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가짜 기둥
“끄…끄윽!”
뚜둑.
서울에 위치한 한 공사장.
간단한 움직임으로 숨을 끊어버린 장발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슈라. 뭐라든?”
조금 전 전화를 끊은 또 다른 장발의 남자 슈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최대한 끔찍하게 죽이라는데. 회장님 화가 많이 나셨대. 그나저나 슈로, 그 쓰레기들 좀 치워. 냄새나니까.”
슈라의 말에 슈로가 밟고 있던 시체를 대충 걷어차 냈다.
굴러가는 시체들이 죽은 이유는 간단했다.
이수천의 의뢰를 받고 한국으로 건너온 두 사람에게 머리가 지저분하다며 시비를 걸었다는 것.
이 이유 하나만으로 시비를 걸었던 건달은 물론 그놈이 속한 조직까지 모조리 목이 부서지고 말았다.
“쓸데없이 많이 죽였네.”
공사장에 한가득 쌓인 시체를 보며 슈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목표물 외엔 최대한 건드리지 않는 것.
사이조에서도 제일가는 암살대인 슈 형제의 원칙이었다.
이번엔 본의 아니게 우루루 몰려온 탓에 다 죽여버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대체 뭘 했길래 그 회장님 화를 이렇게 돋운 거지? 타겟도 일반인이라면서.”
슈로의 말에 슈라가 불만 섞인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해신에게서 타겟을 받았을 땐 잠시 어이를 상실했었다.
고작 전투 능력 없는 여자 한 명을 죽이기 위해 자신들을 부르다니.
아무리 조직의 명이라 해도 여간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본진은 아직도 연락 두절이야?”
“어. 우리 회선이 잘못된 건지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아예 라인이 다 막혔어.”
“라인 관리하는 새끼들 좀 혼내야겠네. 일 처리를 이딴 식으로밖에 못 하나.”
슈로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출발하자. 싱거워도 일은 일이니까.”
“그래야지 VIP 의뢰니까.”
뚜둑.
슈 형제가 몸을 풀며 걸음을 옮겼다.
“VIP가 확실히 만족할 수 있게.”
“제대로 죽여주자고.”
* * *
연락은 아직 안 왔구만.
잠잠한 핸드폰을 확인한 후 들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연락이 오면 바로 튀어가려고 했는데 아직인 모양이었다.
역시 다람쥐 새끼야. 재빠르다니까.
바다 속 금고를 날린 후 찾아갔던 해신의 본사.
회장 이수천은 심복들과 함께 이미 탈주를 마친 뒤였다.
혹시나 느릿느릿하게 굴고 있으면 조용히 침투해 머리채를 끌고 올 생각이었는데.
자기 목숨이 걸려있어선지 빠르게 판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해신도 얼마 못 갈 테고.
잠깐 훑어본 해신은 혼비백산을 넘어 아비규환에 도달해 있었다.
각종 수사기관에서 물밀 듯이 밀고 들어와 모든 걸 압수 수색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다 뺏은 건가.
아직 더 박살낼 게 남았나 떠올려봤지만, 이쯤이면 될 것 같았다.
해신도, 다람쥐처럼 모았던 재산도 모두 사라진 지금 이수천은 그야말로 빈털털이 신세였다.
이제 남은 건 질기게 살아온 목숨 하나뿐.
그것 역시 조만간 가지러 갈 생각이었다.
- 일본 관료 몇은 일부러 내버려뒀어요. 사이조를 잃은 만큼 그들에겐 새로운 돈줄이 될 이수천이 꼭 필요하거든요. 그들이 우릴 이수천에게 인도해 줄 거예요.
명석한 두뇌를 가진 쿄스케에 고개가 절로 내저어졌다.
개방한 능력이 언력이 아니라 제갈량의 머리는 아닐지 의심이 되는 친구였다.
어쨌든 이수천은 연락 기다리면 되고.
“으챠.”
아이스크림을 마무리하며 발을 뻗었다.
송유빈이 사는 오피스텔로 향하는 길목.
어젠 너무 성의 없이 자료만 툭 던지고 온 느낌이라 다시 한번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던지고 갔는데도 오늘 제대로 해신을 털어 준 거에 대한 감사 인사도 할 겸 해서 말이다.
“초밥 좋아하시겠지.”
양손에 묵직하게 들린 초밥을 바라봤다.
비광이 추천한 슈퍼 비싼 초밥집에서 산 녀석이었다.
물론 내가 먹고 싶어서 산 건 절대 아니었다.
송유빈이 초밥을 좋아할 거란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산 것이었다.
“응?”
초밥 먹을 생각에 룰루랄라 하며 걷길 잠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 송유빈이 눈에 들어왔다.
고된 하루를 보낸 탓인지 부쩍 축 늘어져 보이는 송유빈이었다.
“유빈 님!”
놀라지 않게 멀리서부터 크게 부르자.
잠시 멈칫하던 송유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유빈….”
“꺄아아아아아악!!”
에?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며 뒤로 발라당 넘어지는 송유빈에.
통통 뛰어가던 가벼운 발걸음을 잠시 멈춰 세웠다.
송유빈은 귀신이라도 본 것마냥 얼굴이 허옇게 질려있었다.
* * *
저벅.
송유빈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란히 걷고 있는 백운을 흘끔거렸다.
‘하회탈이 아니었구나.’
송유빈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백운과 하회탈을 동일인물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렇기에 백운이 폭발에 휘말려 죽었을 거라 생각했었고 말이다.
- 송! 오늘 한잔해야지?
일정이 모두 마무리되며 축제 분위기였던 팀과 달리.
송유빈은 밀려오는 슬픔에 풀이 잔뜩 죽은 채로 귀가하는 중이었다.
겨우 두 번 본 게 전부인데도 왜 이렇게 힘든 건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상태로 말이다.
‘뭐지 진짜.’
백운과 하회탈이 다른 사람이란 걸 알게 된 순간.
송유빈이 가장 먼저 느낀 건 다행이라는 안도감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지금 느끼고 있는 당혹감이 찾아왔다.
언제 풀이 죽었었냐는 듯 몸으로 빠르게 활기가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스윽.
고개를 든 송유빈이 조금 앞서 가는 백운을 응시했다.
정확히는 이상하리만치 친근감이 느껴지는 뒤통수를 바라봤다.
‘뭘까 이 기시감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에 분명 어디서 봤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어?’
사진처럼 남아있는 기억을 열심히 되짚어 보던 중.
꽤 오래된 장면이 머리를 스쳤다.
무기왕이 첫 등장을 알리며 화려한 축포를 쏘아 올렸던 개미굴.
- 기다리라고! 이름이라도 말해주고 가!!
송유빈은 이후 그날을 두고두고 후회했었다.
조금만 더 빠르게 달려 낚아챘다면 무기왕의 얼굴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라면서 말이다.
‘어어어어…!!’
당시 봤던 것과 머리 스타일도 다르고 체형도 다시 태어난 사람마냥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묘하게 닮아있었다.
꼴깍.
송유빈이 설마하면서도 마른침을 삼켰다.
백운이 무기왕이라면 지금까지 느꼈던 정체불명의 친근함도 설명할 수 있었다.
“백운 님.”
송유빈이 떨림을 최대한 감추며.
“넵?”
휙 고개를 돌리는 백운에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좀 뜬금없지만…. 혹시 개미굴 가셨던 적 있나요?”
* * *
쿵.
순간 내 심장 떨어지는 소리가 귀로 들린 것 같았다.
뜬금없이 개미굴에 갔었냐고 물어보는 송유빈.
절대 기억을 가진 송유빈이 아무 이유도 없이 묻진 않았을 터였다.
치, 침착해!
이미 침착하지 못했지만 더 늦기 전에 뭐라도 대답하려는 찰나.
“데이트 중이셨나요?”
“기다려 드리고 싶었는데 너무 오래 걸릴 거 같아서 끼어든 점. 사과드립니다.”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꽤 먼 거리에서 두 명의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실루엣만 봤을 땐 같은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몹시 비슷한 생김새였다.
뭐지 이 장발장들은.
조용히 바라보고 있자 근처까지 다가와 송유빈을 응시하는 남자들.
겉모습만 봤을 땐 딱히 이상해 보이는 게 없는 사람들이었다.
“송유빈 님 맞으신가요?”
…?
의아하게 바라보자 남자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저흰 슈 형제라고 합니다. 제가 형인 슈로이고 이쪽이 동생 슈라입니다.”
점잖게 자기소개를 한 슈로가 말을 이었다.
“사이조 소속 암살대로 이수천 회장님의 의뢰를 받아 송유빈 님의 목숨을 거두러 왔습니다.”
“!!”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러 왔다는 말에 송유빈과 슈 형제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날 보고 있더니 빙긋 웃으며 다시 한번 입을 여는 슈로.
“어떤 마음이신지는 알겠는데요. 죽고 싶지 않으면 모른 척 지나가세요. 그냥 안 좋은 꿈을 꿨다 생각하고 잊으면 살 수 있습니다. 저희가 나름 프로라서요. 타겟이 아니라면 굳이 죽이지 말자는 주의입니다. 가능하다면요.”
나, 나르시스트 새낀가.
자아도취에 찌들어 있는 녀석이었다.
말하는 중에 잊을만하면 넘겨대는 저 머리도 왠지 모르게 킹 받았고 말이다.
“10초 드리겠습니다. 사라지세요. 하나.”
나름 자비로운 녀석인 것 같았다.
나였으면 다섯 센다 하고 바로 셋부터 시작했을 텐데.
“둘.”
거기다 이죽거리고 있는 걸 보니 상대의 난처한 선택을 즐기는 악취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당당하게 의뢰인을 밝혔다는 건 자기들이 무조건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것일 터.
애초에 살려 줄 생각도 없으면서 저런 제안을 하는 걸 보면 변태 나르시스트임이 틀림없었다.
그것보다.
뒤에 있는 송유빈을 흘끔거렸다.
송유빈은 슈 형제의 등장에 깜짝 놀랐으면서도 동시에 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확신 단계는 아니야.
나의 뭘 보고 무기왕을 떠올린지는 모르겠으나.
조금 전 개미굴에 관해 물어본 것이나 지금의 표정을 봤을 때 아직은 의심 단계였다.
여기서 무기를 꺼내면 인정하는 게 되겠지.
물론 무기왕인 거 하나 숨기겠다고 힘든 싸움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굳이 들키지 않아도 된다면 숨기고자 하는 바람이었고.
하늘도 이런 내 마음을 아는 건지 아주 다행스럽게도.
“열.”
“재미없는 놈! 같이 뒈져라!”
딱히 무기를 꺼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넌 눈 깜짝할 사이에 죽여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인지조차 못 할 속도로 죽을 테니!”
더럽게 시끄럽네.
숨겨뒀던 도끼를 들고 달려드는 놈들을 바라봤다.
지그재그로 교차하며 거리를 좁히면서도 두 녀석은 쉴 새 없이 웃고 떠들어 대는 중이었다.
날다람쥐 능력이라도 개방한 건가.
나름 날쌘 건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헌터 등급으로 치면 최소 2.5급 정도는 되어 보이는 녀석들.
동시에 달려들어 양쪽에서 내 목을 치려는 듯 보였다.
그러든가 말든가.
중요한 건 저쪽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뭐 하는 인간인지도 제대로 말씀 안 드렸었네요.”
살짝 고개를 돌려 송유빈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말을 건넸다.
순간 머리로 좋은 위장 신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전 오래 전부터 한 회사를 위해 일해왔어요. 그럼 다시 한번 제 소개를 할게요.”
“마지막 사랑 고백이라도 속삭이는 거냐!”
“이번엔 안 기다려 준다!”
약간 멍한 표정인 송유빈을 뒤로하고 달려드는 놈들을 바라보다.
두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제 이름은 백운. 기업 대산의.”
순간 앞으로 달려나가며 마주 오던 두 녀석의 면상을 붙잡았다.
콰아악.
“!?”
“!!?”
그리고 양손에 가지런히 잡힌 녀석들의 머리를.
“일곱 번째 기둥입니다.”
망설임 없이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콰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