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전문도 발견
대한민국 북한산의 정상.
신고를 받고 달려온 지역 헌터들이 두 눈을 의심했다.
“기, 기태랑 님 아니야?”
“비광 님도 있어…!”
대형 개체가 출몰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정상에 데몬은 없었다.
단지 방금까지 있었을 데몬의 피를 흠뻑 뒤집어쓴 기태랑과 비광이 태연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무슨 전쟁이라도 나는 거야? 어떻게 1급이 한 자리에 두 명씩이나 와있지.”
“대장님, 여기 위험한 거 아닌가요? 1급이 와있는 곳에 저희 같은 쩌리가 있으면 안 되잖아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기태랑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나만 온다고 했잖아.”
그런 기태랑을 보며 짜증스러운 얼굴로 옷을 털던 비광이 웃음을 터뜨렸다.
“가만히 앉아 있기 좀이 쑤시는데 어떡해. 이런 거라도 나눠해야지. 요새 무슨 감찰 기간이라고 카지노도 못 가게 하고.”
딱히 1급이 나설만한 현장이 없어 몹시 지루하던 찰나.
마침 대형 개체가 출현했다고 하여 가까이에 있던 두 사람이 곧장 출발했던 것이다.
의아해하는 사람들에게 1급 두 명이 워낙 잉여해서 온 거라고 말할 순 없는 노릇이었지만 말이다.
“아 맞다. 백운한테 그거 말해줬어?”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비광이 기태랑에게 묻자.
옷에서 피를 털어내던 기태랑이 움찔거리며 움직임을 멈췄다.
“아니. 난 안 해줬는데. 네가 해주는 줄 알았지.”
“무슨 소리야. 당연히 사수인 네가 해줘야지.”
“네가 사수 아니었어? 돌산에서도 많이 케어해 줬잖아.”
“아니지. 네가 사수지. 난 그냥 놀러 간 거니까.”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던 두 사람 사이로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서로에게 떠밀고 있긴 했으나 상대가 백운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아.”
“하아.”
동시에 한숨을 내쉰 두 사람이 동시에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약간 망설여지더라고.”
“나도.”
머리를 긁적인 기태랑이 말을 이었다.
“지금도 돌발성 1위인 녀석인데 이걸 알게 되었다간.”
기태랑이 약간 뜸을 들이자 비광이 아찔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더 당당하게, 거리낌 없이 더 엄청난 짓을 할 거 같단 말이지.”
여기까지 말한 두 사람이 약간의 웃음을 터뜨리더니 산 아래쪽으로 몸을 빙글 돌렸다.
“때 되면 알게 되겠지. 하하.”
“그, 그렇지. 뭐 계속 몰라도 나쁠 건 없고. 하하.”
* * *
으적!
그리스 전통 음식인 수블라끼를 한 입 뜯으며 턱을 괬다.
전문도 이 도야지 새끼들 어디에 박혀 있으려나.
이청아에게 전문도의 생김새를 들은 후 바쁘게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녔었다.
길거리 상인이나 뒷골목 전과자 등 대상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 보, 본 적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비슷하게 생긴 사람은 물론 전갈을 닮은 문신조차 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었다.
분명히 본 거 같은데.
묻자마자 화들짝 놀라는 모습에서 바로 알 수 있었다.
본 적이 있음에도 겁에 질려 말하지 않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말을 함으로써 뒤에 생길 복수나 후환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거대한 놈들이라는 건가.
더 물어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아 슬쩍 이청아에게 능력을 사용하게 했었다.
아쉽게도 기억을 볼 수 있는 시일 내에선 전문도가 등장하지 않았었고 말이다.
연화 님은 언제 오려나.
건너편에 먹다 만 수블라끼를 바라봤다.
잘 구워진 수블라끼를 제대로 다 뜯기도 전에 이연화는 걸려온 전화를 받고 급하게 달려나갔었다.
데몬 시체를 훔쳐가는 놈들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전화였다.
따라갈 걸 그랬나.
워낙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급히 달려나간 이연화였기에.
괜히 따라가서 신경 쓰이게 할까 봐 기다리겠다고 말했었다.
멀지 않은 곳이니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을 해주기로 했었고 말이다.
우우웅.
“오?”
마지막 고기 한 점을 집어먹으려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이연화로부터 도착한 메시지.
# 전갈 문신을 찾았어요.
“!?”
좋았어! 하며 주먹을 움켜쥔 순간.
아래로 하나의 메시지가 더 도착했다.
#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전갈 문신을 못 데려갈 거 같아요.
“발견했는데 못 데려오는 상황이라.”
짧은 메시지가 두 개 오고 끝난 걸 보니 아마 상황은 현재진행형일 것 같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
테이블 위에 돈을 올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순순히 오지 않겠다면 다른 방법이 없을 듯했다.
내가 가서 데려와야겠구만.
* * *
그리스 시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공터.
인상을 찌푸린 이연화가 정면에 늘어선 덩치들을 응시했다.
‘시체 도둑과 같은 놈들이었을 줄은.’
평소와 달리 오늘은 데몬의 등장을 대사관이 미리 알아챘었다.
도착 후 바로 나서지 않고 숨어있자 전갈 문신을 한 남자들이 도착했었고 말이다.
- 멈추시죠.
한 번에 원하던 타깃을 잡았다는 생각에 이연화는 동료 헌터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었다.
불법 데몬 시체 수거 및 골목길 살인 협의로 체포한다는 말과 함께였다.
- 피식.
이연화와 헌터들이 등장하자 덩치들은 의외의 반응을 나타냈었다.
당황하거나 도망치는 게 아닌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조소를 띤 것이었다.
데려갈 수 있다면 데려가 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흘린 건 물론이었다.
“제 말 이해하셨습니까? 이연화 헌터님.”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의 남자, 오진우가 도착했었다.
깔끔한 정장 차림에 재수 없는 간잽이 안경을 쓴 오진우는 자신을 한국과 그리스의 외교 총괄이라고 소개했다.
“이해 못 하겠는데요. 결정적인 증거가 있는 살인 혐의자를 데려갈 수 없다뇨.”
“하아.”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쉰 오진우가 한 발자국 비켜서며 덩치들을 가리켰다.
“이분들은 정당하게 외교관 자격을 갖추신 분들이라 이겁니다. 아무나 받을 수 있는 어중이떠중이 외교권이 아닌, 각 기업과 나라에서 특별 대우를 약속한 VIP 외교관요! 당신들이 대사관 직원이든 뭐든 VIP 면책권을 가진 이분들을 연행할 권한이 없다는 겁니다.”
“어이 공무원 나부랭이. 우릴 데려가고 싶으면 한국이랑 그리스로부터 영장을 받아오라고. 쌩쑈를 해도 못 받겠지만 말이야.”
오진우 뒤에 있던 모한이 이연화를 비꼬자 사방에서 비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득.
이연화가 입술을 깨물며 모한과 오진우를 노려봤다.
나부랭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현재 상황이 몹시 짜증났다.
‘대체 어느 수준에서 보호를 받고 있는 거야.’
저들의 말대로 국가에 요청을 해봐야 먹히지 않을 게 뻔했다.
해주더라도 시간을 질질 끌다가 모든 상황이 끝나고 나서야 해줄 터.
대사관과 그리스의 모든 법을 어길 게 아니라면 당장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끼이익.
그렇다고 이대로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멈춘 차의 뒷좌석에서 조금 전 연락했던 백운과 이청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청아 님. 저 돼지들 맞아요?”
조용히 묻자 이청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간잽이 안경 뒤에 있는 남자에요. 목소리도 똑같아요.”
“좋았어. 저 돼지 새끼란 말이죠.”
“뭘 그렇게 속닥이는 거죠? 당신들이 지금 그럴 수 있는 위치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몇 번인가 속닥이고 있자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자 불만 가득한 오진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저 고등어 같은 새끼가 아까부터.
아주 시건방진 놈이었다.
내가 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오진우는 조소를 터뜨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었다.
- 쭉정이란 쭉정이는 다 오는구만.
대놓고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스윽.
이번엔 이연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방법이 딱히 없는 거죠?”
이연화는 지금 당장은 전문도 놈들을 끌고 갈 수가 없다고 말했다.
외교권이고 면책권이고 복잡한 법과 권한이 얽혀있다는 설명이었다.
“네…. 보통 놈들이 아닌 거 같아요. 대사관에 확인해보니 합법한 외교권이었어요.”
저들의 말이 허풍이 아니란 걸 확인하자 이연화는 풀이 잔뜩 죽은 모습이었다.
그런 이연화에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뭐 그럼 어쩔 수 없죠.”
“네…?”
“공식적으로 잡아갈 수 없으면 나중에 밤에 납치하거나 하면 되지.”
“나, 납치요?”
말을 주고 받는 우리를 조용히 쳐다보고 있던 모한이 입을 열었다.
“지금 태양과 법 아래에 있다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 그래도 너네는 죽지 않았잖아. 누구처럼. 지금이 밤이었고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었으면 너넨 다 죽었어.”
“킬킬킬… 대장님. 그러다 저놈들 오줌 지리면 어떡합니까. 그냥 놔두시죠. 어차피 아무것도 못 할 텐데.”
응 마음껏 떠들어. 조금 있다 데려와서 개팰거야.
그렇게 몇 번의 비아냥거림을 한 귀로 흘려듣고 있을 때.
안경을 치켜올린 오진우가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럼 더 할 말 없는 걸로 알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날 쳐다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워낙 당당하게 나타나길래 1급 헌터라도 되는 줄 알고 쫄았네.”
계속 떠들… 응?
들으라고 한 소리에 귀가 번쩍 뜨였다.
1급 헌터?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연화 쪽으로 몸을 숙였다.
“연화 님. 혹시 1급 헌터면 뭐 있나요? 권한이나 그런 거 관련된 것들. 면책권 무시하고 조패도 상관없다든지.”
“음… 글쎄요. 제가 알고 있는 건 없는데요. 잠시만요.”
한 번 알아보겠다며 대사관으로 전화를 거는 이연화.
한참 동안 이야기를 주고 받던 이연화가.
“!!”
무언가에 놀라며 화면에 띄운 문서를 내게 보여줬다.
누구 보라고 써놓은 건지 권한 관련 문서 끝에 아주 작게 적혀진 부분이었다.
“추가된 지 얼마 안 된 거 같아요.”
밝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저벅.
거침없이 떠날 준비를 하는 돼지들과 오진우에게 다가갔다.
빠르게 걸어가자 고개를 갸웃거리던 전문도와 오진우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뭐야?”
“당신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해 봐.”
척.
오진우의 말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그들이 가야 하는 길목에 멈춰 섰다.
내 정면엔 그중에서도 덩치가 제일 커다란 모한이 서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미쳤어?”
“비켜 이 쭉정이 새끼야.”
자신들의 대장 앞을 가로막자 전문도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죽탱이 날아가야 정신 차릴래?”
“죽여버릴까 확?”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을 씹으며 모한을 쳐다보고 있길 잠시.
어이없는 듯 조소를 띤 모한이 내 몸으로 손을 뻗었다.
“비켜. 진짜 죽기 전에.”
툭.
“아야!”
비켜서게 하려는 가벼운 손짓이었으나.
옆으로 철푸덕 몸을 쓰러뜨렸다.
“…?”
순간 벙찐 오진우와 전문도가 날 내려다봤다.
“너 뭐하냐?”
때마침 물어와 주는 모한에.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입을 열었다.
“외교 조항 142조 3항.”
“뭐…?”
“외교 조약이 체결된 국가 간 적용되는 항목으로 각 국가가 공식으로 선발한 1급 헌터는 자신의 안전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판단할 시 자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 새끼 지금 뭐라는 거야?”
거들먹거리는 놈들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이는 각국 정상급을 제외, 나머지 모든 외교권보다 우선적으로 수행된다.”
필요한 설명을 다 읊어 주고 고개를 들며.
“대한민국 소속 1급 헌터 백운.”
입가로 미소를 그렸다.
“지금부터 안전을 위협하는 선제공격에 대한.”
뚜둑.
“자주권을 행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