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수천이가 먹을
서울에 위치한 해신의 본사.
“빨리 확인해!”
“CBC에서 응답을 안 합니다!”
“이 새끼들이 우리 연락을 씹어? 단체로 약이라도 처먹은 거야 뭐야!”
콰앙.
해신의 홍보실장 진수현이 소리 지르며 책상을 내리쳤다.
이른 아침부터 홍보실은 제대로 난리가 난 상태였다.
새벽 중에 CBC가 기습적으로 올린 기사 하나 때문이었는데.
기업 해신이 일본 야쿠자 조직에 유물을 내다 팔았으며 전시회엔 가짜를 비치해 사람들을 속였다는 내용이 담긴 기사였다.
“기사 당장 내리라고 해! CBC가 씹으면 사이트에라도 연락하란 말이야!”
“그, 그게 CBC에서 제대로 작정한 모양입니다. 이미 아침에 뿌려진 신문과 잡지에도 실려 있어서 회수가 불가능합니다.”
으득.
불가능하다 말하며 가만히 서 있는 부하에 진수현이 빽 소리를 질렀다.
“전화 안 받으면 찾아라도 가! 언제까지 멀뚱멀뚱하게 서 있기만 할 거야!”
“예, 예!”
지시를 받은 부하가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가고.
미간을 짚은 진수현이 앓는 소리를 냈다.
평소라면 정황만으로 잘 꾸며진 기사라고 반박했겠지만, 이번엔 그게 불가능했다.
어떻게 구한 건지 기사엔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는 문서들이 잔뜩 첨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송유빈…!!’
충혈된 눈으로 기사 작성자의 이름을 바라보는 진수현.
어떤 겁대가리 없는 인간이 이런 짓을 한 건가 했었는데.
애초에 겁대가리란 게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 기사를 작성한 것이었다.
위잉.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길 잠시.
빠악!
무언가에 머리를 얻어맞은 진수현이 옆으로 내동댕이쳐졌다.
“…?”
갑작스러운 타격에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드는 진수현.
그런 진수현의 눈에 보인 건 잔뜩 화가 나 씩씩거리고 있는 회장 이수천이었다.
“회, 회장님!”
재빨리 일어난 진수현이 이수천에게 고개를 숙였으나.
이수천에겐 인사를 받아주고 말고 할 정신이 없었다.
“너 뭐 하는 새끼야! 뭐 하는 새끼길래 기사가 올라오고도 몇 시간이 지나도록 몰랐던 거야!”
“죄, 죄송합니다. 새벽에 워낙 기습적으로 올라와서 파악이 늦었습니다.”
“이이 모자란…!”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올린 이수천이 간신히 인내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이수천 회장님이 증거라는 단어를 참 좋아하셨죠?
이수천의 머리로 기사 끄트머리의 글귀가 떠올랐다.
송유빈이 작정하고 이수천을 노리고 쓴 것으로 보이는 글귀.
처음엔 송유빈이 또 제대로 된 증거 하나 없이 짖어대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첨부된 증거들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디서 저런 장부가 나온 거냐.’
파일을 열어본 순간 이수천은 까무러칠 뻔했다.
송유빈이 구한 장부는 가짜가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해신이 사이조와 벌여왔던 거래가 빠짐없이 적힌 완벽한 장부.
이수천이 영수증 개념으로 갖고 있던 자료들보다 훨씬 디테일한 장부였다.
‘저걸 어떻게 송유빈 따위가 가지고 있는 거고!’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자기도 없는 걸 한낱 기자 나부랭이인 송유빈이 가지고 있다니.
가능한 경우의 수를 다 떠올려봐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마 사이조가?’
이수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저 정도 장부를 가지고 있을 만한 유일한 존재.
사이조가 해신을 공격할 이유는 전혀 떠오르지 않으나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지금 당장 사이조로 연락 넣어.”
“그, 그게…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뭐?”
“가지고 있는 라인으로 전부 걸어봤는데 아무도 받질 않습니다. 마치 한 번에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요.”
이수천이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사이조의 회장 카진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핫라인이었다.
# 띠리리리리.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안 받는가 싶어 끊으려는 찰나.
# 안녕하세요. 이수천 회장님.
전화 너머로 차분하면서도 묘하게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진 몰라도 카진의 목소리가 아니란 것만은 확실했다.
“누구냐?”
# 그건 아실 것 없습니다. 저는 그저 사이조의 회장 카진은 죽었으며 조직 또한 괴멸 직전이란 걸 알려 드리려고 받은 겁니다.
“뭐…?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이 새끼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이수천의 입에서 욕이 튀어 나갔다.
카진이 전화를 잃어버린 건가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수천이 카진과 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 사이에 사이조가 멸망했다니.
사이조는 어디 근본 없는 소규모 조직 따위가 아니었다.
일본 정부조차 어찌 못하는 거대 조직인데 겨우 며칠 만에 없어진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 곧 믿게 되실 겁니다. 저희가 정보를 풀었으니 비리에 찌든 분들이 그쪽으로 연락 드리겠죠.
“죽기 싫으면 똑바로 대답해. 너 누구….”
# 아 참.
이수천의 말을 톡 끊으며 너머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 같이 유물 팔아먹던 동지가 멸망했다고 조심하거나 주의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뜬금없는 말에 이수천이 의아해하는 사이 남자가 말을 이었다.
# 조심한다고 피할 수 있는 재앙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얌전히.
너머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 목 씻고 기다리시는 게 좋을 겁니다.
뚝.
즐거운 듯한 마지막 말과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 * *
햇살 좋고.
배영 자세로 가만히 누워 하늘을 응시했다.
지금 동동 떠다니고 있는 장소는 인천 앞바다.
쿄스케가 해신의 금고가 있을 거라고 알려 준 부근이었다.
선글라스 좋은 거 쓰시네.
비광의 보드를 얻어 타며 복귀하고 있을 때.
눈앞으로 주머니에서 달랑거리는 비광의 선글라스가 보였었다.
어차피 바다에 떨어질 거 같아서 미리 주웠다는 마음으로 챙겨왔었고 말이다.
해를 정면으로 보는데도 눈이 하나도 안 부시구만.
“형님!!”
딱 봐도 비싼 듯한 선글라스에 흡족하던 찰나, 모랑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았슴돠!”
“오!!”
찾았다는 소리에 몸을 호다닥 일으켰다.
일단 지도를 보고 오긴 했지만 깊은 바닷속을 몽땅 뒤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굴업리에 있던 듀린이 모랑에게 같이 심해 탐색 좀 하자고 도움을 요청했었다.
- 이 부근은 제 놀이터나 마찬가지임돠!
맨날 아버지 발랑에게 두들겨 맞아 날아다니긴 하지만 굴업리에선 나름 골목대장 위치에 있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수십 명의 듀린이를 끌어모았던 모랑.
모랑은 자기만 믿으라며 가슴을 두드려 보인 후 자신만만한 얼굴로 탐색을 시작했었다.
“이상한 표식 같은 게 그려져 있고 그 끝에 원형의 거대한 건물이 있었슴다! 아마 제가 아니었으면 못 찾았을 겁니다! 이곳이 워낙 제 놀이터이기도 하고 제 뛰어난 통찰력과 감각이….”
“자, 잘했어!”
할아버지를 닮은 탓일까.
끝도 없이 이어질 듯한 자기 자랑에 엄지를 세워 준 후 가지고 왔던 초콜렛 가방을 호다닥 건네주었다.
“오오오오!!”
한 번 맛보더니 초콜렛이라 하면 사족을 못 쓰는 듀린이들.
“그런데 그 보따리는 뭡미까!?”
허겁지겁 초콜렛을 까먹던 모랑이 내가 가진 또 하나의 보따리를 노려봤다.
그것도 초콜렛이라면 내놓고 가라는 듯한 탐욕스러운 눈빛이었다.
“이건 너네 먹는 거 아니야.”
슬쩍 보따리를 열어 안을 살폈다.
꾸러미 안에 든 건 딱 봐도 어마무시하게 생긴 여러 개의 폭탄이었다.
- 뭐? 조용히 폭탄 좀 구해달라고?
너무 앞뒤 없이 말을 건넨 모양이었다.
비광은 벙찐 얼굴로 날 한참이나 쳐다봤었다.
- 도심에서 터뜨리려는 건 아니지?
아니라고 몇 번이나 대답하고 나서야 비광은 어딘가로 연락을 넣어줬었다.
폭발 관련 능력을 각성한 동료로 폭발물 관련해선 이 분야 넘버 원이라는 설명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대놓고 무기를 꺼낼 순 없으니까.
꾸러미 안엔 폭탄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익명으로 동영상을 올릴 수 있는 액션캠까지.
이수천과 사람들에게 실시간으로 금고가 날아가는 걸 보여주고 싶어 챙긴 것이었다.
여러 사람이 볼 테니 무기왕이라 특정 당할만한 건 최대한 지양하려는 중이었고 말이다.
- 사이조 간부 말로는 유물 같은 건 없다고 해요. 전부 현금 아니면 귀금속. 그리고 내부 시스템은.
처음엔 폭탄으로 날릴 생각까진 안 했었다.
이수천이 오랫동안 꽁쳐 놓은 게 전부 돈이나 보석 같은 재화라는 걸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괘씸한 자식!
이제 보니 이수천은 유물 되팔렘 이전에 타고난 연기자였다.
아주 유물 없이는 못 사는, 유물이 인생의 전부라는 것처럼 굴었던 이수천.
유물을 애지중지하는 척하며 눈물까지 머금었던 걸 떠올리니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뒤에선 다람쥐 새끼마냥 보석이나 모으고 있었다니.
나도 돈이라면 한 환장하는 놈이지만 저건 손도 대고 싶지 않았기에.
제대로 싹 다 날려 줄 생각이었다.
“그럼 누가 먹는 겁미까?”
의심반 호기심반으로 묻는 모랑에게.
히죽!
소름 끼치는 미소를 그려 보였다.
“우리 수천이가 먹을 거야!”
* * *
부산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뒷좌석에 탄 이수천이 입을 열었다.
“얼마나 남았어?”
“이제 곧 도착합니다. 일본 쪽에도 연락은 취해놨고요.”
깊은 한숨을 내쉰 이수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송유빈의 기사로 해신의 유물을 모조리 검사해야 한다는 주장부터 당장 이수천부터 잡아들여야 한다는 의견 등 여론이 제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 사이조가 하회탈이란 놈에게 당했습니다. 카진 회장도 죽었습니다.
거기다 연락이 닿은 일본 측 관료가 알려온 사이조의 소식까지.
더 이상 한국에 머무르는 건 위험하단 판단이 들어 일본 쪽으로 망명 비슷하게 몸을 피하려는 중이었다.
‘어차피 여론은 금방 식을 거다.’
일단 피하지만 영원히 도망자로 살 생각은 없었다.
비록 숨겨왔던 비밀이 모두 까발려지긴 했어도 모든 걸 잃은 건 아니었다.
‘난 무너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유물을 팔며 모아온 막대한 재산.
웬만한 소국가를 통째로 사고도 남을 재산이 인천 바다 깊은 곳에 잠들어있었다.
‘그게 있는 한 난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다음엔 기업 해신이나 이수천이 아닌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세상을 쥐락펴락할 수도 있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재산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뭐라고…? 알겠어. 말씀드릴 테니까 끊어.”
앞에서 받던 전화를 심각하게 끊는 진강현에.
이수천이 무슨 일이냐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홍보실이었습니다. 웬 미친놈이 인천 앞바다에서 생방송을 켰다고 합니다.”
“그런 놈이 어디 한둘이야? 홍보실에선 왜 연락한 건데? 그리고 그놈은 누구고?”
“그게 정체는 아직 파악이 안 됐는데 하회탈 가면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
대충 대답하던 이수천의 눈이 커졌다.
하회탈.
아까 받았던 전화에서 관료가 언급한 이름이었다.
“그, 그놈이 뭘 한다는데?”
엄청난 불안감을 느끼며 묻고 잠시 후.
진강현이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고, 그 입에서 나온 말이 이수천의 몸을 싸늘하게 만들었다.
“그놈이 회장님의 금고를 날려버릴 거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