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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왕이 헌터로 회귀했다-289화 (289/473)

289화. 회중시계

굴업리에서 돌아온 저녁.

뜨끈한 피자를 우물거리며 노트북을 두들겼다.

“아주 그냥 난리가 나있었구만.”

이순신 장군의 유해가 아니라는 게 밝혀지며 나라가 또 한 번 발칵 뒤집혀있었다.

다행히 유물을 반환해준 일본에 항의를 하거나 그러진 않은 모양이었다.

다른 모든 유물이 진품인 만큼 일본이 처음부터 속였을 가능성은 몹시 낮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대단하네. 어떻게 알아낸 거지.”

기술의 발전 덕분인지 각성의 시대인 덕분인지.

몇백 년이 지낸 유해로 이순신 장군인지 아닌지를 알아내다니.

대단하면서도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유해는 어디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주제였다.

여전히 바다 아래에 잠들어 있다부터 충신에 의해 어딘가로 옮겨졌다는 등 각종 가설이 범람하는 중이었다.

- 자네가 결정하게나.

큰절을 올리고 일어나자마자 조용히 다가온 말랑이 말을 건넸었다.

내가 원한다면 이순신 장군의 유해를 새로운 곳으로 모셔도 좋다는 것이었다.

- 휙휙!

물론 1초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내저었었다.

사람들에게 진짜 이순신 장군의 유해를 공개하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겠지만.

지금이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킹북이도 있고. 배로로 족도 있고.

몇백 년 전 일이긴 하지만 나라가 이순신 장군을 버렸을 때 곁을 지켜 준 이들이었다.

그들 곁에 있는 게 더 옳다고 여겨졌고 장소 역시 신비와 경이가 가득한 지금의 공간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하아아!”

기지개를 쭉 켜며 의자로 몸을 기대었다.

이제야 제대로 끝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른하구만.”

눈을 감고 발을 까딱이며 천천히 이 여유를 즐겼다.

피자 다 먹고 달달한 커피 한 잔 때린 후 영화 한 편 보며 잠들면 딱일 것 같았다.

“그리고 내일은.”

드륵.

서랍을 열어 안에 있는 회중시계를 꺼냈다.

쌍룡궁을 먼저 찾고자 잠시 미뤄두었던 회중시계.

마음도 평온해진 만큼 천천히 움직여 볼 생각이었다.

“… 앗!”

멍하니 회중시계를 바라보다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나중에 답장해야지 하고 깜빡하는 바람에 여전히 쌓여 있는 비광과 기태랑의 톡.

만났을 때 뒤통수가 날아와도 할 말이 없었다.

호다닥.

휠을 빠르게 올려 두 사람의 톡을 읽어나갔다.

대충 어디냐부터 연락받아라, 답장해라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음!”

약간의 고민 시간을 가진 후.

두 사람에게 동시에 답장을 보냈다.

#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사라질 예정입니다. 절 찾지 마세요.

“좋아.”

내일부턴 장기 출가가 예정되어있기에.

전송 버튼을 누르고 기분 좋게 다음 피자 조각을 집어 들었다.

* * *

“이 자식이…?”

“….”

기태랑과 비광이 핸드폰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에게 동시에 도착한 답장.

어이없지만 그야말로 백운스러운 답장이라 할 수 있었다.

“어딜 또 간다는 거야. 지가 집시 족이야 뭐야.”

“그러게. 이번이 그나마 오래 붙어있었던 거 같은데.”

“뭐랄까. 엄한 짓은 안 하지만 어디 간다고 하면 불안하단 말이지.”

“그건 나도 동감이야. 가는 곳마다 대서특필 되고 있으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비광이 의자로 몸을 파묻었다.

“유물은 언제 훔치려나.”

두 사람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였다.

당당하게 언젠간 무기왕 이름으로 유물을 훔치게 될 거라고 선언한 백운이기에.

그게 언제가 될지, 그날이 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사뭇 기대하는 중이었다.

쾅.

비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며 강태황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소리야. 안 훔치는 게 최선이지.”

“오셨어요. 어떻게 됐어요? VIP 만난 건.”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들어선 강태황이 넥타이를 풀며 한숨을 내쉬었다.

“VIP 포함 최측근 몇 명만이라도 무기왕의 정체를 알고 싶다고 하더군.”

“영감님 결정은요?”

“알겠다고 대답했어. 하지만 내가 알려 줄 순 없고 직접 물어보시라고 했어.”

비광과 기태랑이 강태황을 올려다봤다.

직접 물어보라니.

“백운을 VIP랑 만나게 하시게요?”

“대답은 만나게 해주겠다고 했어. 최선을 다해서.”

의미심장한 마무리에 두 사람이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자.

강태황이 입가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들었다.

“워낙 집시 같은 친구니까 당연히 곧 한국에 없을 예정이겠지?”

기태랑이 대답 대신 핸드폰을 들어 방금 도착한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메시지를 확인하곤 흡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강태황.

“이거 참 곤란하군. 그런데 어쩌겠어? 우리가 최선을 다해도.”

시원한 미소와 함께 강태황이 쇼파에 몸을 앉혔다.

“만나기 힘든 친군데! 그럼 VIP도 못 만나는 거지! 크하하하하!!”

* * *

송유빈에게 저 사실은 기둥입니다! 하고 시원하게 구라친 덕분일까.

평소에 종종 방문하던 로비임에도 약간의 찔림이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백운 님.”

뜨끔!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들려오는 차분한 목소리에 괜히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깔끔한 정장과 특유의 지적인 동글 안경을 장착한 아티라가 서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아티라 님!”

“오랜만에 뵙네요. 이쪽으로 오시죠.”

프라이빗 엘리베이터로 안내하는 아티라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몸은 다 나으셨나요?”

찔려서 괜한 걸 물어본 건 아니었다.

아티라는 지난 대산 침투 사건 때 심각한 부상을 입었었다.

“네. 지금은 깔끔하게 다 나았습니다. 백운 님은… 안 여쭤봐도 되겠네요.”

“하하… 그렇죠. 워낙 튼튼한 몸뚱이라.”

머리를 긁적이며 웃어 보이자.

아티라도 입가로 미소를 그려 보였다.

처음엔 표정 변화도 없고 말도 짧게 딱딱 끊길래 AI 로봇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지난 대산 사건 이후론 부쩍 말도 길어지고 미소도 자주 지어주고 있었다.

“오늘 바쁘신 건 아닌가요?”

“넵?”

갑작스런 물음에 되묻자 아티라가 말을 이었다.

“회장님께서 백운 님이 바빠 보이면 모셔오지 말라고 했었거든요.”

“….”

약간 할 말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세상에서 나보다 더 한량처럼 사는 인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난 잉여 인간 그 자체인데.

세계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바쁜 대기업 회장님이 그런 걸 걱정해주다니.

“와, 완전 안 바쁜데요.”

“다행이네요. 회장님께서 오랜만에 백운 님을 보고 싶어 하셨거든요.”

솔직하게 대답하자 웃으며 엘리베이터로 올라타는 아티라.

아티라를 따라 엘리베이터로 오르며 작은 콧김을 내뿜었다.

생각보다 만남이 커졌구만.

원래는 찹쌀떡 전수희에게만 조용히 연락했었다.

알아보고 싶은 물건이 있는데 도와줄 수 있냐고 말이다.

- 당연하죠!

라고 전수희가 우렁차게 대답하고 몇 분 뒤.

다시 내게 연락한 전수희는 소피아가 날 만나고 싶어한다고 전해왔었다.

당연히 난 무릎을 조신하게 모으며 알겠다고 대답했었고 말이다.

회중시계만 좀 알아보고 호다닥 튈려고 했는데.

고개를 내려 주머니에 고이 모셔진 회중시계를 바라봤다.

쌍룡궁도 찾았겠다 본격적으로 어디서 온 시계인지 알아볼 생각이었고, 감정사 에밀리가 있는 그리스는 먼 곳이니 가까운 대산부터 찾은 것이었다.

띵.

고급진 알림 소리가 들려오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리모델링된 회장실이 눈앞으로 펼쳐졌다.

홀리…!.

오래된 서재 같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젠 누가 봐도 대기업 회장실이구나를 알 수 있게 삐까뻔쩍하게 변해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놓인 테이블엔.

“오랜만이네요. 백운 님.”

여전히 화사한 금발과 맑은 눈동자를 가진 소피아가 앉아있었다.

“안녕하세요!”

나도 모르게 직각으로 인사를 건네며 테이블을 살폈다.

그곳에 있는 건 소피아뿐만이 아니었다.

전수희에게 내가 원하는 바를 전해 들은 건지 저번에 봤던 탐사 실장 김정윤도 함께하고 있었다.

“방이 좀 많이 바뀌었죠?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변화를 줘봤어요.”

아티라의 안내를 받아 소피아 바로 옆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대기업 회장님의 옆자리로 아무렇지도 않게 안내받다니.

새삼스레 출세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의미 깊은 일을 해내셨네요. 그 많은 유물을 한 번에 받아오다니. 거기다 대산에서도 좀처럼 접근하지 못해 고생하던 해신과 사이조까지. 백운 님께는 감사해야 할 일이 끊이질 않네요.”

“하하하…별말씀을요.”

극찬에 땀을 뻘뻘 흘리며 몸을 앉혔다.

쌍룡궁 찾으려고 다 들쑤셨다는 건 소피아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그럴싸한 입 발린 소리로 겸손을 떨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번에 못 뵈면 또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겠단 생각이 들어서 모셨어요. 백운 님이 워낙 한곳에 안 계시잖아요.”

말을 마치며 소피아가 눈짓을 보내자 김정윤이 커다란 가방을 테이블로 올려놨다.

펼쳐지기 무섭게 가방에서 각종 도구와 기계, 노트북 등이 튀어나온 건 물론이었다.

“오늘 알아보고 싶은 물건이 있다고 들었어요.”

“넵.”

빠른 진행에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건네었다.

손에 라텍스 장갑까지 낀 김정윤이 조심스럽게 시계를 받아 들고.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소피아가 작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아름다운 시계네요. 정말 잘 보관되어온 거 같고요. 이런 걸 어디서….”

내 쪽으로 고개를 들었던 소피아가 싱긋 웃더니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구하셨냐는 질문은 하지 않도록 하죠.”

“가, 감사합니다.”

하마터면 온몸을 땀으로 적실 뻔했는데 다행이었다.

나 역시 어디서 온 건지 출처를 알 수 없는 회중시계.

일단 있어 보이길래 냅다 주워온 것이었다.

“시계를 만든 방식이나 문양을 봤을 땐 14세기 혹은 15세기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거 같습니다.”

프랑스…? 영국 한가운데서 주웠는데.

무기와 전혀 관련 없는 유물일수도 있지만.

워낙 도둑놈 심보다 보니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유서 깊은 영국 누군가의 무기와 관련된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아서왕이라던가.

하지만 프랑스라 하니 아서왕은 일단 물 건너가는 기분이었다.

“문양의 세밀함이나 사용된 재료를 봤을 땐 왕족이나 귀족이 사용하던 시계는 아닙니다. 평민 계층에서 썼을 듯하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다 몸을 기울이는 소피아.

“프랑스 평민이 사용했지만 영국으로 건너온 회중시계라.”

뜨끔!

소피아의 혼잣말에 등 뒤로 땀 한줄기가 흘렀다.

이미 내가 런던에서 주웠다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값비싼 귀금속은 아니지만 아주 튼튼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시계는 당시 전쟁에 나가는 군인들이 많이 챙겼었죠.”

여러 도구와 자료를 활용한 김정윤의 설명이 계속되고.

마지막쯤에 다다르자 눈을 가늘게 뜬 소피아가 기울였던 몸을 원위치시켰다.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당장 제 머리로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네요.”

“!?”

뜻밖의 말에 바라보자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천천히 입을 여는 소피아.

“재가 되어 흩어진 성녀.”

소피아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잔다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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