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카풀라
잉여한 하루구만.
눈앞에서 자글자글 구워지는 수블라키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맑디맑은 아테네의 하늘을 감상했다.
구름 한 점 없이 아주 쾌청한 하늘이었다.
나 빼고 다 바쁜 느낌이랄까.
수블라키를 한 번 뒤집으며 아침에 들린 대사관을 떠올렸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대사관은 어제에 이어 여전히 초비상사태였다.
연구소 사건만 해도 바쁠 텐데 돌아올 카풀라 대통령에게 보고할 내용까지 준비하느라 불똥이 떨어진 것이었다.
가만히 놔두면 안 되긴 하지.
날 지나쳤던 장관과 장군을 떠올렸다.
아주 그냥 돈독이 제대로 오른 게 내버려 뒀다간 나라를 말아먹을 관상이었다.
- 아까 말씀드린 자료 준비됐나요?!
아주 제대로 박살 낼 준비를 하는 건지 이연화는 여기저기 호다닥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마도 거동이 불편한 김대혁을 대신하느라 평소보다 더 바쁜 모양이었다.
거기다 대고 수블라키 먹으러 가자고 할 순 없으니까.
밥 먹고 핸드폰 좀 사러 가자고 하려 했었는데.
차마 그런 말을 꺼낼 수가 없어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었다.
“이제 드셔도 돼요!”
“앗 넵!”
서빙하며 날 예의 주시하던 아르바이트 분이 미소와 함께 노릇노릇 잘 익은 수블라키를 접시로 옮겨주었다.
혼자 온 테이블은 나밖에 없어서인지 알게 모르게 더 잘 챙겨 주는 느낌이었다.
스윽. 스윽. 스윽.
몇 번을 옮겨도 끝나지 않는 수블라키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호다닥 손을 뻗었다.
“제, 제가 할게요.”
“하하…. 같이 옮겨요. 생각보다 많네요. 어, 엄청.”
어느새 수블라키는 접시에 산처럼 쌓여 있었다.
또 언제 올지 모르니 제대로 먹고 가자는 마음으로 잔뜩 시킨 것이었다.
원래 많이 처먹기도 하고 말이다.
“휴우.”
접시를 옮겨 낸 후 이마의 땀을 닦아내는 아르바이트 소녀.
소녀가 뿌듯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필요한 게 있으면 더 말씀하시고요!”
“넵! 고맙습니다!”
꾸벅 인사를 건네고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아무것도 할 게 없는 잉여한 하루인 만큼 오랜만에 기름칠이라도 제대로 할 생각이었다.
가보자구!
산처럼 쌓인 고기에 여기저기서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수블라키는 식기 전에 먹어야 맛있다는 점이기에 빠르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와구와구와구와구!!
으으음!
입안에선 팡팡 터지는 육즙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국에서 파는 양꼬치랑 다를 게 없는 거 같으면서도 묘한 감칠맛이 엄청난 녀석이었다.
나중에 혹시나 헌터 그만두면 이거라도 배워 가서 팔까 생각이 들었다.
“우, 우와…!”
“진짜야 이거?”
귓가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신기한 모양이었다.
혼자 온 놈이 10인분이 넘는 수블라키를 삭제하고 있는 모습이 말이다.
저번에도 이렇게 먹었었는데.
맨날 똑같이 먹었는데 새삼스럽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한번 손을 뻗으려는 찰나.
접시에 고정되어있는 시야로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
군대에서 말하는 물광이란 걸 낸 건지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아주 빤짝빤짝 빛이 나는 구두였다.
“정말 맛있죠? 저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빼먹지 않고 먹는답니다.”
중후하면서도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목소리 감별사는 아니지만 딱 들어도 교양과 지식이 철철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스윽.
혼자 먹는 게 처량해 보여서 말 걸어 준건가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목소리의 주인공.
어깨까지 닿는 깔끔한 웨이브 머리와 깊은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였다.
어?
알고 있는 얼굴에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너무 예상하지 못한 등장이라 잠시 사고가 멈춘 것 같았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던 이유 역시 내 먹방 때문이 아니었고 말이다.
“잠시 앉아도 될까요?”
“네, 넵!”
정신을 차리고 호다닥 일어나 건너편 의자를 빼 드렸다.
매너란 걸 모르고 살아온 나지만 지금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각하!”
천천히 자리에 앉는 카풀라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자.
웃음을 터뜨린 카풀라가 그러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지금은 같이 수블라키를 먹으러 온 친구 정도로 대해 주시면 됩니다. 그런 딱딱한 호칭 대신 카풀라 님이면 충분하고요.”
차분하게 말을 잇는 카풀라에 가드 너머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더욱 커져갔다.
“와… 뭐 하는 사람이길래 대통령이 저런 말을 해주는 거야?”
“오랜 친구 사이라던가 그런 거 아닐까? 애초에 숨기려 하시는 거 같지도 않고.”
“아니면 몰래 그리스에 온 VVIP 귀빈일 수도 있지.”
그, 그런 거 아니야!
라고 머릿속으로 외치는 사이 카풀라가 수블라키 하나를 건네왔다.
이렇게 먹으면 더 맛있다며 묘하게 조합한 양념장과 함께였다.
“감사합니다.”
목까지 튀어나온 황송합니다를 집어넣고 감사합니다로 대체하며.
받아 든 수블라키를 양념장에 찍어 입으로 가져왔다.
오씨…!
이제 수블라키는 마스터 했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의 커다란 오만이었다.
매콤달달구리 하면서도 톡 쏘는 묘한 양념장의 맛.
수블라키의 기름짐과 어우러지니 감칠맛이 두세 배는 더 증폭되고 있었다.
“맛있죠?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섞어 주시던 양념장이에요.”
조용히 수블라키 하나를 먹은 카풀라가 말을 이었다.
어떠한 신호가 있었는지 나와 카풀라 주변을 더 꽁꽁 싸매는 경호원들.
카풀라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진 건 물론이었다.
“백운 님이 해주신 일은 오는 길에 김대혁 팀장을 통해 보고받았습니다.”
약간 뜸을 들이는 카풀라의 입가로 미소가 그려졌다.
“오면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제가 뭘 해야 백운 님한테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는지를요. 지난번에도 그런 활약을 해주셨는데 대통령이라 바쁘다는 핑계로 찾아뵙지도 못했었고요.”
“무언가를 보답하려고 하지 않으셔도 돼요. 전 그저 해야 하는 일을 했을 뿐이니까요.”
도덕적이면서도 모범적인 답을 하며 사람 좋은 미소를 그려 보였다.
나도 그 과정에서 얻은 게 적지 않았다.
칼데아를 찾은 건 물론 이연화를 구했고 이번엔 유탈라스까지 최종장에 진입할 수 있었다.
꼴깍.
그렇다고 기대를 전혀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이렇게 말했는데도 무언가 보답하겠다 제시한다면 어쩔 수 없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호의를 마냥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닐 테니까.
“제가 공직에 있다 보니 금은보화 같은 재화를 드리는 건 어렵습니다. 다만, 저번에 김대혁 팀장과 이연화 요원에게 백운 님께서 유물에 관심이 아주 많으시다고 들었었습니다.”
씰룩.
하마터면 미소를 띨 뻔했다.
유물이라니.
그것도 수많은 신화가 깃들어 있는 그리스 유물이라니!
마음 같아선 당장 일어나 출발하고 싶었다.
“유물을 드리는 건 불가능하지만, 이번 일이 정리된 후에 백운 님께서 그 유물들을 보실 수 있도록 준비해 볼 생각입니다. 아직 세상에 단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유물까지 전부요.”
“유물을 볼 수 있다니…! 너무 좋네요.”
카풀라에게 들리지 않게끔 작게 심호흡을 했다.
벌써부터 그리스 신화가 머릿속을 뛰노는 듯한 기분이었다.
텅텅.
응?
카풀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쉴새 없이 처먹은 탓일까.
고개를 내리니 어느새 텅텅 빈 접시가 눈에 들어왔다.
카풀라는 하나 먹은 게 다인데 나 혼자 다 처먹은 것이었다.
“다 드신 거 같으니 일어날까요? 사실 백운 님을 병원으로 모셔다 드리려고 온 거랍니다.”
“병원요?”
“에밀리 님이 백운 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원래 예정된 내일이 아니라 오늘요.”
“오…!”
눈을 반짝이며 호다닥 짐을 챙겼다.
에밀리를 만나고 가야 해서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당장은 말뿐이지만.”
나란히 걸으며 카풀라가 내 쪽을 돌아봤다.
“다시 한번 정말 감사드립니다.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사람 좋게 웃고 있던 카풀라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번 일에 연관된 이들은 한 치의 용서도 없이 대가를 치르게 하겠습니다. 대통령의 자리를 걸고서요.”
* * *
아테네의 정부 건물.
장군 롭호스가 불안한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타니스 장관.”
롭호스의 물음에도 타니스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라고 해서 알 수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짓을 해야 연수정이 탄 전세기가 종잇장처럼 구겨져 추락할 수 있는지 말이다.
“받기로 한 건 다 물 건너갔을 테고. 잘못하면 제대로 독박 쓸 수도 있습니다.”
보상과 보호를 약속했던 연수정이 시체로 발견되며 두 사람은 몹시 난감해져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부와 정보력을 가진 연수정이었다.
그녀가 카풀라를 압박해 자신들을 지켜 줄 거라 믿었기에 과감히 벌인 일인데.
하룻밤 사이에 그토록 믿었던 바람막이가 전세기와 함께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알고 있으니 목소리 좀 낮추세요. 어차피 증거가 될만한 건 지금 다 처분 중이니까요.”
타니스가 짜증난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만약을 대비해 가지고 있던 장부와 녹화 파일만 처분하면 끝날 일이었다.
그것만 없애면 둘을 연수정과 연관 지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끼익.
때마침 건물 회의실이 문이 열리고.
“음? 저들은…?”
“한국 대사관 측 헌터들인가.”
깔끔한 제복을 갖춰 입은 김대혁과 헌터들이 타니스와 롭호스에게 다가왔다.
여유로운 걸음으로 두 사람 앞에 서는 김대혁.
타니스가 짜증 섞인 얼굴로 김대혁을 올려다봤다.
“뭐죠?”
김대혁이 아무 대답 없이 품에서 유에스비 하나를 건넸다.
“떠나시자마자 압수 수색을 진행했고 처분되기 직전인 증거품들을 확보했습니다. 무슨 내용인지는 그쪽이 가장 잘 아실 테고오.”
타니스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뭐? 당신 미쳤어? 대사관 팀장 나부랭이가 감히 외교부 장관 집을 무단으로….”
툭.
지난번 타니스가 그랬던 것처럼 김대혁이 종이 한 장을 건네었다.
“이건 또 무…!”
카풀라 대통령이 직접 서명한 명령서였다.
김대혁을 임시 감사관 및 사건 책임자로 임명한 건 물론 각종 권한을 준 것이었다.
상대가 외교부 장관이든 사성 장군이든 털어버릴 수 있도록 말이다.
“이제 장관이나 장군이라고 부르진 않겠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불릴 일은 평생 없을 테니까요.”
사색이 된 타니스와 롭호스를 바라보던 김대혁이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그럼 가실까요?”
* * *
카풀라의 차를 타고 도착한 병원, 에밀리의 병실 앞.
문을 열기 전에 챙겨 온 회중시계를 내려다봤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 어떡하지.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잔다르크랑 연관 있으면 좋겠다! 하며 잔뜩 기대하고 오긴 했지만 내심 불안했다.
에밀리의 감정이 절망적인 결과를 가리킬까 봐 말이다.
쪽.
부디 무기랑 연관 있길 바라며 시계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후우!”
한차례 심호흡과 함께 병실 문을 열어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