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재가 된 성녀
잔다르크라.
소피아가 말한 이름을 되새김질하며 턱을 문질렀다.
회중시계를 주운 곳은 런던이었다.
그렇다 보니 영국 외에 다른 나라를 신경쓰진 않았었는데.
시계가 만들어진 곳이 프랑스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름이었다.
“신의 계시를 받고 프랑스에게 백년 전쟁의 승리를 안겨 준 성녀.”
“맞아요. 잘 알고 계시네요.”
소피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혜성처럼 등장해 기적에 가까운 승리를 가져다줬지만, 마지막이 좋지 않았었죠.”
아직 회중시계가 잔다르크와 관련이 있는지, 시계를 따라가면 내가 얻을 수 있는 무기가 나오는지 등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으나.
프랑스에게 정치적 문제로 버림받아 화형으로 생을 마감했던 잔다르크의 최후를 떠올리니 약간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최근에 쌍룡궁을 얻으며 이순신 장군의 상황을 직접 보았기 때문인 듯했다.
탁.
잔다르크에 관해 생각하고 있는 사이.
장갑을 벗은 김정윤이 책상에 도구를 내려놨다.
“회중시계만으로 알아낼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일단 상태만 봤을 땐 최근에 생긴 기스를 제외하곤 정말 잘 보관되어온 것 같습니다.”
최근 생긴 기스라 하면 박물관이 박살 나며 생긴 기스일 것 같았다.
“그리고 제 추측입니다만.”
회중시계를 어루만지며 무언가 생각하던 김정윤이 말을 이었다.
“일반적인 평민 계층 시계는 아닐 거 같습니다.”
“넵…?”
“14세기에서 15세기의 시계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긴 하지만, 왕족도 아닌 평민 계층이 사용하던 시계는 지금도 흔히 볼 수 있거든요. 워낙 많이 만들어져 여기저기 뿌려진 탓이죠. 하지만 이 회중시계는 좀 다릅니다. 만들어진 후 추가로 새겨진 듯한 십자가 문양과 글귀, 그리고 현대까지 이어져 온 엄청난 보존 상태까지. 이런 건 가만히 잘 모셔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분명 엄청난 기술과 돈을 들여왔을 겁니다.”
몇 세기 전부터 기술과 돈을 들여왔다면 이를 보존해온 이는 분명 재력이 엄청난 사람일 터였다.
대대손손 명맥을 이으며 잘 살아온 가문일 가능성이 컸고 말이다.
“어쨌든 보존해온 이에게는 엄청난 가치나 의미를 가진 시계일 거라 생각하는 게 옳겠죠.”
그걸 내가 후려왔구만.
등 뒤로 한줄기 땀이 흘렀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나쁜 도둑놈이 된 기분이었다.
아 도둑놈은 아니지. 그냥 떨어진 거 주운 거니까.
명칭을 정정하며 넘겨받은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렸다.
누군가에게 많은 의미를 가져 몇 세기 동안 소중히 보관되어온 시계라고 생각하니.
도, 돌려줘야겠다.
런던에 가게 되면 깨끗하게 반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중시계가 황금색을 띠는 무기가 아닌 만큼 사라질 걱정이 없었고, 단서를 찾은 후엔 딱히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할 필요도 없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탐사실에서 자료를 가져올 겁니다.”
자료라는 말에 오? 하는 표정을 짓자 소피아가 미소를 지었다.
“대산에서도 잔다르크와 관련된 유물을 찾았던 적이 있어요.”
역시 갓산이야.
이거 또 뜻하지 않은 자료를 얻겠다는 생각에 입가로 미소가 그려졌다.
국가를 가리지 않고 손에 넣을 수 있는 유물을 최대한 찾아내고자 하는 기업, 대산.
유물을 닥치는 대로 흡입하는 탐욕스러운 돼지 기업이라고 욕했었던 과거의 나를 반성하는 순간이었다.
“어떤 유물이었나요?”
호다닥 노골적인 탐욕 미소를 지우고 질문을 건넸다.
“깃발이었어요. 잔다르크가 백년 전쟁 당시 항상 지니고 다녔다는 깃발이죠.”
“성모 마리아와 여호와의 깃발이군요.”
소피아가 말을 멈추고 놀란 얼굴로 날 바라봤다.
“헌터가 되기 전에 유물이나 역사 관련한 일을 하셨었나요? 뭔가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다 알고 계신 거 같아서요.”
“하하… 옛날에 유물을 접할 기회가 좀 있었습니다. 탐색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
“실패했어요. 역사에 나온 대로 불태워진 건지 실존한다는 흔적조차 찾지 못했고요.”
“그렇군요.”
역사엔 잔다르크와 관련된 모든 유품이 프랑스 대혁명 당시 불태워졌다고 쓰여 있었다.
아는 이름이 나와서 반갑긴 한데. 기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직 김칫국이긴 하나 회중시계가 잔다르크와 관련이 있어도 문제였다.
소피아의 말대로 대혁명 때 유물이 모조리 날아갔었으니.
내가 찾을 수 있는 게 남아있는지조차 미지수였다.
공명이 있어서 다행이긴 한데.
확실히 실체가 존재하는 무기를 찾는 것보단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 것 같았다.
“저희 자료 역시 탐색 때 세웠던 가설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요. 그래서 백운 님께 별 도움이 안 될 수도 있고요.”
“괜찮습니다! 그런 가설이 있고 없고 차이가 엄청나니까요.”
“아 그리고.”
소피아가 서랍을 열더니 작은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영롱하면서도 오묘한 색을 띠는 것이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진 주머니 같았다.
“회중시계는 여기에 보관하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웬만한 충격은 다 견뎌낼 거예요.”
“감사합니다.”
“백운 님이 걷는 길은 어째선지 항상 험난하니까요.”
“그, 그렇긴 하죠.”
호다닥 회중시계를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보고 있다 희미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여는 소피아.
“이제 어디에서 시계를 쫓으실 생각인가요?”
소피아의 질문에 나 역시 덩달아 미소를 그려 보이며.
“그리스로 가려고요. 거기에 척척박사 감정사가 있거든요.”
그리스 뒷골목에 있을 감정사 에밀리를 떠올렸다.
* * *
시간이 늦어 어둠이 깔린 그리스의 뒷골목.
오늘도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에밀리 앞으로 커다란 덩치의 남자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무슨 일이신지?”
고개를 든 에밀리가 주변을 둘러봤다.
앞에 있는 남자들이 전부는 아니었다.
골목에 있는 상인들을 덩치의 남자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감싸고 있었다.
“흐음.”
눈을 가늘게 뜬 에밀리가 남자를 올려다봤다.
목부터 귀 아래까지 뻗어있는 검은색 전갈 문신.
골목을 둘러싼 덩치들에게도 똑같은 문신이 있었다.
“물건을 보여주러 온 거 같지는 않고. 내게 바라는 거라도?”
“이곳에서 물건을 가장 잘 본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맞는데.”
“같이 좀 가주셔야겠습니다.”
이번 말엔 에밀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 보금자리는 이 뒷골목이라서 말이야. 용무가 있으면 나중에 물건 가지고 찾아와.”
싸늘하게 대꾸하고 눈을 내린 순간.
촤악!
“!!”
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에밀리의 시야로 붉은 핏방울이 흩뿌려졌다.
바로 옆에서 타로 운세를 보던 노인의 것이었다.
“부탁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능력 덕분에 살아 계신 거고요.”
스릉.
에밀리의 건너편 할머니의 목으로 칼이 드리워졌다.
할머니가 죽고 사는 건 에밀리에게 달렸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거 참 매너가 더러운 친구들이네.”
에밀리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혼자였다면 순순히 따라갈 생각이 없었으나.
굳이 죄 없는 골목 사람들까지 죽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한물간 나한테 뭘 시키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자고.”
짐을 챙겨 덩치들을 따라나서는 에밀리.
에밀리가 걸으며 눈이 마주치는 상인들에게 미소를 그려 보였다.
저벅.
그렇게 에밀리와 덩치 몇이 골목에서 사라지고.
남아있던 덩치 중 한 명이 울리는 전화를 받아 들었다.
“예. 예.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기 무섭게 빙글 몸을 돌리는 남자.
남자가 남은 덩치들에게 짤막한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처리하고 골목 묻어.”
* * *
띠리리리.
그리스 시내의 중심가.
울리는 전화에 이연화가 몰던 차를 멈춰 세웠다.
“네 이연화입니다.”
# 헌터 3팀입니다. 오늘 제보 들어온 곳에 도착했는데요.
말끝을 흐리는 헌터에 이연화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똑같나요?”
# 예.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자에 몸을 기댄 이연화가 머리를 긁적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철수하세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전화를 끊은 이연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작은 약 두 달 전부터였다.
그리스에서 묘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건 말이다.
“대체 누가 데몬을 잡고 있는 거지.”
그리스에서도 헌터의 역할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각지에서 발생하는 데몬을 최대한 빠르게 출동해 처치하는 것.
이연화와 대한민국 대사관 헌터들이 그리스에 도착해 끊임없이 해온 일이었다.
한국에 비해 치안이나 체계가 부족하다 보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었는데.
두 달 전부터는 갑자기 누군가 대신 데몬을 처리해주기 시작해 오히려 일손이 남고 있는 상황이었다.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보통이라면 감사해야 하는 일이 맞겠지만, 한 가지 찝찝한 점이 있었다.
그들이 처리한 데몬 시체를 하나도 남김없이 가져간다는 것이었다.
마치 목적이 데몬 처리 자체에 있다기보단 시체에 있다는 듯이 말이다.
- 좀 알아봐야겠어.
대사관 고위 간부들은 일손도 줄어들고 고마운 일이라고 말했지만.
김대혁의 생각은 달랐다.
이연화와 마찬가지로 정체 모를 단체가 데몬을 잡고 시체를 가져간다는 게 마음에 걸린 것이었다.
- 적어도 시체를 어디다 쓰는지는 알아내야지.
지금까지 데몬의 시체는 기관이 거둬들여 깔끔하게 소각했었다.
특수한 개체 중에 죽은 놈을 되살리거나 폭파시키는 놈이 발견된 이후 생긴 규정이었다.
‘무슨 사업이라도 하는 건가.’
이연화가 소름 끼친다는 표정으로 몸을 떨었다.
뭘 하든 데몬 시체를 이용한다고 생각하니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휙휙!
고개를 세차게 털어낸 이연화가 다시 시동을 걸었다.
‘나도 골목 갔다가 좀 가봐야겠다.’
이연화는 어젯밤 백운의 부탁을 받고 시내 뒷골목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감정받아야 하는 물건이 있는데 그곳에 에밀리란 감정사가 있는지 확인해 줄 수 있냐는 부탁이었다.
‘이번엔 뭘 찾으려는 걸까.’
차를 몰며 백운이 등장했던 영상들을 떠올렸다.
그리스를 떠난 후에도 하루가 멀다하고 영상에 등장했던 백운.
가는 곳마다 어쩜 그런 엄청난 사건에 휘말리는지 그것도 능력이란 생각이 들었다.
‘시체 실종만 아니면 내가 가이드 해줄 텐데.’
아쉬운 한숨을 내쉬고 잠시 후.
“응?”
차를 멈춰 세운 이연화가 미간을 찌푸렸다.
“잘못 온 건가.”
고개를 갸웃거린 이연화가 네비게이션을 재차 확인했다.
“아닌데.”
분명 제대로 왔음에도 뒷골목으로 향하는 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철컥.
차에서 내린 이연화가 능력을 이용해 높은 곳으로 올라섰다.
“허…? 뭐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풍경에 이연화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비볐다.
분명 큰 블럭을 가로지르는 뒷골목이 있었던 자리가 하얗게 매워져 있었다.
언제 그런 골목길이 있었냐는 듯이, 아주 깔끔하게 말이다.
“고, 골목 어디 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