 빈 방 안엔 이순신 대신 한 장의 편지가 남겨져 있었다.
스윽.
편지로 손을 뻗은 김태수가 글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순신이 모든 장수에게 남긴 편지였다.
“장군…!”
편지를 읽으며 김태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한밤중에 홀로 편지를 썼을 이순신이 떠올라서였다.
# 정말 고마웠네.
지금까지 따라와 준 것에 대한 감사와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
그리고 마지막엔 자신이 홀로 떠나는 이유가 적혀 있었다.
# 자네들까지 죽음이 확정된 전장으로 내몰 순 없네. 연이 있는 상단에 부탁해놨으니 편지를 발견하자마자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떠나게나.
김태수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내가 잠시 가져가도록 하지.
어제 이순신은 방으로 해도를 가지고 들어갔었다.
김태수와 장수들이 쫓아올 걸 우려해 모두 가지고 떠난 것이었다.
‘… 우리 모두를 합쳐도 장군님보다 약하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현실적으로 김태수와 장수들이 따라간다 하더라도 큰 도움은 되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설령 아무 도움도 안되고 죽음을 맞이할지언정.
김태수는 이순신 혼자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나는 나라가 아닌.’
저벅.
김태수가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의 장군님을 위하여 싸운다.’
* * *
바다 한가운데.
앞으로 나아가며 이순신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태풍이라도 오려는 건지 해가 지는 하늘에선 새카만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정말 괜찮은 건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순신의 시야가 아래로 향했다.
이순신을 태우고 천천히 바다로 나아가고 있는 현무.
현무는 어젯밤 이순신에게 이곳을 떠나라고 말했었다.
레비아탄과 흉수들은 자신이 어떻게든 봉인하겠다 말하면서 말이다.
“벗이여. 어찌 혼자 전장으로 향하려 하는가. 오늘이 설령 마지막이 될지언정 함께 해야 하지 않겠나?”
이순신이 장난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조선의 장군 이순신과 오랜 시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반도를 지켜온 수호신 현무.
둘이 만난 건 이순신이 흉수의 존재를 발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 …!
이순신이 바다에서 만난 흉수와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바다 밑에서 압도적인 크기를 가진 현무가 모습을 드러냈었다.
- 스윽.
현무 역시 흉수라고 생각한 병사들이 공격하려 했지만.
이순신은 손을 들어 병사들을 저지했었다.
아직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음에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싸운다는 것을 말이다.
[처음 만난 후로 꽤 많은 시간이 흘렀군.]
이순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런 만남이었으나 둘은 힘을 합쳐 흉수를 상대해 승리했고.
그 이후로도 바다에 흉수가 나타날 때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만나 함께 싸워왔었다.
[몸은 멀쩡한 건가?]
물음에 이순신이 고개를 숙여 현무의 등을 내려다봤다.
감히 예측하기도 힘든 억겁의 시간을 홀로 싸워온 현무.
현무의 등 여기저기엔 수많은 전투의 흔적이 흉터가 되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자네보단 나을 거 같군.”
이순신의 대답을 끝으로.
태풍이 강해지며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바다로 거대한 파도가 일어난 건 물론이었다.
그리고.
[온다.]
현무의 말에 이순신이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일렁이는 파도 사이.
엄청난 수의 흉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작정을 한 건지 대열을 이루고 한반도로 밀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어딜 가려는 게냐.”
폭풍우 사이로 이순신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나아가던 흉수들이 진군을 멈추고 이순신을 응시했다.
말이 통하진 않으나 흉수들 또한 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이순신에 의해 얼마나 많은 동족이 멸해졌었는지를 말이다.
“네 녀석이구나. 우리의 앞길을 막은 놈이.”
뒤이어 귀를 찌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며.
진군 중이던 군대 사이로 엄청난 크기를 가진 레비아탄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무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크기였다.
“허어… 정말 작구나.”
레비아탄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이순신을 내려다봤다.
고작 이런 작은 인간 하나 때문에 그 많은 부하가 전멸했다니.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쉽사리 믿을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혼자인가?”
이순신을 내려다보던 레비아탄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바다의 재앙이라 불리는 자신과 군대를 막으려는데 혼자라니.
기가 차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무모하군, 혼자라니. 지나온 전투처럼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살아간다…?”
이순신이 의아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한 번도 살고자 싸웠던 적이 없다.”
스윽.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이순신이 쥐고 있던 활을 들어 올렸다.
영롱한 바다색과 두 마리의 용이 그려진 거대한 활이었다.
‘쌍룡궁이여.’
이순신이 쌍룡궁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말을 건넸다.
육지에선 사용이 불가능하나 바다에선 그 힘을 빌어 해일과 태풍을 일으키는 활.
이순신만이 사용할 수 있는 바다의 활이었다.
이 힘으로 수많은 흉수를 저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힌 건 물론이었다.
‘주인을 잘못 만나 고생이 많았구나.’
이순신이 쌍룡궁으로 나머지 손을 가져갔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날 위해 싸워다오.’
쌍룡궁에서 눈을 뗀 이순신이 레비아탄과 군대를 노려봤다.
“나는 오늘도 이곳에서 죽고자 함이니.”
이순신이 활시위를 당기자 바다에서 물이 끌어 올려지기 시작했다.
“어디 한 번.”
주춤하며 동요하는 레비아탄과 데몬 군대에 활이 겨눠지고.
“살아남아 보거라.”
쌍룡궁으로 모인 엄청난 양의 바닷물이 살을 찢는 폭풍우가 되어.
콰아아아아아아---!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