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감정
“안녕하세요. 에밀리 님.”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에밀리에 꾸벅 고개를 숙였다.
목걸이 감정 이후 처음으로 보는 에밀리였다.
“오랜만이네.”
웃으며 인사하는 에밀리를 바라봤다.
밝은 병실 한복판에서 환자복 차림으로 만나서일까.
뒷골목에서 수상한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었던 모습과 쉽게 매치가 되지 않았다.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그건 내가 물어야 할 거 같은데. 그 괴물과 싸운 건 너니까. 물론.”
눈을 가늘게 뜬 에밀리가 이리저리 내 몸을 살폈다.
“굳이 안 물어봐도 될 거 같지만 말이야.”
“하하….”
머쓱하게 웃으며 슬쩍 침대 옆에 있는 의자로 몸을 앉혔다.
그러자 살짝 고개를 내려 내 주머니 쪽을 바라보는 에밀리.
잠시 응시하던 에밀리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번 목걸이부터 해서 정말 범상치 않은 물건만 가지고 오는구나.”
“!?”
깜짝 놀라며 호다닥 주머니에 든 회중시계를 꺼내 들었다.
아직 보여 주지도 않았는데 알아보다니.
잠시 눌러두었던 기대가 한껏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날 찾아온 건 이 시계의 감정을 위해서겠지?”
“넵 맞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약간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회복되지도 않은 에밀리한테 감정을 부탁한다는 게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그 덕에 내가 살 수 있었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한 번 줘볼래?”
건넨 회중시계를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한 에밀리.
어느 순간부터 에밀리의 눈과 손에선 희미한 백색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온 시계구나. 몇 세기는 훌쩍 지났겠어. 그런데도 상태를 봤을 땐 말도 안 되게 잘 보관됐고.”
대산의 김정윤도 얘기했었다.
시계를 보관하던 이는 꽤 많은 자본을 가진 가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이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 가볼까.”
에밀리에게서 뿜어지는 백색 빛이 조금 더 강해졌다.
“주인과 생애를 함께해온 시계야. 단 한 순간도 떨어져 있지 않았어. 주인이 죽는 마지막 순간에 다른 사람에게 건네어졌고.”
건네어졌다…?
“혹시 주인이 직접 건넨 건지, 아니면 죽은 이의 시계를 가져간 건지도 알 수 있나요?”
“주인이 원해서 직접 건넨 거야. 소중히 여긴 시계인 만큼 그에 맞는 사람에게 건넸을 테고.”
만약 시계의 주인이 잔다르크라면 약간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이야기였다.
잔다르크는 백년 전쟁이 끝나기 전 전투에서 사로잡혀 영국으로 끌려갔었다
프랑스는 정치적 이유로 잔다르크를 구하지 않은 채 화형당하도록 내버려 뒀었고 말이다.
시계를 건넬만한 사람이 없었을 텐데.
영국은 적국이었다.
영국 역시 자신들의 전쟁을 패배로 이끈 잔다르크를 원수처럼 생각했을 터.
그런 곳에 잔다르크가 시계를 맡길 만한 사람이 있었다는 건 왠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웠다.
일단 이건 나중이고.
다시 에밀리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회중시계가 정말 잔다르크의 것이 맞는지가 우선이었다.
“시계는 항상 죽음 속에 있었어. 몇 초를 두고 생과 사가 갈리는 장소였지. 마치 전쟁터 같은. 아주 오랜 전쟁이었고 시계의 주인은 그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살아있었던 거 같아.”
전쟁이란 단어에 마른침이 꼴딱 넘어갔다.
“주인은 많은 이가 바라보던 사람이었어. 전장의 중심에 있었고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는 법이 없었지.”
어느새 눈을 감고 이야기를 이어가는 에밀리.
잠시 말을 멈춘 에밀리가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신비로운 기운이 서려 있어.”
“신비로운 기운이라 하면…!?”
“주인이 가지고 있던 힘이야. 너무 강했던 터라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계에 흔적이 남아있는 거고. 아주 찬란하고 밝은 빛이구나. 일반적인 사람이 가질 수 없는 힘이야. 선택받은 이만이 가질 수 있는 힘. 약간의 흔적만으로도 따스함과 성스러움이 느껴지는구나.”
슈, 슈발.
이쯤에선 옆 통수로 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전장부터 시작해서 선택과 성스러운 힘이라니.
머릿속에선 이미 잔다르크란 단어가 완성 될락말락하고 있었다.
“마치 성자 혹은 성녀처럼 말이야.”
잔다르크다.
완성된 단어에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재가 되어 흩어진 성녀, 잔다르크.
이쯤되면 확신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장과 성녀라…. 묘한 조합이구나.”
묘하다며 미소를 머금은 에밀리가 시계를 건네왔다.
눈의 빛도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아쉽게도 저번에 보여줬던 목걸이처럼 시계 자체에 기능이 있는 건 아니라 내가 더 말해줄 게 없네.”
“아닙니다. 충분해요. 감사합니다! 에밀리 님!”
당장 뚜렷한 단서를 찾은 건 아니었으나.
에밀리가 들려준 이야기만으로도 관련된 것들을 찾을 때 확실히 도움이 될 터였다.
물론 잔다르크라고 확신하고 나니 납득가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말이다.
가령 화형당하기 직전 적국에서 시계를 맡겼다는 이야기가 그것이었다.
쏘옥.
소피아가 준 케이스에 시계를 소중히 담아 품으로 챙겨 넣자.
작은 한숨을 내쉰 에밀리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살려줘서 정말 고맙구나.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었거든.”
“별말씀을요!”
고맙다고 말하는 에밀리에 엄지를 치켜세워준 후.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 감정 때문인지 부쩍 피곤해 보이는 에밀리였다.
“쉬어야 하는데 도움을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전 이제 그만 괴롭히고 가볼 테니 푹 쉬세요.”
살며시 웃으며 손을 흔드는 에밀리에 몸을 빙글 돌렸다.
그렇게 병실 문을 잡고 여는 찰나.
“시계를 건네받은 새로운 주인을 찾아봐.”
에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그 사람이 네가 원하는 답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클 테니까.”
* * *
고개를 빼꼼 내민 이연화가 가게 안을 살폈다.
백운이 제일 좋아하는 수블라키 맛집.
혹시나 이곳에 백운이 있을까 싶어 와본 것이었다.
“여기도 없네.”
이연화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사관으로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후 잠시 생긴 여유.
시간이 나자마자 이연화는 차를 타고 도시를 돌기 시작했다.
연락할 방법이 없는 백운을 직접 발로 뛰며 찾기 위함이었다.
“흐음.
여기에도 없으면 이젠 어딜 가서 찾아야 하나 고민이 됐다.
전투 중에 박살 났는지 원래 가지고 있던 핸드폰도 연락이 안 되었고 말이다.
“떠나신 건가.”
약간 시무룩해진 이연화가 머리를 긁적였다.
백운이 오면 여기저기 데려가려고 준비해놨었는데.
난리가 난 대사관에 밥 한 끼는커녕 제대로 된 대화조차 못 나누고 말았다.
“에밀리 님도 만났으니까 가셨겠지. 애초에 그리스에 오신 이유였으니까.”
어느새 풀이 잔뜩 죽은 이연화가 다시 한번 한숨을 내뱉었다.
한곳에 잘 머무르지 않고 워낙 여기저기 바쁘다는 건 알았지만.
인사조차 못하고 보낸 게 몹시 마음에 걸렸다.
톡톡.
그때 누군가 어깨를 두드리는가 싶더니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고파요? 왜 이렇게 축 늘어져 있어요?”
이연화의 입가로 반가움 가득한 미소가 번졌다
“흠흠.”
헛기침을 몇 번 하며 간신히 미소를 숨긴 이연화가 고개를 돌렸다.
“인사도 못했는데 가신 줄 알았어요.”
“저 그렇게 상도덕 없는 사람이 아닌데요. 양심은 좀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백운에 이연화가 작은 웃음을 터뜨린 사이.
뜸일 들이던 백운이 말을 이었다.
“인사하러 왔어요.”
* * *
신기한 음식이야. 언제 먹어도 맛있어.
절벽에 걸터앉아 맥주와 함께 수블라키 한 점을 입에 넣었다.
떠나기 전 가볍게 밥이라도 먹고 가라는 이연화에 포장해 온 것이었다.
“여긴 또 와도 좋네요.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랄까요.”
이연화가 속 시원한 얼굴로 절벽 너머 바다를 바라봤다.
사라지기 직전인 아테네를 데리고 달빛 비행을 한 곳이었다.
그리스를 떠나며 이연화와 인사를 나눈 곳이기도 했고 말이다.
“오늘도 날아가는 건가요?”
“아뇨. 오늘은 비행기 타고 가요. 무서운 형들이 다른 나라 갈 땐 제발 비행기 좀 타라고 해서요.”
“그게 정상이긴 하죠.”
“그, 그렇죠.”
지금까지 너무 대놓고 비정상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번 헌터청의 넓은 아량에 감사한 마음이 든 건 물론이었다.
스윽.
곁눈질로 하나 남은 수블라키 꼬치를 바라봤다.
가장 애매한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상대가 먹고 싶은데 내가 집어 먹는 건 아닐지 하는 그런 상황.
“드, 드세요. 백운 님. 전 배불러요.”
“앗…. 넵.”
기다렸다는 듯이 호다닥 꼬치를 집어 먹었다.
이연화의 눈동자가 약간 흔들린 걸 봐선 이 돼지새끼…. 라고 욕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런데 어떤 느낌이에요?”
“넵?
고기를 우물거리며 되묻자 이연화가 손을 들어 하늘 높이 뜬 달을 가리켰다
“백운 님은 원하면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잖아요. 달에 가까워진다는 건 무슨 느낌일까 궁금해서요. 여기서 봐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가까이서 보면 얼마나 더 예쁠까요.”
달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는 이연화에.
다 먹은 꼬치를 봉투로 휙 던져버린 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 비행기 시간 됐나요?”
“아직이요. 떠나기 전에 달 구경 좀 하고 가려고요.”
“달 구경요…?
여전히 의아해하는 이연화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같이 갈래요?”
“네…?”
[이카로스 - 칼데아 윙]
이전보다 거대해진 날개를 활짝 펼치자 이연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에 더해 조심스레 공주님 안기 포지션으로 두 손을 내밀었다.
“…!”
이제야 의미를 알아차린 건지 이연화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왠지 모르게 얼굴이 붉어진 거 같기도 했다.
고, 공주님 안기는 오바였나.
너무 많이 갔나 싶은 마음에 호다닥 입을 열었다.
“불편하시면 어부바하셔도 돼요!”
“아, 아니에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스윽.
약간 심호흡하는 듯하던 이연화가 천천히 내게 안겨왔다.
처음 날아보는 거라 그런지 이연화의 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럼 갑니다!”
날개를 펄럭이며 부드럽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우와….”
달이 가까워지자 감탄사를 내뱉는 이연화.
이연화는 눈을 반짝이며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좋네.
아주 오래된 나의 친구.
과거엔 보살핌과 도움만 받았었는데.
지금은 내가 이연화에게 이런 미소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행복했다.
싱긋.
입가로 미소를 그림과 동시에.
“그럼 조금 더 올라갑니다! 꽉 잡으세요!”
더 높은 곳을 향해 날개를 펄럭였다.
* * *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
해가 져 어두운 탑의 꼭대기로 중년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준비는?”
쳐다보지도 않고 남자에게 질문을 건네는 노인.
노인의 질문에 남자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끝났습니다.”
“그래.”
작은 한숨을 내쉰 노인이 반짝이는 파리를 둘러봤다.
너무나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이래선 안 되지.”
고개를 가로저은 노인의 얼굴이.
“우리의 백년 전쟁은 아직.”
무섭게 일그러졌다.
“끝나지 않았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