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영국의 공주
출입 금지란 말에 급 시무룩해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나야.
엄청난 마가 낀 게 분명했다.
단 한 번이라도 쉽게 가는 법이 없었으니.
감정받으러 갔다가 우카론을 만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영국 왕실에 소속되어 보호 및 관리를 받는 장소거든요. 영국 총리가 와도 왕가의 허락이 없으면 들어가지 못해요.”
“그렇군요….”
들어가지도 못하는 걸 뭐하러 얘기했대.
한숨과 함께 마음속으로 괜한 투정을 부렸다.
영국 총리도 못 들어가는 곳이면 내가 1급 헌터가 아니라 0급 헌터여도 못 들어갈 게 뻔했다.
“그런데.”
날 보고 있던 에밀리아가 슬쩍 말을 건넸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잔다르크란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에밀리아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뜻하지 않은 기회를 잡은 사람처럼 말이다.
“어쩌면 백운 님은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넵? 어떻게요?”
휙 고개를 돌리며 에밀리아를 쳐다봤다.
너무 확 쳐다봤는지 약간 움찔한 에밀리아가 말을 이었다.
“왕가에서 런던 헌터청에 많은 지원을 해주시는 분이 계세요. 그 덕에 저도 관련된 작전에 여러 번 참여했었고요.”
이쯤에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이름이 있었다.
룸서비스를 탈탈 턴 후 야반도주하기 전날.
날 꼭 만나고 싶어한다는 사람이 있다고 에밀리아는 말했었다.
“설마 샤를 엘리자베스 공주님?”
정답인지 에밀리아의 입가로 미소가 그려졌다.
“백운 님이 계시던 호텔 룸서비스를 결제해주신 분이기도 하고요.”
“루, 룸서비스요? 하하…. 그런 걸 먹었었나.”
뜨끔하며 이사벨 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왠지 모르겠지만 이사벨도 뜨끔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샤를 공주님은 왕실의 다음 여왕 후보로 불리고 계세요. 그만큼 많은 권한을 가지고 계시고요. 잔다르크의 유물과 장소도 샤를 공주님이 허락하시면 지금이라도 당장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에밀리아가 내 쪽으로 약간 몸을 숙였다.
지금까지 빌드업한 이야기의 핵심인 모양이었다.
“샤를 공주님이 백운 님을 정말 만나고 싶어하신다는 점이에요.”
꼴깍!
이 부분에선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삼켜졌다.
뭐랄까.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처음엔 진짜 시내까지만 태워주려던 것 같았지만.
내가 잔다르크란 이름을 꺼낸 후부터는 아닌듯했다.
말수가 적은 에밀리아가 이때다 싶어 술술 이야기하고 있는 게 그 증거였다.
표정을 잘 못 숨기는 이사벨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고 말이다.
“그, 그렇군요.”
새삼스레 내가 야반도주하며 바람맞힌 사람이 정말 대단한 분이었구나 란 생각이 들었다.
영국의 왕실 공주라니, 그것도 무려 차기 여왕 후보자인 실세 중의 실세라니.
룸서비스까지 계산해주셨다니 더 불편한데.
에밀리아는 더 이상 날 재촉하지 않았다.
할 말은 다 했으니 한 번 생각해보라는 듯한, 생각해봐도 다른 선택지는 없을 테니 이쯤하고 결정하라는 듯한 무언의 압박이 느껴지고 있었다.
무단 침입보단 가시방석이 낫겠지.
내적 결정을 내린 후 에밀리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에밀리아.
그런 에밀리아에게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저, 저도 꼭 공주님을 만나 뵙고 싶네요!”
* * *
이렇게 바로 간다고?
기다렸다는 듯이 방향을 튼 차에 땀이 흘렀다.
어딘가로 전화하는가 싶더니 바로 차를 돌리라고 지시한 에밀리아.
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온 에밀리아를 바라봤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설마 궁전…?”
“아뇨. 버킹엄 궁전은 지금 보는 눈이 많아서요. 조용한 장소로 가고 있어요.”
조용한 장소라니. 날 슥삭하려는 건 아니겠지.
쫄보쉨다운 상상의 나래를 펼치길 잠시.
커다란 저택을 앞에 두고 차가 속도를 줄여나갔다.
거대한 정원과 나무로 가려진 장소였는데 아마 저택의 후문쯤일 것 같았다.
“도착했어요.”
먼저 내린 에밀리아가 문을 열어주고.
그 문을 통해 엉거주춤 발을 내디뎠다.
화아아아…!
차에서 내리자마자 얼굴로 엄청난 상쾌함이 느껴졌다.
공기가 왜 달아.
본능적으로 몇 번인가 심호흡을 했다.
살면서 이렇게 맑은 공기를 맡아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가만히 있어도 몸이 저절로 건강해지는 느낌이었다.
“샤를 공주님이 각성하신 능력이에요. 주변으로 끊임없이 생명력을 불어넣으시죠.”
뒤따라 내리더니 깊게 숨을 들이마신 이사벨이 설명해주었다.
죽은 사람까지 살리는 건 불가능하지만.
샤를을 중심으로 공기, 물, 동물 할 것 없이 많은 것들이 더 풍부해지고 맑아진다는 이야기였다.
“이쪽으로 가시죠.”
에밀리아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들어가도 되는 건가요?”
거침없이 걸어가는 에밀리아를 보며 이사벨에게 묻자.
이사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밀리아 님은 샤를 공주님의 엄청난 총애를 받고 계시거든요.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두터우시고요. 그래서 기사 작위를 받은 헌터 중에서도 유일하게 해당 저택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어요. 마치 친구처럼요!”
“오오…!”
새삼스레 에밀리아의 뒷모습이 더 멋있어 보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제 옷은 괜찮은 건가요?”
말끔한 정장 차림인 두 사람과 달리.
난 여전히 편한 비행을 위해 입은 츄리닝 차림이었다.
“어…. 음. 괜찮…나?”
내 옷을 쭉 훑은 이사벨이 난처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엔 긍정파 이사벨도 함부로 확답을 내리기 힘든 모양이었다.
끼익.
그 사이 저택의 후문이 열리고.
화려하게 꾸며진 저택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와우.”
절로 감탄사가 나오는 저택이었다.
앤티크한 감성이 잔뜩 묻어나오면서도 금색과 검정색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곳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저벅.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안녕하세요. 백운 님.”
저택보다 더 화사한 긴 금발을 흩날리며.
“샤를 엘리자베스라고 합니다.”
영국 왕실의 실세, 샤를 엘리자베스가 인사를 건네왔다.
* * *
보통 공주를 이런 데서 만나나.
화려한 저택에 비하면 수수한 서재를 돌아봤다.
아주 작은 크기로 사람 두세 명이 간신히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었다.
“앉으세요. 백운 님. 차 내드릴게요.”
“네, 넵!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며 샤를이 가리킨 의자로 몸을 앉혔다.
물론 동작은 호두까기 인형처럼 뻣뻣 그 자체였다.
만나봤어야 말이지.
조금 전 샤를을 마주했을 때도 머릿속에서 많은 번뇌가 있었다.
지금이라도 호다닥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머리라도 박아서 그랜절이라도 올려야 하는 건지 등의 번뇌였다.
결과적으론 이사벨과 마찬가지로 90도 인사만 건넸지만 말이다.
“드셔보세요.”
눈앞으로 놓인 찻잔을 호다닥 들어 입으로 기울였다.
홀리…!
홀짝이기 무섭게 입으로 그윽하면서도 깊은 향이 퍼져 나갔다.
그야말로 심신에 안정을 가져다주는 그런 향이었다.
“룸서비스 영수증이 아니라 실물을 뵈니까 훨씬 좋네요.”
“푸흡!”
순식간에 깨어진 안정에 빠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하마터면 공주님 면상에 차를 뱉어버릴 뻔했다.
기, 기억하고 있었구만.
바쁘신 분이니까 까먹었겠지 했는데.
생각보다 인상적인 액수가 나왔었던 모양이다.
“제가 원래 뒤끝이 없는데요. 그때 감사하다는 인사를 못 드린 게 너무 아쉬웠었나 봐요.”
다소곳이 자세를 바로잡은 샤를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런던을 구해주신 백운 님께 영국 왕실을 대표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별말씀을요! 그…. 저도 잘 먹었습니다. 차랑… 룸서비스랑….”
말끝을 흐리자 샤를이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왕실 공주라고 해서 엄청 절도 있고 딱딱할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오히려 더 쾌활하고 솔직한 느낌의 샤를이었다.
“에밀리아 님께 들었어요. 잔다르크와 관련된 장소를 보고 싶어 하신다고요.”
“네 맞습니다.”
고개를 몇 번 끄덕인 샤를이 말을 이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왜 보려고 하시는지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단순히 관심이 많으신 건 아닐 것 같아서요.”
싱긋 웃는 샤를을 바라봤다.
옳은 말이었다.
누가 단순한 관심으로 영국 왕실 공주까지 만나러 왔겠는가.
“아 미리 말씀드리자면 어떤 이유를 가지고 계시든 보고 싶어 하시는 장소는 빠짐없이 열어 드릴 거예요. 이번 회담이 끝나야 가능하겠지만요. 그리고 백운 님이 보는 걸 넘어 가져가선 안 되는 걸 가져가길 원하시더라도.”
약간 뜸을 들인 샤를이 눈을 찡긋 감아 보였다.
“전 못 본 척해드릴 거고요.”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샤를의 눈을 응시했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벽안.
대산의 소피아가 떠오르는 샤를이었다.
“하하….”
코를 긁적이며 천천히 말을 골랐다.
가져가선 안 되는 것까지 주겠다니.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지난번 런던에서 찍힌 동영상과 무기왕이란 이름에서 무언가를 짐작한 모양이었다.
공주님이 엄청 시원시원하시네.
내가 런던에서 사신 놈들을 박살 냈다곤 해도 샤를로서는 굳이 베풀지 않아도 되는 호의였다.
그럼에도 먼저 나서서 내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겠다고 하니 나도 적정 수준까지는 말해도 될 것 같았다.
“저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입가로 미소를 띠었다.
“성녀 잔다르크가 사용했던 무기를 찾고 있습니다.”
* * *
북적이는 런던 공항.
푸른색 정장 차림에 선글라스를 낀 무리가 공항을 거닐었다.
“발리아 님. 프랑스 사절은 오늘 밤 비행기로 도착한다고 합니다.”
발리아라 불린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 눈에 큰 흉터를 가지고 있으며 짧은 백발을 깔끔하게 넘긴 노인이었다.
“요청했던 건?”
발리아의 물음에 수행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가방 하나를 꺼내 열어 보였다.
가방 안으로 보이는 정사각형의 상자.
상자엔 알 수 없는 고대 문자가 잔뜩 적혀 있었다.
“확실한 거겠지?”
“예. 관련 결계 분야에서는 최고입니다. 이것도 오랜 시간이 걸려 만들어냈고요. 보상도 일이 끝난 후 받겠다고 했습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그리고 당일 버킹엄 궁전에 배치될 인원의 명단도 받았습니다. 대부분이 기사 작위를 받은 헌터들입니다. 지난번 런던 뉴스에 나왔던 에밀리아란 기사도 포함되어 있고요.”
“그딴 것들은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다.”
발리아가 미소를 지으며 가방 안의 상자를 바라봤다.
굳이 적진 한가운데에서 회담을 잡은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 장소에 남게 되는 건.”
그 장소에 뭐가 있든 타겟을 확실하게 제거할 자신이 말이다.
“샤를 엘리자베스. 한 명뿐일 테니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