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끼이익
루칸의 급격한 태도 변화에 순식간에 찬물이 끼얹어진 회담장.
에밀리아가 빠르게 상황을 살폈다.
‘달라진 건 없다.’
루칸의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을 제외하곤 조금 전과 달라진 건 없었다.
프랑스 측과 영국 측 모두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딱히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두 진영에 차이점이 있다면 한 가지.
에밀리아를 포함한 영국 측 인원들은 현재 상황에 당황하고 있었으나 프랑스 측 인원들은 마치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무덤덤하다는 것이었다.
‘표정이란 게 없는 건가.’
생각해보니 들어올 때부터 저랬었다.
최대한 웃는 얼굴로 맞이한 영국 인원들과는 달리 프랑스 쪽은 시종일관 차가운 얼굴이었었다.
애초에 표정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말이다.
“지금 이 자리가 공식적인 회담이란 걸 알면서도 하신 말씀이겠죠?”
샤를의 목소리에선 더 이상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환하게 그려졌던 미소 역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샤를의 할머니이자 현 여왕을 루칸이 곧 죽을 늙은이라고 말한 순간부터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것들이었다.
“제가 바보로 보이십니까? 저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가 영국 땅이란 것도 알고 계실 테고요.”
“그럼요.”
루칸이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여기가 영국 땅이든 프랑스 땅이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무슨 생각이신지 이해할 수 없군요. 먼저 손을 내밀고 이 먼 땅까지 왔으면서 그런 발언을 하다니요.”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 겁니다. 공주님께서 각성하신 능력이 예지가 아니라면요.”
루칸을 조용히 응시하던 샤를이 입을 열었다.
“왜 오신 겁니까?”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병든 늙은이가 아닌 차기 여왕인 샤를 공주님을 만나러 왔다고요.”
점점 긴장감이 고조되는 회담장에 에밀리아가 샤를을 응시했다.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곧장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쾅!
회담장 문이 강하게 열리고 그곳으로 모두의 시선이 향했다.
‘이사벨…?’
문을 연 건 이사벨이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허옇게 질린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사벨의 뒤론 밖에서 대기 중이던 헌터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가짜예요!!”
급하게 달려온 건지 숨을 헐떡이던 이사벨이 외쳤다.
이사벨의 들어 올려진 손은 루칸 옆에 앉은 프랑스 측 헌터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연락이 왔어요! 루칸 왕을 제외하고 이곳에 있는 프랑스 측 인원 모두! 목이 잘린 상태로 발견됐다고요!!”
“!!!”
이사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샤를 앞으로 나선 에밀리아가 능력을 발동했다.
순식간에 몸을 감싸는 풀플레이트아머와 방패.
주변에 있던 영국 헌터들도 마찬가지로 각자의 무기와 능력을 꺼내며 프랑스 인원들을 견제했다.
“하하하하!! 이거 참. 잘 좀 숨겨 놓으라니까.”
한바탕 웃어 보인 루칸이 손을 몇 번 내젓자.
테이블 위로 사각형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알아볼 수 없는 문자가 잔뜩 쓰인 상자였다.
“에밀리아 경. 힘들게 알아차리셨는데 이거 어쩌죠?”
루칸의 입가로 비열한 미소가 그려졌다.
“이미 늦었는데.”
“!!”
오싹함을 느낀 에밀리아가 테이블 위로 몸을 날렸다.
뭐가 됐든 루칸의 다음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말했잖습니까.”
상자에서 보라색 빛이 뿌려지고.
“늦었다고.”
몸을 날린 에밀리아의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 * *
“응?”
눈앞에 꽃은 얼마일까 생각하던 중.
갑자기 변한 분위기에 고개를 들었다.
“뭐, 뭐야 시발.”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잠깐 고개를 숙였다 들었을 뿐인데 배경 자체가 달라져 있었다.
버킹엄 궁전에서 뿜어져 나와 주변 전체를 감싸고 있는 보랏빛 장막.
딱 봐도 불길하고 재수 없는 것이 좋은 변화는 아닌 것 같았다.
거기다.
다 어디 갔어.
대충 봐도 족히 백은 넘어 보이던 헌터를 포함 회담을 구경 왔던 사람들까지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심지어는 꽃에 날아들던 나비와 벌마저 사라져 있었다.
마치 이 공간에서 날 제외한 생명체가 다 사라진 느낌이었다.
꿈인가.
손을 올려 뺨을 한 대 후려치고 꼬집어 보았다.
얼얼하고 쓰린 걸로 보아 꿈은 아닌 모양이었다.
저벅.
천천히 버킹엄 궁전 쪽으로 걸어보았다.
혹시라도 궁전 근처엔 남아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싶어서였다.
없네.
모두 사라졌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궁전을 올려다봤다.
주변을 둘러싼 보라색 장막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날 노린 건 아닐 터였다.
애초에 배불러서 무작정 산책하러 온 나를 노린다는 건 말이 안 됐으니까.
나는 왜 남겨 놓은 건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츄리닝 차림이라 이러고 궁전 들어가는 게 내키진 않았으나.
상황을 보니 무슨 일이 제대로 벌어진 것 같았기에.
이, 일단 가보자고.
조심스럽게 버킹엄 궁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허억!!”
숨을 거칠게 뱉어내며 에밀리아가 눈을 떴다.
상자에서 뿜어진 빛을 본 순간 몸이 굳으며 정신을 잃었었다.
“뭐, 뭐야 이게.”
몸을 일으킨 에밀리아가 주변을 살폈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에밀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에 밀리아가 서 있는 곳은 회담장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버킹엄 궁전이 아니었다.
빠앙---! 빠아아앙---!
귀를 울리는 요란한 경적 소리.
에밀리아가 서 있는 곳은 런던 시내의 도로 위였다.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벙쪄 있는 사이.
“에밀리아 님?”
얼떨떨한 이사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자리에서 일어난 이사벨 역시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정면에 있는 차를 바라봤다.
차에 탄 사람들도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달리던 와중에 풀플레이트를 입은 에밀리아가 나타났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끄으…. 어디야 여긴.”
옮겨진 건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회담장에 있었던 모든 이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심지어는 버킹엄 궁전 밖에서 대기 중이던 근위병 및 비상 인력까지 포함이었다.
‘공주님…!!’
에밀리아가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훑었다.
전부가 옮겨졌다면 샤를도 함께 왔을 터였다.
“안 계신 거 같아요…!”
같이 찾던 이사벨이 고개를 내저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더 넓게 둘러본 인원들도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 왕실을 이끌어 갈 공주님이 이 자리에 계셔서 좋다는 말입니다.
루칸이 했던 말이 에밀리아의 머리를 스쳤다.
그땐 무슨 의민지 납득할 수 없었는데.
샤를 공주만 오지 않은 걸 보니 이제야 그 뜻을 알 것 같았다.
스윽.
“전원 최대한 빨리….”
곧장 몸을 돌리며 에밀리아가 입을 열었다.
“버킹엄 궁전으로!!”
* * *
인상을 찌푸린 샤를이 주변을 돌아봤다.
순식간에 상자에서 뿜어져 주위를 감싼 보라색 장막.
그와 동시에 회담장에 있던 모든 이가 사라져 버렸다.
“어디로 보낸 건가요?”
샤를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자 루칸이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동시키는 것만 해도 벅찬 결계라 대상을 죽이거나 할 순 없으니까요. 그것보다는.”
다리를 꼰 루칸이 의자에 몸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샤를 공주님은 본인부터 걱정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가장 위험한 건 공주님이신데요.”
“언제부터 이런 걸 계획한 거죠?”
루칸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샤를이 질문을 건넸다.
정해진 타겟만 남겨두고 모조리 날려버리는 상자라니.
이런 건 하루아침에 준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입니다. 조금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백 년 전쟁 이후부터라고나 할까요?”
“백 년 전쟁…?”
뜬금없는 이름의 등장에 샤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주 오래전에 끝이 난 전쟁이었다.
지금 루칸이 그 전쟁을 언급하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때부터 왜 지금까지 기다렸냐 물으신다면.”
루칸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법이 없었거든요. 영국에 콕 박혀 보호받고 있는 왕실을 공격할 방법이요. 하지만 개방의 등장으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죠. 별의별 능력자가 다 나타났으니까요. 아주 오랜 시간과 돈이 들었지만 결국엔 저희에게 꼭 필요한 능력자들도 찾아낼 수 있었고요.”
루칸이 테이블 위의 상자를 톡톡 두드렸다.
“보기엔 상자 하나지만 여러 명의 능력자가 달라붙어 만든 겁니다. 그중에서 찾기 힘들었던 능력이 결계에 규칙을 부여하는 자였죠. 가령 샤를 공주님과 우리 측 인원만 남겨야 한다! 라는 규칙요.”
샤를이 자랑하듯 떠벌리는 루칸과 그 옆에 앉은 인원들을 바라봤다.
수많은 능력이 존재한다는 건 알았지만 이런 것까지 가능할 줄은 몰랐었다.
그렇기에 대비할 수 없었고 말이다.
“뭐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와서. 제가 이곳에 온 목적은 백 년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이미 다 끝난 케케묵은 전쟁을 왜 이제 와서? 라고 궁금해하시겠죠. 그런데 대체….”
루칸이 샤를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누구 마음대로 백 년 전쟁이 끝났다고 말하는 겁니까. 전쟁은 단 한 순간도 끝난 적이 없거늘.”
깍지를 끼고 턱을 괸 루칸이 말을 이었다.
“백 년 전쟁이 끝날 수 있는 경우는 단 두 가지. 영국 왕실의 말살 혹은 영국 자체의 소멸. 이게 아니라면 백 년 전쟁은 절대 끝나지 않는다 라고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핏덩이들끼리 시간이 좀 흘렀다고 협정이나 맺고 해서 끝낼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미쳤군요.”
루칸의 눈에서 느껴지는 광기에 샤를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젠 눈앞에 있는 게 프랑스 왕실의 루칸이 맞기는 한 건지도 헷갈리고 있었다.
“물론 샤를 공주님은 억울하시겠죠.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일어났던 전쟁 때문에 죽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원망하려거든 본인 스스로를 탓하시기 바랍니다.”
손가락을 든 루칸이 샤를을 가리켰다.
“너무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태어난 것과 얼토당토않은 생명력 부여 능력을 개방한 것, 그리고 더럽고 죄 많은 핏줄을 타고난 것에 대해서요.”
쿠드드득.
“…!”
프랑스 측 인원들이 몸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팔을 타고 피가 흐르고 몇 번의 뼈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 후.
인원들이 몸에서 피 칠갑한 날카로운 뼈를 뽑아 들었다.
검문 같은 걸론 절대 잡아낼 수 없는 무기였다.
“당신의 죽음은 단순히 인간 한 명이 죽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의미를 가질 겁니다. 세계에서 인정하는 인재였던 만큼, 지금 당장은 고귀한 혈통의 마지막 핏줄인 만큼. 당신이 죽음으로써 왕실은 무너지게 되는 겁니다. 이는 곧 영국이 무너지는 시발점이 될 거고요.”
삐그덕.
무기를 든 인원들이 테이블 위로 올라서고.
샤를이 낭패 섞인 얼굴로 루칸을 응시했다.
“저 하나 죽는다고 왕실이나 영국이 무너질 거라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아닐 겁니다. 공주님은 이제 죽을 거라 못 보겠지만요. 그럼.”
루칸이 여유로운 얼굴로 미소를 그려 보였다.
“안녕히 가시길.”
루칸의 말이 끝나고 테이블 위의 헌터들이 달려들려는 찰나.
덜컹!!
“…?”
요란한 소리와 함께 회담장의 문이 부서지며.
궁전과 어울리지 않는 츄리닝 차림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아고. 미는 문인 줄 알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