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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왕이 헌터로 회귀했다-308화 (308/473)

308화. 회담

짹짹짹짹짹---!

“으음.”

귀를 파고드는 새의 지저귐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놈의 참새는 한국이든 영국이든 참으로 우렁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륵.

눈을 뜨자 고풍스러운 그림이 그려진 천장이 보였다.

언제 그려졌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 그림이었다.

샤를 역시 아주 오래전부터 영국 왕실에 전해져 온 저택이라 소개했었고 말이다.

얼마나 하려나.

쓸데없는 세속적 계산을 때리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왕실에서 쓰는 고급 침대라 그런지 아주 늘어지게 자버렸다.

여기서 신세 질 생각까진 없었는데.

이마를 긁적이며 어젯밤 샤를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샤를은 장소를 열어 주는 건 물론 필요한 게 있다면 가져가게 해주겠다는 파격 제안을 했었다.

황금색을 띤 유물이 어딘가에 속해 있다면 어떻게 훔쳐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그런 나쁜 고민을 깔끔하게 제거해주는 시원한 제안이었다.

- 괜찮으시다면 여기서 지내는 게 어떤가요? 아직 백운 님과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어서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샤를은 내게 방까지 내주었었다.

오늘 있을 회담 준비를 위해 버킹엄 궁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던 샤를.

엄청 바쁜 와중에도 내 얼굴을 보기 위해 잠깐 빠져나온 것이었고, 나만 괜찮다면 돌아와 저택에서 얘기를 더 나누고 싶다고 샤를은 정중히 요청했었다.

공주님의 요청인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둘러봤다.

살면서 언제 이런 방에서 자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훌륭한 방이었다.

침대도 얼마나 큰지 듀린이 스무 명이 와도 거뜬할 것 같았다.

저벅.

천천히 저택을 둘러보려는 찰나.

앗 시발.

순간 나의 실책이 떠올랐다.

샤를은 궁에서 돌아온 뒤 대화를 나누자고 했었는데.

나도 모르게 침대에 몸을 눕히고 지금까지 처자버린 것이었다.

퍼질러 자는 모습에 샤를은 날 깨우지 않았던 모양이고 말이다.

못난 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방을 나섰다.

샤를은 자기가 없는 동안 저택도 쭉 구경해 보라고 말했었다.

처음 왔으니 이것저것 볼 게 많을 거라는 말과 함께였다.

오 역대 왕과 여왕인가.

앞쪽으로 넓게 뻗어진 복도.

복도 양쪽으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커다란 초상화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림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왕관을 쓴 모습이었고 말이다.

다들 늠름하시구먼.

아래에 적힌 연도와 초상화를 번갈아 가며 보길 잠시.

응?

묘한 초상화 한 장이 눈앞에 나타났다.

두 명의 인물이 함께 그려진 초상화였다.

왜 두 명이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아직 보지 않은 초상화들을 훑었으나 두 명이 그려진 건 이게 유일했다.

왕관을 쓴 여자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있는 금발의 여자.

생김새는 많이 달랐으나 그림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만큼은 친자매 그 이상이었다.

여왕과 그녀의 친우라.

설명의 역할을 못 하는 푯말이었다.

이름이라도 써놔야지 그냥 친우라고 대충 써놓다니.

누굴까.

누구길래 여왕과 이렇게 다정히 사진을 찍은 건지 궁금했기에.

뭐라도 보일까 싶어 턱을 슥슥 문지르며 그림 여기저기를 살폈다.

“일어나셨습니까?”

“갸아악!”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 집사요! 라고 써놓은 듯한 할아버지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 이곳의 집사인 레차도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는 레차도에 호다닥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초면부터 너무 추하게 자빠져버렸다.

“오호. 백운 님께서도 이 초상화를 보고 계셨군요.”

“유일하게 두 명이 그려진 초상화라 신기해서요. 혹시 왜 이것만 두 명인지 아시나요?”

콧수염을 몇 번 만진 레차도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 샤를 공주님도 모르실 겁니다. 여왕님께 여쭤봐도 그저 미소만 짓고 말씀은 해주시지 않았거든요.”

“!? 여왕님도 이 초상화를 보러 오시나요?”

“그럼요. 지금은 거동이 불편하셔서 잘 못 오시지만. 건강하실 때는 하루가 멀다하고 매일 같이 오셨습니다. 아주 바쁠 때도 어떻게든 짬을 내서 오셨었죠.”

초상화 정면에 선 레차도가 뒷짐을 지며 미소를 그렸다.

“항상 이 자세로 초상화를 아주 오랫동안 보곤 하셨습니다. 행복하고 흐뭇한 미소를 그리시면서요.”

“오….”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초상화를 훑었다.

현 여왕이 그토록 좋아하고 애지중지하는 초상화라니.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최대한 눈에 담아두고 싶었다.

“아참. 레차도 님. 혹시 밤늦게 샤를 공주님이 절 찾거나 하시진 않았죠? 혹시나 싶어서요. 하하하…!”

제발 안 찾았기를 바라며 물었지만.

레차도가 당연한 걸 물어본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자마자 찾으셨습니다. 주무신다고 하니 그래요? 라고 말씀하신 뒤 들어가셨지만요. 뒷모습이 무척 씁쓸해 보이셨습니다.”

“그, 그렇군요.”

쉬잍…!

“지금은 저택에 안 계시겠죠?”

“예. 오후에 회담이 있어 버킹엄 궁전으로 가셨습니다. 자 그럼.”

레차도가 정중한 자세로 팔을 쭉 뻗었다.

“백운 님은 식사부터 하시죠. 공주님께서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대접하라 아주 강하게 명하셨거든요. 영국 최고의 요리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오오!”

늠름하게 가슴까지 펴며 말하는 레차도에 잔뜩 기대를 품으며.

“가시죠!”

그 뒤를 따라 졸졸졸 걸음을 옮겼다.

* * *

버킹엄 궁전.

입구에서 드나드는 이들을 살피는 에밀리아에게 이사벨이 다가왔다.

평소보다 몹시 조심스러운 걸음걸이였다.

“에밀리아 님. 이것 좀 한 번 보셔야 할 거 같아요.”

이사벨이 들고 있던 테블릿을 건넸다.

조금 전 런던 헌터청으로부터 받은 메시지였다.

“…!!”

메시지를 읽은 에밀리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오늘 있을 회담에 배치되는 헌터들의 배치도.

중요한 자료인 만큼 철저히 관리되고 있던 파일인데 누군가 비정상적인 루트로 배치도를 빼갔다는 내용이었다.

“어디서 가져간 거야?”

“찾는 중인데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아요.”

“접근할 수 있는 인원이 많진 않을 텐데.”

에밀리아가 궁전에 배치된 런던 소속 헌터들을 훑었다.

오랫동안 함께 일하며 에밀리아와 마찬가지로 기사 작위를 받은 베테랑들이었다.

“추가로 온 프랑스 측 인원들은 없지?”

“네. 기존에 보내온 인원 말고는 없었어요. 지금은 다 회담장에 들어가 있고요.”

에밀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프랑스가 회담에서 무언가 일을 벌이려고 한다기엔 영국 측에 비해 전력이 너무 부족했다.

단순히 숫자가 적은 걸 넘어 내로라하는 프랑스 소속 전력은 아무도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에 온 모든 이가 낮은 급수에 속한 헌터들이었다.

- 숙이고 들어오겠다는 게지.

이에 관해 보고를 올렸지만 상부에선 문제될 게 없다고 어깨를 으쓱였었다.

애초에 강한 전력을 데리고 오는 것 자체가 영국에 대한 불신이기에 프랑스에서도 알아서 조심했을 거란 이야기였다.

‘프랑스 왕실과 정부가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고 해도 프랑스의 귀빈일 텐데.’

왠지 모를 불안감에 에밀리아가 회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 시작 전이었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대화를 주고받는 공주 샤를과 프랑스의 현왕 루칸.

루칸과 함께 온 인원들 역시 별다른 특이점은 보이지 않았다.

딱히 강해 보이는 인원도 없었고 말이다.

‘전력은 우리 쪽이 압도적이다.’

버킹엄 궁전 외부 방어 태세와 전력까지 합하면 무리하더라도 비벼볼 수 있는 차이가 아니었다.

‘….’

현실적으론 불가능하지만 변수는 언제나 생겨나는 것이기에.

“이사벨. 프랑스에 연락해서 오늘 루칸 왕과 같이 온 인원들 다시 한번 알아봐 달라고 해줘. 난 공주님 곁에 있을게.”

“네!”

말을 건넨 에밀리아가 샤를의 바로 뒷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까진 순조롭게 진행 중인 양국 왕실 회담.

‘부디.’

에밀리아가 머릿속으로 빼돌려진 배치도를 떠올리며.

언제든 전투할 수 있도록 긴장의 끈을 잡아당겼다.

‘단순한 해프닝이길.’

* * *

여기가 버킹엄 궁전이구만.

고개를 끄덕이며 산책 겸 주위를 거닐었다.

“꺼억!”

누가 없나 주위를 살핀 후 시원하게 트림을 발사했다.

웬만하면 무리없이 다 먹어치우는 나였지만 조금 전은 선을 넘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못해도 스무 명이서 먹어야 할 듯한 양.

레차도는 뿌듯한 얼굴로 남기면 서운할 거 같다고 부담을 줬었다.

맛있긴 엄청 맛있었어.

그나마 다 먹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만약 하나라도 피쉬앤칩스 같은 맛이 났다면 바로 중도 포기 선언했을 터였다.

예쁘네.

배도 꺼뜨릴 겸 걸으며 버킹엄 궁전 주변을 둘러봤다.

아름다운 꽃밭에 둘러싸인 궁전이었다.

정중앙엔 늠름한 동상도 하나 세워져 있었고 말이다.

그나저나 엄청 삼엄하네.

내부에선 회담이 시작되었을 시간.

버킹엄 근위병을 포함한 런던 헌터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었기에 더 들어가는 건 무리 같았다.

왕실 간의 회담이라니. 보고 싶네.

먼발치에서 궁전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왕족끼리 만나면 어떤 분위기에서 어떤 말이 오갈지 궁금했다.

나중에 들려달라고 해야지.

라고 마음먹었으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궁전을 보고 싶었기에.

헌터들이 제지하지 않는 위치까지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 * *

에밀리아가 회담을 응시했다.

걱정과 달리 회담은 별문제 없이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샤를 공주님. 이번 회담을 수락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거절하시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습니다.”

“거절이라뇨. 먼저 손을 내밀어 주셨는데 어찌 잡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오랜 시간 차가웠던 두 왕실의 관계가 오늘을 기점으로 조금씩이나마 가까워졌으면 좋겠네요.”

“저희도 같은 바람입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샤를 공주님이 회담에 나와 주시길 바랐었고요.”

루칸의 마지막 말에 샤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라면 현 여왕이 나왔어야 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자신이 나오길 바랐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궁금했다.

“아 제가 말을 좀 어렵게 했군요.”

살며시 웃어 보인 루칸이 말을 이었다.

“방금 드린 말씀의 뜻은 이렇습니다. 누구나 다 알듯이 현 여왕님의 건강이 몹시 안 좋지 않습니까. 언제 더 악회될 지 모르는 분과 회담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나눈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싶어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순간 회담장으로 정적이 흘렀다.

정면에 앉아있던 샤를 역시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자기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궁금했다.

“지금 하신 말씀이…?”

이번 샤를의 질문에 루칸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소름 돋는 표정으로 샤를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번에도 어려웠나요?”

루칸이 천천히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곧 죽을 늙은이보단 앞으로 왕실을 이끌어 갈 공주님이 이 자리에 계셔서.”

루칸의 입가로 묘한 미소가 그려졌다.

“좋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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