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사라진 에밀리
이연화가 건넨 사진을 보고 도착한 골목길.
뭐야 시발.
앞을 제대로 가로막은 벽을 만지작거렸다.
두 눈으로 보고 만지고 있으면서도 쉽사리 믿기지가 않았다.
멀쩡하게 있던 뒷골목이 이렇게 깔끔하게 사라져 버리다니.
“제가 위치를 헷갈린 건 아니죠?”
조심스럽게 묻는 이연화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여기가 맞아요.”
이곳엔 멀리서 봐도 음습하고 어둑어둑한 골목길이 있어야 정상이었다.
깔끔하게 메워진 벽이 아니고 말이다.
스윽.
플래시를 켜 벽 전체를 살피기 시작했다.
새로 만들어진 벽이라면 약간이라도 다른 점이 있을 터였다.
“똑같네요.”
“그러게요.”
손으로 만져본 질감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있었을 벽에서 쭉 따라 만졌음에도 약간의 이질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이곳에 원래 있었던 벽인 것처럼 세월의 흔적으로 생긴 패임과 굴곡까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날이 밝으면 다시 올까요?”
조심스럽게 묻는 이연화에 잠시 고민을 하다 나 또한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연화 님.”
“네?”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보는 이연화에 손가락으로 벽을 가리켰다.
“이거 부숴보면 안 되나요?”
“….”
괜한 말을 했나.
찰나의 순간이지만 이연화의 얼굴로 스치는 당혹스러움을 엿볼 수 있었다.
이 새끼가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린가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무식하게 막 때려 부수는 건 절대 아니고요. 손으로 조금씩 파보려고요. 팥빙수 먹듯이.”
“판다고요…? 무슨 굴착기도 아니면서 어떻게 시멘트를 파요?”
그런 걱정은 넣어두라는 제스쳐를 취해준 후.
반짝이는 눈으로 다시 이연화를 바라봤다.
한국 대사관의 관할인 만큼 최대한 허락을 구할 생각이었다.
“그럼 조용히 조금만 파볼까요.”
잠시 고민하던 이연화가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과 함께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 때문인지 약간의 기대가 엿보이는 얼굴이었다.
“넵!”
신이 난 얼굴로 골목길이 있었을 벽으로 손을 뻗었다.
원래 있던 엄한 곳은 건들지 않고 최대한 핀포인트로 조질 생각이었다.
“그런데 벽을 어떻게 판….”
드드득.
“허.”
옆에서 들리는 탄성을 뒤로하고.
손에 힘을 줘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마음 같아선 수리검을 꺼내 시원하게 부숴버리고 싶었으나 한밤중에 사람들 잠을 다 깨울 생각은 없었다.
“이거 좀 무섭네요. 두더지 굴에 손을 넣는 기분이랄까.”
어느새 팔은 팔꿈치를 넘어 어깨 부근까지 벽으로 들어가 있었다.
어깨 끝에 닿으면 한 번 쑤욱 파낼 생각이었다.
“어… 와우.”
입을 벌리고 있던 이연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원래도 놀라운 인간이었으나 이젠 하다 하다 맨손으로 벽을 파냐는 얼굴이었다.
“안에서 갑자기 뭐가 물면 너무 놀랄 거 같은데. 그러진 않겠….”
콱.
“기아아아아아악!!”
손끝에 닿은 무언가에 깊숙이 들어가 있던 팔을 호다닥 빼냈다.
잘은 모르겠지만 분명 이빨과 비슷한 질감이었다.
“왜, 왜 그래요?! 심장 떨어질 뻔했잖아요.”
이연화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벽 파다 말고 비명과 함께 발라당 나자빠지니 옆에서 덩달아 놀란 것이었다.
“안에 뭔가 있어요.”
몸을 일으키며 마른침을 삼켰다.
“후욱! 후욱!”
몇 번인가 심호흡하고 핸드폰 플래시를 켠 채 벽으로 다가갔다.
튀어나오지만 말아라.
만약 구멍을 통해 무언가 튀어나온다면 그땐 참지 않을 생각이었다.
너무 무서우니 곧바로 리볼버를 꺼내 구멍 안을 쓸어버리리라.
스윽.
플래시로 벽 안으로 비추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서서히 밝아지는 팔 크기의 구멍 통로.
그리고 플래시가 통로의 끝에 도달하기 무섭게 내가 만졌던 무언가의 정체가 드러났다.
시, 시발.
마른침을 한 번 넘기며 목소리를 진정시킨 후 입을 열었다.
“연화 님.”
“네…?”
구멍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사람들 좀 불러야 할 거 같아요.”
손끝으로 잘못 느낀 게 아니었다.
안으로 향한 플래시는 짓이겨진 누군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 * *
아테네의 도심 어딘가.
어둑한 건물 안에서 자욱한 담배 연기가 뿜어졌다.
“모한 님. 뒷골목이 발각됐습니다. 한국 대사관 쪽 인원들이 벽을 파헤치고 있다고 합니다.”
“허…?”
연기를 뿜어내던 덩치의 남자 모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끝까지 지켜질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벽이 생겨났으니 당연히 의심하는 사람이 생길 터.
그렇다 하더라도 깔끔하게 벽이 생긴 만큼 쉽사리 파헤치거나 하진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 그냥 내버려 둬.”
모한이 거만한 얼굴로 몸을 기대었다.
생각보다 일찍 발견된 게 놀랍긴 했으나 거기까지였다.
그 안에서 뭘 발견하든 그것들이 모한과 조직에게 닿을 일은 없었다.
단 하나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처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설령 한국 대사관 나부랭이들이 우릴 포착한다 한들.”
입가로 미소 지은 모한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다는 얼굴이었다.
“우릴 건드리는 건 불가능해. 그러니까.”
모한이 여유롭게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저놈들 삽질하거나 구경하면서 다음 명령 기다리자고.”
* * *
다리를 덜덜 떨며 공항으로 들어오는 비행기를 바라봤다.
부디 저 비행기이길 바라면서 말이다.
연화 님한테 미안하네.
골목길 벽에서 나온 시체들로 관할인 이연화는 밤을 꼬박 지새우고 있었다.
팀장인 김대혁도 다른 용무로 자리를 비운 상태라 이연화가 현장을 지휘하고 있는 탓이었다.
그나저나 어떤 새끼들이지.
벽에서 나온 시체는 한두 구가 아니었다.
눈으로 슥 세어봐도 스무 구가 넘었던 시체.
뒷골목에 있던 사람들이 모조리 살해당한 것이었다.
에밀리 님은 없었어.
불행 중 다행으로 죽은 이 중에 에밀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었다.
우연히 자리에 없었던 건지, 아니면 어딘가로 끌려간 건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 증거 찾기가 쉽지 않을 거 같아요.
벽을 모두 거둬낸 후 이연화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었다.
전문적인 인원의 소행인지 현장이 너무 깔끔하단 것이었다.
시멘트로 덮어지며 작은 증거가 남았었더라도 오염됐을 가능성이 컸고 말이다.
- 잠시만요.
이연화의 말을 듣기 무섭게 새로 받은 핸드폰을 열어 재꼈었다.
그리고 인천 지부로 지원을 요청했었다.
아무런 증거가 없더라도 일주일이 지나지 않았다면 흔적을 찾아낼 수 있는 전문가를 초빙하기 위해서였다.
“청아 님!”
쳐다보던 비행기가 착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전한 깔끔한 단발을 찰랑대며 이청아가 모습을 나타냈다.
“백운 님!”
이청아는 반갑게 인사하면서도 약간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 기다려보라고 해
기태랑에게 다른 지부로 협조 요청하는 법을 듣고 있을 때.
옆에서 걸걸한 강태황의 목소리가 들려왔었다.
정확히 3분 뒤엔 몇 시에 아테네 공항에서 기다리라는 답이 들려왔고 말이다.
여, 역시 짱 멋있는 할아버지야.
아마 강태황의 직구 오더가 인천 지부로 떨어졌을 테니.
정작 당사자인 이청아는 어어어 하는 사이 비행기에 태워졌을 것이었다.
“죄송해요. 청아 님. 놀라셨죠?”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지만.”
이청아가 개운한 얼굴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백운 님 덕분에 제가 퍼스트 클래스도 다 타봤네요! 15시간 타고 왔는데도 안 피곤하다니.”
“편하게 오셨다니 다행이네요!”
한두 마디 더 인사를 주고받고 시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흔적을 찾아야 한다고 들었어요.”
“네. 그런데 그… 오는 길에 들으셨겠지만 끔찍한 장면을 보셔야 해요.”
이청아가 걱정말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 알고 오케이 한 건데요. 지금까지 워낙 많은 현장을 봐오기도 했고요.”
공항 밖으로 나오며 이연화가 준비해준 차로 올라탔다.
“골목에서 스무 명이 넘게 죽었어요. 무슨 능력을 가진 놈인지 순식간에 현장을 시멘트로 덮었었고요.”
차에서 내가 알고 있는 현장을 설명해주었다.
끔찍한 걸 볼 땐 보더라도 최대한 상세히 아는 상태로 보는 게 충격이 덜할 것 같았다.
“죽은 분들이 사용하던 물건은 남아있나요?”
“네. 증거가 될 거라고 생각 못 했는지 다 그대로였어요. 시멘트 때문에 조금씩 훼손되긴 했지만요. 오랫동안 사용하던 물건들일 거예요. 그리고.”
내 기억이 나는 만큼 에밀리의 생김새에 관해 이청아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살인 사건과는 별개로 내가 찾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과 함께였다.
“네. 그분도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봐볼게요.”
“감사합니다!”
끼익.
말을 주고받는 사이 도착한 현장.
차에서 내리니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작업 중인 인원들이 보였다.
휙휙!
손을 흔들자 빠르게 걸어온 이연화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이연화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청아입니다.”
인사를 마친 이연화가 나와 이청아를 한쪽으로 안내했다.
“백운 님이 말씀하신 대로 피해자들이 사용했을 물건들을 모아놨어요.”
“고맙습니다! 청아 님이 물건을 살펴봐 주실 거예요.”
우리가 도착하자 비켜주는 대사관 직원들에.
약간 긴장한 듯한 이청아가 물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작할게요.”
눈을 감은 이청아의 손끝으로 푸른빛이 일렁이고.
꽤 오랜 시간 미간을 찌푸린 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이청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끔찍하네요.”
이청아의 첫마디에 마른침을 삼켰다.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걸로 보아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 모양이었다.
“아무 반항도 하지 않았는데 죽였어요.”
잠시 말을 멈춘 채 무언가를 본 이청아가 말을 이었다.
“백운 님이 말씀하셨던 에밀리란 분이요. 그분도 여기에 계셨어요.”
“…!”
“물건의 기억이 닿는 범위에서 그분은 무사했어요. 어딘가로 끌려간 거 같아요. 그전에 뭔가 대화를 나눴는데 잘 들리지 않아서 모르겠네요. 바닥으로 피가 뿌려지고 일어난 걸 보니 협박당한 거 같아요.”
쯧.
내심 사건이 일어났을 때 골목에 없었기를 바랐는데.
무언가의 이유로 에밀리는 놈들에게 끌려간 것 같았다.
감정 능력 때문인가.
왜 뒷골목에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뛰어났던 감정 능력.
널리 알려지면 분명 탐내는 자가 있을 만한 능력이었다.
“혹시 어떤 놈들 짓인지도 보이나요?”
“네 잠시만요. 일단 꽤 다수가 있었어요. 하나같이 덩치가 커다랗고요.”
일단 도야지고.
“그리고… 잘 안 보이는데 음.”
앓는 소리와 함께 집중하던 이청아가 입을 열었다.
“전갈.”
조용히 바라보고 있자 이청아가 감았던 눈을 떴다.
“목에서 귀 아래까지 검은색 전갈 문신이 그려져 있어요. 보인 건 한 명뿐이라 전부 다 문신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오케이.”
인물을 특정 지을 수 있는 증거를 듣고 몸을 일으켰다.
“전갈 문신 도야지.”
다시 한번 범인의 특징을 되새기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전·문·도, 딱 기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