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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왕이 헌터로 회귀했다-291화 (291/473)

291화. 마주치다

공항이라.

약간 꿀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얼마만에 와보는 건지 모르겠는 인천 국제공항.

칼데아가 생긴 이후 딱히 더 느린 비행기를 타고 다닐 일이 없어 방문하지 않았었다.

이거라도 말 들어야지.

오랜만인 공항 구경을 마치고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어디 가니.

대산에서 이것저것 정보를 얻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들려오는 목소리에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소름이 쫙 돋았었다.

오싹!

개, 개무서워.

지금 생각해도 무서운 순간이었다.

대낮이었음에도 어두운 그림자에서 나타났던 은갈치 비광과 기태랑.

둘은 묘한 미소를 띠며 뚜벅뚜벅 걸어왔었다.

밤이었으면 날개 꺼냈다. 진짜.

한 대 쥐어박히는 건가 걱정하던 것관 달리 두 사람은 잘 갔다 오라며 투박한 두부 봉다리 하나를 건넸었다.

처음엔 내가 무슨 감옥 갔다 온 것도 아니고 두부를 주지 싶었는데.

반짝.

그 안엔 최신형 핸드폰이 들어있었다.

21세기 인간답게 연락이 닿을만한 건 좀 가지고 다니라는 말과 함께였다.

잘 쓰겠습니다…!

그러면서 남긴 말이 제발 비행기 좀 타고 다니라는 것이었다.

칼데아는 특유의 기운과 화려한 생김새 덕분에 눈에 띄기 쉬우니 제가 무기왕입니다! 라고 광고하면서 다닐 게 아니면 자제하란 말이었다.

- 그거 국제 차원의 범죄야.

날개로 이 한 몸 슥삭 들어가는 거다 보니 걸릴 일은 별로 없겠으나.

혹여나 발각당했을 땐 상황이 복잡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기태랑은 이제 대한민국 소속 1급 헌터니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었다.

하긴 영국에서도 그 난리 났었으니.

깜빡 잠이 들어 에밀리아 얼굴에 손도장을 찍은 날.

그때도 잠깐은 수갑차고 질질 끌려갔었으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최대한 조심하자.

솔직히 너무 조심성 없었음을 인정하며.

발권을 위해 카운터로 걸음을 옮겼다.

급할 거도 없으니까.

쌍룡궁을 찾고 얼마 안 지났으니 조금 더 여유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한국항공입니다.”

“안녕하세요. 그리스 아테네로 가는 제일 빠른 비행기 부탁드려요.”

“세 시간 뒤 출발하는 비행기가 있습니다. 시간이 촉박한데 괜찮으신가요?”

“그걸로 부탁드립니다.”

“좌석은 어디로 하시겠습니까?”

“이….”

자연스럽게 이코노미라고 대답하려다 말을 멈추며.

아주 묵직하게 느껴지는 바지 주머니 안을 떠올렸다.

- 1급 헌터한테만 나오는 카드야. 활동비 하라고 준 거니까 엄한데 쓰지 말고.

엄한데라.

잠시 눈을 감으며 엄한 곳의 기준을 정립해보았다.

내 개인적인 용무로 가는 거긴 하지만 분명 그리스에도 데몬이 있을 터.

헌터라 함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안전을 위해 이바지해야 하는 존재이니 이것은 곧 공무 집행의 일환이라 볼 수 있었다.

“고객님?”

날 부르는 직원분에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빠스트 클래스로 부탁드립니다!”

* * *

돈이 좋긴 좋아.

남은 시간을 때우기 위해 들린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

입구부터 삐까번쩍한 것이 아주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음식도 맛있고.

벌써 몇 그릇째인지 모를 접시를 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깔아놓은 뷔페식이 아니었다.

말라 비틀어지기 쉬운 고기의 야들함이 살아있는 걸 보면 주기적으로 다시 굽는 모양이었다.

큰일이군. 맛을 알아버렸어.

끄덕이던 고개를 이번엔 절레절레 흔들었다.

애초에 몰랐으면 모를까 퍼스트의 맛을 봐버렸으니.

앞으로도 퍼스트가 아니면 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카드 압수당할 때까지만 타자.

이미 압수를 기정사실로 한 상태였기에 지금 눈에 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 다음 음식이나 집….

쨍!

“시…!”

귀를 때리는 날카로운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너무 놀라 하마터면 자연스럽게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괘, 괜찮으세요?”

집던 고기를 내려놓으며 옆에서 접시를 엎은 여자를 바라봤다.

검은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여자는 뭐에 그렇게 놀란 건지 얼굴이 허옇게 질려있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말이다.

“이사님! 괜찮으십니까!?”

나이도 나보다 조금 더 많아 보이는데 어디 높은 자리에 있는 모양이었다.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덩치 대여섯이 접시를 엎은 여자에게 달려왔다.

오자마자 나와 여자를 번갈아 보는 덩치들.

덩치 중 한 명이 날카로운 눈으로 날 쏘아봤다.

“당신 뭐야!?”

이 돼지가…?

난 가만히 고기님을 집고 있었을 뿐인데.

내가 여자한테 뭐라도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뭐라고 대꾸하려는 찰나.

꽈악.

“이, 이사님?”

덩치의 옷이 구겨질 정도로 세게 잡아당긴 여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서지 말고 자리에 가 있어.”

오씨.

조금 전엔 나도 모르게 쫄고 말았다.

욕을 하거나 한 건 아니지만 눈에서 흐르는 엄청난 독기.

독기를 정면으로 받아낸 덩치가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자리에서 대기하겠습니다!”

덩치들이 호다닥 사라진 후.

“직원들이 실례를 범했네요. 미안합니다.”

사과를 건네는 여자에 나도 고개를 꾸벅였다.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괜찮으신 거 맞죠? 얼굴이 좀… 많이 안 좋아 보여서요.”

“네 괜찮으니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사라지는 여자에.

어깨를 으쓱이며 잠시 멈췄던 고기 흡입을 시작했다.

* * *

한국항공의 퍼스트 클래스.

자리에 앉은 연수정이 고개를 비스듬히 들었다.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남자는 좌석 버튼을 이것저것 꾹꾹 눌러보고 있었다.

‘분명….!’

인상을 찌푸린 연수정이 조금 전 라운지에서 남자와 마주쳤던 걸 떠올렸다.

전세기는 눈에 띈다는 이유로 오랜만에 오른 일반 항공기.

별 볼 일 없는 라운지를 둘러보던 연수정은 소스라치게 놀랐었다.

온몸이 굳어 들고 있던 접시까지 떨어뜨릴 정도로 말이다.

- 마지막 남은 드론이 보내온 영상입니다.

대산을 향한 공격이 실패한 날.

하나 남은 드론은 영상을 보내왔었다.

완벽하다 생각하던 계획을 제대로 묵사발 내버린 영상 속의 남자.

남자를 가리고 있는 검은 연기와 비스듬한 각도 때문에 얼굴이 정면으로 보인 건 아니었지만, 연수정은 남자의 옆모습과 풍기는 분위기 만큼은 또렷이 기억했었다.

‘분위기는 완전 다르지만.’

영상 속에서 풍기던 압도적인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눈앞에 있는 건 평소에 생각이란 걸 잘 안 하고 사는 듯한 나사 풀린 남자였으나.

옆모습만큼은 확실히 똑같았다.

‘무기왕.’

이후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으로 대산에 등장했던 남자가 무기왕이란 걸 확인했었고 말이다.

저벅.

연수정이 흘끗거리길 한참.

이륙 전 인사를 위한 건지 사무장이 남자의 자리로 걸어갔다.

“안녕하십니까. 백운 님. 오늘도 저희 한국항공을 이용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대산의 VVIP 분을 모시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

사무장의 말에 눈이 커진 연수정이 입을 틀어막았다.

너무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배, 백운?!’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아이들을 납치해 장기를 공급하던 데몬 정혁이 당한 날.

월미도에 있었으나 공식 발표에서 이름이 빠지길 바랐던 10급 헌터였다.

“안녕하십니까. 이수연 이사님.”

연수정의 가명을 부르며 다가온 사무장에.

연수정이 손을 휙휙 저어 꺼지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 그럼 편안한 비행 되시길 바랍니다.”

당황한 사무장이 다음 자리로 넘어가고.

연수정이 식은땀을 흘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10급이 아니라 1급이었다고….? 거기다 무기왕이었고?’

머리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무기왕이 백운이라면.’

당시 월미도 사건은 결국 흐지부지한 상태로 종결 났었다.

대체 정혁과 수백 기의 인형은 누가 해치웠는지 알지 못한 채로 말이다.

- 10급 헌터는 제외하죠.

당시엔 10급 헌터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었다.

10급따리가 정혁을 잡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그저 어쩌다 끼어든 잡어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으득.

연수정이 자신의 안일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월미도가 털렸을 당시엔 무기왕도 10급이었다.

어째서 이 둘 사이의 연관성을 의심하지 못했던 걸까.

‘저놈이었구나…!’

연수정의 머릿속에서 흩어졌던 퍼즐이 하나씩 맞춰지고 있었다.

‘대산 공격 때 나타났다는 건.’

뜬금없이 나타나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걸 넘어 밥상 자체를 엎어버렸던 무기왕 백운.

지나가다 들르진 않았을 테니 분명 이전부터 대산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히메지 성과 히무라도 저놈이다.’

연수정이 손가락을 깨물었다.

히무라와 시노카 암살대를 하룻밤 사이에 보내버린 정체불명의 괴물.

대산 사건 이후 그 괴물의 정체가 무기왕이 아닐까 의심하긴 했었다.

지금은 그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며 머리가 지끈거리는 건 물론 오한마저 들고 있었고 말이다.

“후우우…!”

몇 번의 심호흡으로 가슴을 쓸어내린 연수정이 백운을 노려봤다.

‘그리스는 어째서…?’

여기서 마주친 것만 해도 이미 과한 우연의 장난이었다.

그리스에서마저 마주칠 일은 없겠지만 지금까지 당한 게 있어서인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까득. 까득…. 으드득.

손톱을 물어뜯던 연수정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하고 싶은 건 전부 자기 뜻대로 해온 연수정이었다.

저딴 인간 하나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초조해져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분하고 화가 났다.

‘앞으로도 계속 불안하겠지.’

대산 공격 실패 이후.

남자의 옆모습은 연수정의 밤잠을 설치게 만들었었다.

언제 또 나타나 자신을 방해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

생각을 마친 연수정의 눈으로 서늘한 예기가 어렸다.

‘죽이자.’

평생 피해 다니고 불안해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안 그래도 대산의 끈질긴 추적으로 몸을 바짝 낮추고 있는 상황.

저런 커다란 불안 요소를 계속 놔뒀다간 이 둘이 합쳐져 더 커다란 곤경에 처할 수도 있었다.

‘이번 그리스에서.’

눈가에 핏대를 세운 연수정이 백운을 노려봤다.

‘어떻게든 죽인다.’

* * *

“끄어어어어어!”

뿌드드드득!

기지개를 쭉 켜자 뼈마디에서 시원한 소리가 들려왔다.

“개운하구먼.”

다시 한번 돈의 힘이 느껴졌다.

15시간의 비행이면 보통 초죽음이 돼서 내리기 마련인데.

맛있는 위스키를 들이켜며 풀잠을 때렸더니 이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백운 님!”

반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손을 흔들고 있는 이연화가 보였다.

“오! 연화 님!”

반갑게 손을 흔들며 걸어가자 이연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짐은요?”

“그런 건 없습니다.”

“네…?”

주머니의 묵직한 카드의 감촉을 느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리스풍으로 다 살 거거든요!”

“어… 네.”

잠시 꿀멍한 얼굴로 날 바라보다 고개를 휙휙 흔드는 이연화.

이연화가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입을 열었다.

“백운 님이 말씀하셨던 골목 가봤는데요.”

그리스로 오기 전 이연화에게 간단한 부탁을 했었다.

시간이 나면 골목에 에밀리란 상인이 있나 찾아봐 달란 것이었다.

스윽.

이연화가 내민 핸드폰을 바라봤다.

화면으로 띄워져 있는 한 장의 사진.

응…?

핸드폰을 넘겨받으며 눈을 크게 떴다.

“어, 어디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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