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기왕이 헌터로 회귀했다-306화 (306/473)

306화. 재방문

영국 버킹엄 궁전.

궁전을 바쁘게 돌아다니던 이사벨이 이마를 훔쳤다.

“휴. 정신이 하나도 없네.”

허리에 손을 짚은 이사벨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평소라면 몹시 정숙하고 고요한 궁전이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사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런던 본청 헌터들.

모두의 손엔 테블릿이 들려있었는데 그곳엔 각자 주어진 공간을 빠짐없이 확인하기 위한 체크 리스트가 띄워져 있었다.

‘언제 다 하지.’

이사벨이 손에 들린 패드를 내려다봤다.

아직도 리스트의 절반 이상이 체크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마도 밤까지 쉬지 않고 확인해야 완성이 될 것 같았다.

‘오늘 가서 소설마저 다 읽으려고 했는데.’

이사벨이 시무룩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커피 한 잔의 여유와 함께 이번에 새로 나온 로즈 작가의 신간을 읽다가 불려 나온 참이었다.

‘소나타 윈스가 몇백 년 만에 만난 로즈에게 무언가를 주려는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후우우우!’

궁금해 미칠 지경인 이사벨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에밀리아가 직접 연락했던지라 호다닥 책을 내려놓고 뛰쳐나왔었는데.

미친 척하고 딱 그 부분만 읽고 나올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이사벨. 아까 말한 곳은 살펴봤어?”

“네, 네!!”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사벨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이번 버킹엄 궁전 체크를 총괄하고 있는 기사 에밀리아였다.

“다른 생각하고 있었지?”

“아, 아닙니다!

덤덤하게 묻는 에밀리아에 이사벨이 땀을 흘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 보였다.

꼴깍.

에밀리아가 각성한 능력이 심안이 아닐까 의심되는 순간이었다.

“제대로 체크해야 해. 중요한 회담이니까.”

“넵! 저는 그럼 계속 체크하도록 하겠습니다.”

뭔가 찔리는지 이사벨이 호다닥 달려나가고.

그런 이사벨을 보며 살며시 웃음을 터뜨린 에밀리아가 패드에 뜬 기사로 시선을 옮겼다.

# 기적적인 왕실 회담 요청. 프랑스가 먼저 손을 내밀다!

지금 에밀리아와 헌터들이 버킹엄 궁전의 위험 요소를 샅샅이 체크하는 이유였다.

아주 오래전 백 년 전쟁을 치렀던 영국과 프랑스.

시간이 흐르며 많이 퇴색된 듯 했지만 당시 생긴 두 왕실 간의 골은 좀처럼 메꿔지지 않았었다.

실제로 국가 간의 협력은 있을지언정 왕실 간의 교류는 서로의 굽혀지지 않는 자존심으로 인해 단 한 번도 성사되지 않았었고 말이다.

‘샤를 공주님도 뜻밖이라고 하실 정도니까.’

프랑스의 요청을 받았을 때 샤를은 헛웃음을 터뜨렸었다.

자존심 높기로 소문난 프랑스 왕실인데 이게 웬일이냐고 말이다.

‘공주님이 계시는 만큼 더 철저해야 해.’

영국 내에서도 엄청난 두뇌의 소유자로 소문났으며 왕실 내에서도 가장 큰 지지를 받고 있는 샤를 엘리자베스.

샤를은 건강이 악화된 여왕을 대신해 이번 회담의 영국 왕실 측 대표로 나서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총리는 물론 세계의 관심을 받는 중요한 회담.

누구보다 많은 인정을 받아온 그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에밀리아 님. 여기 한 번 봐주시겠어요?”

“갈게.”

부하의 요청에 걸음을 내딛는 찰나.

띠리리리리리.

에밀리아가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를 받아 들었다.

버킹엄의 업무가 최우선인 만큼 비상시가 아니면 울릴 일이 없는 전화였다.

“네 에밀리아입니다. 무슨 일 있나요?”

# 안녕하세요. 에밀리아 님. 비상상황은 아닌데요. 런던 공항에서 입국자 명단을 보내왔거든요.

“입국자 명단요? 수배 중인 인물이라도 타고 있나요?”

에밀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공항에서 헌터청으로 명단을 보내오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 수배 중인 인물은 아닌데요. 그 대한민국 소속 헌터 백운 님이 계시네요.

“네?”

뜻밖의 이름에 에밀리아가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백운이 런던으로 오고 있다는 것도 놀랄만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공항이 왜 굳이 이걸 알려온 건지가 의문이었다.

“백운 님이 수배자도 아닌데 어째서 공항이…?”

# 공항 규칙 중 하나인데요. 각 국가의 귀빈 혹은 헌터 1급 이상 급 전력이 탑승하고 있을 땐 해당 도시 헌터청에 알려야 하거든요.

백운은 분명 10급 헌터였는데 생각하며 에밀리아가 추가로 물으려는 찰나.

먼저 입을 연 직원이 말을 끝마쳤다.

# 대한민국 소속 헌터 백운, 1급 헌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 * *

비행기에서 빠져나오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옛날 같았으면 내리는 순간 찌뿌둥한 몸에 온갖 인상을 쓰며 기지개를 켰을 텐데.

지금은 아주 그냥 개운한 것이 맨날 타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 인생은 돈이야.

뽀득뽀득해진 얼굴을 어루만졌다.

퍼스트 클래스에서 한 잔 거하게 걸치며 다리까지 쭉 펴고 왔더니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영수증은 보지 말자.

이번엔 내 돈으로 타고 왔기에 영수증은 애써 외면 중이었다.

저벅.

걸음을 옮기며 거대한 런던 공항을 둘러봤다.

여기저기서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맨날 칼데아로 밀입국만 하던 터라 뭔가 색다른 느낌이었다.

공항으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

뭐랄까.

도착해서 공항을 걷고 있자니 새로운 나라를 왔다는 기분이 뙇! 하고 드는 듯했다.

물론 오랜만에 왔다고 하기엔 애매한 시점이었지만 말이다.

조, 조용히 목적한 바만 이루고 떠나자.

머리로 런던을 떠나던 날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 응, 이제 안 와.

아이작의 건틀릿을 얻은 이후.

이제 내가 영국에 올 일이 뭐가 있겠냐 하는 마음으로 시원하게 돔황챠를 시전했었다.

만나고 싶다는 공주의 요청을 무시한 건 물론 룸서비스까지 배 찢어질 때까지 털어버린 후에 말이다.

주륵.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하는구나를 다시 한번 깨달으며.

당당히 입국했으나 밀입국하는 듯한 이의 마음으로 은밀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영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해맑게 인사를 건네는 직원에게 90도로 고개를 꾸벅 숙인 후 호다닥 심사장을 빠져나갔다.

빠져나가자마자 입국한 친구나 가족을 반기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언제 봐도 훈훈한 모습… 에?

# 백운 님!!

흐뭇한 미소로 사람들을 훑던 중 낯익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도, 동명이인인가.

이마가 따가운 듯한 느낌에 애써 못 본 척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백운 님!!”

다음으로 쾌활하고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모르게 낯익은 목소리였으나 최대한 고개를 돌리지 않으며 꿋꿋하게 걸음을 옮겼다.

본능이 그러라고 명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각.

그렇게 열심히 발을 구르고 있을 때.

내리깔고 가던 시야로 반짝이는 구두가 들어왔다.

“백운 님.”

아까 들려왔던 것과는 또 다른 목소리였다.

차분한 듯하면서도 낮게 쫙 깔린 목소리.

목소리 속엔 추하니까 이제 그만하고 고개 들라는 듯한 무언의 압박이 깔려있었다.

“에, 에밀리아 님 아니세요! 하하! 안녕하세요. 이런 곳에서 다 뵙네요.”

등에서 이미 땀이 폭발한 상태로 정중하게 90도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백운 님!”

뒤이어 못 들은 척하고 지나쳤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안녕하세요! 이사벨 님! 얼굴이 좋아 보이시네요. 두 분이 공항엔 어쩐 일로….”

라고 묻기엔 이사벨이 들고 있는 팻말에 적힌 백운이란 두 글자가 너무 명확했다.

나 오는 거 어떻게 알았지.

만약 핸드폰이 있었으면 추적 장치라도 달린 게 아닐까 의심했을 만한 상황이었다.

기태랑과 비광이 지금 폭탄이 날아가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미리 전화했을 리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런던은 1급 헌터가 입국하면 중앙청으로 연락이 오는 시스템이에요.”

내가 궁금해하는 걸 알았는지 친절하게 설명해 준 에밀리아가 뒤쪽을 가리켰다.

“같이 가시죠. 백운 님. 시내까지 태워 드릴게요.”

* * *

좋은 차구만.

중형 고급 세단이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나아갔다.

물론 차가 좋다고 해서 탄 사람이 마냥 편하란 법은 없었다.

왼쪽엔 에밀리아가, 오른쪽엔 이사벨이 타 있는 중간 자리.

내가 창문을 뚫고 달아날 거라 생각한 건지 양쪽에서 날 마크 중이었다.

“혹시 오해하실까 싶어 드리는 말씀인데요. 이건 어디까지나 저희가 개인적으로 온 거예요. 공식적으로 런던이랑은 아무런 관련도 없고요.”

“맞아요. 백운 님이 오신다길래 마중 나온 거예요. 모셔다 드린 후엔 저흰 가봐야 하고요.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네 하하…. 감사합니다.”

원래 도둑놈이 제 발 저리는 법.

부담 갖지 말라 했으나 착하게 살지 못한 탓에 가시방석이었다.

“….”

약간의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

두 사람이 궁금해할 듯한 주제로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엔 관광하러 온 거예요. 영국의 여러 유서 깊은 장소와 유물 탐방이라고나 할까요?”

“백운 님. 소설에도 관심이 많으시더니 그런 쪽까지…! 정말 의외네요.”

“제가 좀 다방면으로 관심이 많습니다!”

“가려고 생각해두신 곳은 있나요? 도움이 될만한 게 있으면 알려 드릴게요.”

열의를 불태우는 이사벨에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은 뭔가 훔칠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니 딱히 숨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잔다르크와 관련된 것들을 보고 싶어서요. 런던에 많지는 않아도 관련 유물이 남아 있다고 들었거든요.”

“오…. 잔다르크요. 그럼 오신 김에 잔다르크가 갇혀 있던 탑이나 화형당한 성당도 보고 가시면 되겠네요.”

이사벨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잔다르크가 갇혀 있다 화형당한 곳은 영국이 잠시 차지했다가 프랑스에게 되돌아간 땅인 루앙이었다.

“아! 그건 루앙이잖아요, 프랑스 땅이고! 라고 말씀하려는 거죠?”

“저, 정확하십니다.”

무언가를 빠르게 검색한 이사벨이 테블릿을 내밀었다.

“공식적으론 그렇지만 옛날부터 의견이 분분했거든요. 잔다르크가 생을 마감한 장소에 관해서요.”

테블릿을 받아 쭉 읽어 내려갔다.

잔다르크가 루앙이 아닌 런던에 갇혀 있다 화형을 당했다는 가설.

이런 가설이 있었단 건 박물관에서 일할 때부터 알고 있었다.

단지 별 증거 없는 이야기라 크게 관심 두지 않았었지만 말이다.

“단순한 가설이 아닐 거예요.”

이번엔 잠자코 듣고 있던 에밀리아가 입을 열었다.

“프랑스와의 사이를 우려해 공식적으로 발표하진 않았으나 가설을 뒷받침할 만한 여러 정황 증거가 있었거든요. 전투에서 잡혀 온 잔다르크가 런던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증거요.”

그런 게 있었어…?

“낯선 이야기네요. 그럼 그 장소가 지금 런던에 남아있는 건가요?”

“네 남아있어요.”

턱을 슥슥 문질렀다.

에밀리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런던에 온 김에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지금까지 무기를 얻으며 겪었던 역사는 실제로 알던 것과 다른 점도 꽤 많았기 때문이다.

뜻밖의 발견을 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요.”

“넵?”

갑자기 깔리는 복선에 되묻자.

에밀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장소들은 지금 출입 금지예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