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역작 우카론
역시 열려라 참깨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정면을 바라봤다.
수리검이 닿은 곳을 중심으로 금이 가더니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바위벽.
무너지는 바위 잔해 사이사이로 보이고 있었다.
안쪽으로 향하는 어둡고 깊은 통로가 말이다.
첫인상이 영 좋지 않은 통론데.
바위의 무너짐이 끝나길 기다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안에선 서늘하면서도 음습한 공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했다면 굳이 들어가지 않았을 기분 나쁜 찐득함도 함께였다.
안에 뭐가 있으려나.
보통 만화에서도 이런 깊은 던전엔 의외의 복병이 있기 마련이었다.
지금 느껴지는 거나 놈들이 데몬 시체를 수거한다는 걸 봤을 때 안에 뭔가 있어도 있을 거 같긴 했고 말이다.
쿠아아아아…!
어느새 균열과 진동을 끝낸 바위벽.
앞에 쌓인 잔해로 손을 뻗어 몇 번 거둬내자 사람이 지나다닐 만한 공간이 확보되었다.
열쇠공 완벽했고.
“그럼 가시…죠?”
흡족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자 벙찐 이연화와 헌터들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이 통로가 아닌 나에게 향하고 있는 걸 봐선 약간 어이를 상실한 것 같았다.
“드, 들어가죠.”
너무 무식하게 열어 재꼈나 싶은 사이.
입을 연 이연화에 헌터들이 대열을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갖춘 장비 위에 검이나 방패 등 저마다의 마크가 새겨진 걸 봐선 역할별로 조가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가볼까.
대열의 중간 지점에서 움직이는 이연화에 맞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음 같아선 면도칼을 꺼내 혼자 냅다 달려가고 싶었지만.
대체 몇 갈래야 이거.
통로 안쪽의 길은 한 갈래로 쭉 이어져 있지 않았다.
무턱대고 뛰어들어갔다간 목적지에 도달하긴커녕 지금의 장소로 돌아오지도 못할 것 같았다.
다 부숴버릴 수도 없고.
이연화와 헌터들을 떠나 에밀리 역시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여기저기 부쉈다가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곤란한 상황.
일단은 이연화와 함께 온 탐지 헌터의 뒤를 따라가는 게 최선일 것 같았다.
“이게 끝은 아닌 거 같습니다.”
다섯 갈래의 길 앞에서 안쪽을 탐지한 헌터가 고개를 흔들었다.
“갈래 길 안에 또 갈래 길이 있습니다. 계속 이런 구조일 거 같고요.”
“길 찾는 건 가능할까요?”
“예. 이용 흔적이 가장 많은 길로 안내하겠습니다. 적들도 중심부로 도달하는 길을 가장 많이 사용했을 테니까요.”
“네. 부탁드릴게요.”
저벅.
천천히 나아가는 헌터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정말 기분 나쁜 공기네요.”
“동감이에요.”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이연화에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찐득하고 서늘한 공기가 강해지고 있었다.
안에서 대체 뭘 한 건지 화약 약품 냄새와 묘한 악취도 강해지는 중이었고 말이다.
“뭘 하는 시설인지는 몰라도 느낌이 안 좋네요.”
이연화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걸 서슴지 않으며 큰 힘을 업고 데몬의 시체를 수거해간 수수께끼의 조직.
뭘 하고 있든 스케일이 예상을 뛰어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삭.
“…?”
천천히 걷고 있을 때 귓가로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작았지만 무언가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였다.
벌레 같은 건가.
아주 가볍고 재빠른 건지 드문드문 끊어지는 소리에 집중하다.
삭.
“!!”
[잭 더 리퍼 - 면도칼]
어느새 가까워진 소리에 면도칼을 꺼내 앞쪽으로 빠르게 도약했다.
“백운 님…?”
뒤에서 이연화의 의아해하는 목소리가 들리고.
내 몸이 선두에 섰던 탐지 헌터를 지나치기 무섭게.
스아아아아악!
어두운 통로 위쪽에서 날카롭고 두터운 갈고리가 뻗어져 나왔다.
카앙!
탐지 헌터의 목으로 날아들던 갈고리를 튕겨내고 윗쪽을 응시했다.
천장 쪽에도 통로가 있는 건지 위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갈고리의 주인.
“시….”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욕을 할 뻔했다.
통로를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한 몸집을 가진 데몬.
전체적인 생김새는 거미였으나 저걸 거미 계열 데몬이라고 부르기엔 꽤 무리가 있었다.
몹시 흉악스럽고 계속 쳐다보고 있기 곤란한 생김새였다.
무슨 짓을 한 거야.
군데군데가 누더기처럼 기워진 데몬은 다양한 부위를 합쳐 만들어낸 새로운 창조물 같았다.
어울리지 않는 갈고리가 은은한 빛을 띠고 있는 걸로 보아 금속 재질로 된 걸 억지로 끼워 넣은 듯했고 말이다.
그래서 면도칼에 안 날아갔구만.
뜬금없었던 마찰음의 정체를 발견하고 잠시 후.
사사사사사삭.
귓가로 조금 전 들었던 것과 똑같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꽤 많은 숫자였다.
“몰려오고 있어요.”
말을 건네자 고개를 끄덕인 이연화가 능력을 발동하고.
“전원 전투 준비.”
울려 퍼진 목소리의 메아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키아아아아아!”
정면으로 수십 마리의 거미 데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안 좋은 예감은 빗나가질 않는구나.’
연구소에서 멀리 떨어진 차 안.
모니터를 바라보던 연수정이 손톱을 깨물었다.
‘무기왕 백운.’
연수정의 눈은 연구소에 도달한 백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스에서도 분명 자신을 방해할 거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백운이 며칠 지나지도 않아 손수 보여주고 있었다.
‘어떻게 찾은 거지.’
뜬금없이 은폐용 바위 지형이 무너졌을 땐 큰 지진이라도 난 줄 알았었다.
지금까지 완벽히 숨겨온 시설이었기에 누군가에게 발견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정말…. 거슬리는 인간이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 다음엔 어떻게 행동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인간.
그러면서도 가져오는 결과는 항상 상상을 초월해 입이 벌어지게 만드는 인간.
연수정이 가장 싫어하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여기서 없애야 해.’
무기왕이 말도 안 되게 강하다는 것쯤은 연수정도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 전원이 아는 사실이니 그녀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단지.
그것과는 별개로 어떻게든 없애야 하는 존재였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연수정이 하는 모든 일을 뒤엎고 망쳐버릴 터였다.
‘조직 쪽엔 안 알리는 게 낫다.’
안 그래도 제 몸 사리기 바쁜 겁쟁이들만 우글우글 모인 곳이었다.
무기왕이란 존재가 지금까지 방해받은 모든 일의 중심에 있었다는 걸 알아차리기라도 한다면.
패닉에 빠져 너나 할 것 없이 가장 먼저 발을 빼려 할 터였다.
스윽.
연수정이 다른 쪽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이근철 박사가 우카론의 관으로 최종 병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장소였다.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거야.’
가득 채워진 불길한 초록빛 덕에 카메라는 여전히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젠 뿜어질 만큼 나온 건지 빛은 서서히 줄어드는 중이었지만 말이다.
# 끄아아아아악!!
“…?”
연수정이 대체 언제쯤 보이는 건가 짜증내고 있을 때.
카메라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왔다.
# 쩌저저적!
# 콰아아앙!
# 으… 으아아악! 살려… 쩍!
# 으직!
연수정이 모니터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저곳에서의 일이 무언가 잘못됐고, 화면 너머의 상황은 아주 끔찍할 거란 사실을 말이다.
# 콰아아아아아아!
다시 한번 커다란 굉음이 들려오고 어느 정도 빛이 걷히자.
“!!”
끔찍한 비명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카메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싱긋.
연수정의 입가로 소름 끼치는 미소가 그려졌다.
* * *
‘이런.’
의자에 앉아있던 에밀리가 몸을 일으켰다.
두꺼운 유리관의 너머.
빛이 뿜어지던 장소에선 아찔한 참사가 일어나고 있었다.
“크라아아아아아!!”
듣기만 해도 다리가 풀릴 것 같은 울부짖음이었다.
- 쾅!
뿜어지던 초록빛이 다 사라지기도 전.
뚜껑이 날아간 관에서 검보라색 몸을 가진 데몬이 몸을 일으켰었다.
관에 맞춰 크기를 줄이고 있던 건지 나오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몸집을 키워냈던 데몬.
그리고 그런 데몬 앞에서 연구원으로 보이는 이들은 열심히 무언가를 조작하고 있었다.
사전에 뭘 심어둔 건지 데몬을 조종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 툭.
물론 그 노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검보랏빛 데몬이 입에서 무언가를 뱉어냈고 그와 동시에 학살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크라…. 난… 키아악! 우카…론…!”
에밀리가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데몬의 목소리는 실시간으로 변하고 있었다.
울부짖을 때는 데몬의, 언어를 구사할 땐 사람의 목소리였는데 방금 들은 것만 해도 그 가짓수가 수십 개였다.
‘무슨 짓을….’
자신을 우카론이라 밝힌 존재.
과연 저걸 데몬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 들었다.
많은 게 뒤섞이고 이어져 만들어진 존재였다.
“일단 화력 쏟아부어! 제압하고 다시 진행한다!”
주변에 있던 연구소 인원들이 능력을 사용해 우카론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통제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무력 제압을 선택한 것이었다.
콰가가가가가가가---!!
공간 전체가 울릴 정도의 강력한 화력이 우카론을 덮쳤다.
“공격 중지!”
그 뒤로도 한참을 공격하던 인원들이 무기를 내렸다.
연구소 중앙은 매캐한 화약 연기와 먼지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일단 접근하지 말고 거리를 두….”
서걱!
연기가 채 사라지기도 전.
지시 내리던 인원의 머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무슨…?”
상황을 파악할 시간 따윈 주어지지 않았다.
검보랏빛 형체가 연기 사이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빛이 닿은 자리에 남은 건 처참하게 짓이겨지고 찢긴 시체와 흩뿌려진 선혈뿐이었다.
스아아아…!
비명과 살 뭉개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사이 완전히 걷힌 연기.
드러난 광경에 에밀리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이런….’
온몸으로 감당하기 힘든 아찔함이 몰려왔다.
엄청난 화력을 몰아 맞았음에도 우카론의 몸은 멀쩡했다.
작은 생채기 하나조차 없이 말이다.
우카론의 몸에 남은 건 다른 이의 검붉은 피가 전부였다.
“크… 크하하하하하하!!”
에밀리의 옆에 있던 이근철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야! 내가 바라던 게 바로 이거라고! 저게 바로 내 역작….”
콰득!
“!!!”
광기 섞인 이근철의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언제 온 건지 저 멀리 있던 우카론이 달려와 이근철의 머리를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크르르.”
희미한 울부짖음과 함께 서서히 에밀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우카론.
“….”
우카론과 눈을 마주한 에밀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엄청난 게….’
“크라아아!”
‘깨어났구나.’
달려드는 우카론에 에밀리가 두 눈을 감았다.
콰아아앙!!
그리고 귓가로 커다란 마찰음이 들려왔다.
“…?”
이제 목숨이 끊기겠구나 생각했는데 마찰음이라니.
의아한 상황에 에밀리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에밀리와 우카론 사이를 가로막고 공격을 막아낸 근육질의 남자.
“당신은…?”
에밀리의 물음에 남자가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리스 한국 대사관 소속 2급 헌터.”
우우우웅…. 퍼어어엉!!
맞닿은 마찰부에서 커다란 폭발을 일으키며 우카론이 날아가고.
약간 힘겨운 미소를 지은 남자가 말을 끝마쳤다.
“김대혁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