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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왕이 헌터로 회귀했다-310화 (310/473)

310화. 츄리닝에 슬리퍼

에?

넓은 궁전을 한참 떠돌아다니다 그럴싸한 문이 있어 힘차게 밀어젖혔는데.

시원하게 문이 박살 난 건 물론 들어오면 안 될 것 같은 방에 들어 와버렸다.

음.

일단 옷차림새는 나보다 한참 우수했다.

츄리닝에 슬리퍼를 끌고 나온 나와 달리 아주 그냥 비싸고 멋들어진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

공간도 여기저기 격식 있게 꾸며진 걸로 보아 회담이 열린다는 장소가 여기인 것 같았다.

일종의 무단 침입인 건가.

너무 요란하게 등장한 터라 이제 와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아, 안녕하세요. 제가 여기까지 오려고 한 건 아닌데 걷다 보니 와버렸네요.”

일단 내 쪽으로 시선이 쏠린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나같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게 내가 들어와선 안 될 곳에 온 게 확실해 보였다.

“오!”

마찬가지로 입을 벌리고 있는 샤를에 아는 척을 하려다 호다닥 손을 거둬들였다.

이 꼬라지로 인사를 했다간 샤를에게 폐가 될 것 같았다.

그나저나.

대신 시선을 돌려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는 놈들을 응시했다.

프랑스와 영국 두 왕실 간의 회담.

흙발로 테이블 위에 올라갈 만한 일이 뭐가 있는지 잠시 생각해보는 중이었다.

으.

거기다 놈들의 상체는 정상이 아니었다.

썩은 건지 끈적한 점성으로 이루어진 피가 뚝뚝 떨어지는 건 물론 들고 있는 뼈도 시체에서 뽑아낸 것처럼 거뭇거뭇했다.

“올라가 계신 분들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잭 더 리퍼 - 면도칼]

면도칼을 꺼내고.

“공주님 앞에서 예의가 없으시네.”

순식간에 테이블 위로 이동하며.

콰앙!!

뼈쟁이 네 명을 동시에 걷어차 냈다.

뭐 하는 애들인지는 몰라도 샤를에게 뼈 자랑이나 하고 있던 건 아닐 테니 일단 줘패도 될 거 같았다.

뚜두둑!

그대로 테이블에서 날아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벽으로 처박히는 녀석들.

아까 놈들이 있던 위치에서 얍삽해 보이는 프랑스인을 내려다봤다.

다른 누구보다 가장 허옇게 질린 놈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얘는 아직 패도 되는지 잘 모르겠으니까 보류.

그렇게 아는 얼굴 쪽으로 몸을 돌리려다.

앗!

공주님을 내려다볼 순 없단 생각에 호다닥 테이블에서 내려왔다.

얼떨결에 내려오다 보니 초면인 프랑스인 옆에 서게 된 상태.

“….”

건너편에서 여전히 굳어 있는 샤를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디 내가 걷어찬 게 프랑스 특유의 뼈 서커스단이 아니길 바라면서 말이다.

“너, 넌 뭐냐?”

먼저 말을 걸어온 건 프랑스인이었다.

당황한 목소리로 뭐냐고 물어오는 프랑스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전 백운인데요.”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거지?”

이번 질문엔 대답하지 못했다.

슬리퍼 신고 산책하다가 묘한 상황인 것 같길래 일단 들어왔습니다 라고 말하기가 영 쉽지 않았다.

“혹시 누구시죠?”

대답 대신 프랑스인의 정체를 물었다.

일단 누구인지 알아야 계속 존댓말을 할지 줘팰지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프랑스 왕실 루칸 7세.

어?

대답을 기다리던 중 남자의 가슴팍에 있는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나 역시 잘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와, 왕이었어?

등 뒤로 흐르는 땀을 느끼며.

슬금슬금 샤를 옆으로 위치를 옮겼다.

어제 처음 만난 사이지만 초면보단 구면 옆이 나을 것 같았다.

“괜찮으세요? 공주님.”

“네, 네.”

애써 담담한 척 묻자 샤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놀란 듯했지만 눈동자에선 묘한 반가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쾅!

“어떻게 튕겨 나가지 않았느냐 물었다!!”

“아 씨… 읍.”

책상을 내려친 루칸에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비속어를 애써 집어넣고.

테이블에 놓인 상자를 바라봤다.

아마 주변에 처져 있는 장막의 근원인 것 같았다.

“일종의 결계 같아요. 프랑스 측과 절 제외하곤 전부 다 순간이동 시킨다…. 라는 결계인데 조건을 위한 규칙 같은 게 걸려 있다고 했어요.”

조용히 설명해주는 샤를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는 몰라도 종종 겪었던 일이기에.

루칸을 바라보며 짐작가는 이유를 말해주었다.

“저한테 잘 안 듣거든요. 그런 게. 규칙이니 법칙이니 등등.”

“뭐…?”

아마 순수하게 순간이동 기능만 있었다면 나도 튕겨 나가지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 전에 저 법칙이란 거에서 필터링 되어 통하지 않은 듯했고 말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 상자에 걸린 규칙이 싸구려라고.”

“…!!”

이제 어떻게 할지를 샤를에게 물으려는 순간.

끼기긱… 뚜두둑.

“…?”

뼈쟁이들이 처박혔던 벽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못 일어날 정도로 세게 처박아줬는데 저딴 소리가 들려오다니.

꼴깍.

마른침을 삼키며 벽 쪽을 응시했다.

오씨.

소리만 기괴한 게 아니었다.

녀석들이 여기저기 뒤틀린 뼈를 어떻게든 맞추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억지로 맞추다 보니 당연히 정상적인 생김새는 아니었고 말이다.

뭐, 뭐야. 좀비야?

[도윤 - 비전 수리검]

숭헌 몰골에 곧장 수리검을 벽으로 던져냈다.

쿠아앙!!

일어나자마자 수리검과 함께 다시 처박히는 뼈쟁이들.

이 정도면 성한 뼈가 없을 정도로 뭉개졌을 터였다.

끼기긱… 뚜두둑.

시발…?

죽지 않는 건지 아니면 이미 죽어서 다시 죽인다는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 건지.

반대편으로 날아간 팔이 혼자 삐그덕 대며 몸쪽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군.”

“!?”

처음 듣는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칸이 말하고 있었으나 조금 전까지의 목소리와는 완전 딴 사람이었다.

“시체….”

불길한 단어가 들려오기 무섭게.

루칸과 벽 쪽의 뼈쟁이들의 몸이 위협적인 초록빛과 함께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폭발.”

낮은 읊조림과 동시에 초록색 폭발이 시야를 덮쳐왔다.

* * *

폭발이 일어나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숨결에 눈을 떴다.

앗.

폭발을 인지하며 나도 모르게 샤를 공주를 껴안았었다.

유탈라스로 주변을 감싼 건 물론이었다.

마, 만약을 위해서였어.

비늘만 주변으로 둘렀어도 됐을 거 같긴 하지만 어쨌든 만약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

나의 본능적인 보호 본능으로 한 행동이라 할 수 있었다.

스윽.

고개를 돌리자 아까 밖에서 봤던 꽃밭이 눈에 들어왔다.

아주 그냥 시원하게 회담장을 날려버린 폭발.

사람으로 치면 다섯 명 정도가 터진 건데도 엄청난 위력이었다.

와, 왕이 터지다니.

눈앞엔 루칸이었던 것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살다 살다 왕이 터지는 걸 보다니.

세상이 참 버라이어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륵.

비늘을 거둬들이고.

어느 정도 떨림이 잦아든 샤를에게서 천천히 몸을 떼어냈다.

“공주님. 괜찮으세요?”

눈이 한껏 커진 샤를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와 날 번갈아 쳐다봤다.

회담장이 다 날아간 폭발에서 어떻게 멀쩡할 수 있는지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저기 왕 터져버렸는데 괜찮겠죠?”

“네, 네.”

네라고 대답했지만 샤를도 정신이 없어 보였다.

중요한 회담 자리에서 이런 일을 당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쯧, 궁전이 아주 그냥 아작이 났네.

밀고 당기는 걸 착각해 문을 박살낸 내가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조금 전의 폭발로 버킹엄 궁전은 거의 반파 수준으로 무너져 내려 있었다.

“어?”

샤를 옆을 지키며 서 있기를 잠시.

저 멀리서 달려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 *

‘더 빨리…!’

호흡은 이미 턱까지 차올랐고 입안에선 쇠맛이 나고 있었다.

버킹엄 궁전에서 아주 먼 고속도로 위.

에밀리아와 헌터들이 떨어진 위치였고 그곳에서부터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이었다.

드득.

다리 근육에서 위험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한계에 다다랐으니 그만 멈추라는 몸의 신호였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어떻게 한 건진 몰라도 한순간에 영국 측 인원을 다 날려버린 프랑스의 루칸.

그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던 간에 샤를 공주를 노리고 한 짓임이 틀림없었다.

그가 원한대로 샤를 공주는 무방비 상태로 홀로 그들과 마주하고 있을 테고 말이다.

‘내가 너무 안일했어.’

에밀리아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급하게 달려오면서도 몇 번이나 자책했는지 모른다.

배치도가 빼돌려졌을 때라도 어떻게든 조치를 취했어야 했는데.

긴장을 유지하며 샤를 옆에 붙어 있으면 문제없을 거라고 안도해버리고 말았다.

‘나 때문이야.’

머릿속으로 샤를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신분만 놓고 봤을 땐 가까워지는 게 불가능한 사이였다.

그렇기에 샤를을 처음 만났을 때도 에밀리아는 사무적 관계 그 이상으론 접근하지 않았었다.

선을 지키는 것이 모두에게 편하며 샤를 역시 그걸 원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안녕하세요.

하지만 그건 에밀리아의 착각이었다.

샤를의 경호 임무를 맡고 이틀이 지난 시점.

종종 에밀리아를 쳐다보던 샤를이 먼저 웃으면서 말을 걸어왔다.

- …!

에밀리아는 그 순간의 감각을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샤를이 말을 검과 동시에 몸을 감싸왔던 맑은 기운.

주변의 공기마저 깨끗해진 느낌에 에밀리아는 당황하며 그 인사를 받았었다.

- 항상 딱딱한 얼굴로 계셔서 고민했는데요. 괜찮으시면 저랑 얘기하실래요? 편하게 대화 나눌 또래 친구가 없어서 엄청 심심했거든요.

또래 친구.

샤를은 그렇게 말하며 에밀리아와 대화를 시작했었다.

일상적이고 소소하지만 정말 즐거운 대화였다.

에밀리아 역시 어느 순간부터 대화에 푹 빠져 마음 편하게 속 이야기를 했었고 말이다.

- 다음 임무도 에밀리아 님이 맡아주셨으면 좋겠네요.

즐거운 시간을 보낸 탓일까.

샤를은 그 이후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에밀리아에게 임무를 부탁했었다.

그때마다 많은 대화를 나눈 건 물론이었다.

‘믿음에 대한 결과가 고작….!’

“에밀리아 님!”

에밀리아가 입술을 깨물고 있을 때.

함께 달리던 헌터의 낭패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버킹엄 궁전의 모습.

지금까지 알고 있던 궁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안에서부터 폭발이 일어난 건지 처참하게 무너진 궁전이 에밀리아를 반기고 있었다.

‘안돼…!’

위치를 봤을 때 폭발의 근원지는 회담장이었다.

샤를이 무방비 상태로 앉아있었을 그곳이었다.

저벅.

궁전에 도착한 에밀리아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와 보니 궁전의 상태는 더 심각했다.

회담장이 아닌 장소에 있었더라도 폭발에 휘말렸을 것 같았다.

회담장에 있었다면 흔적도 남지 않았을 테고 말이다.

‘아.’

아찔한 기운에 다리가 풀리려는 순간.

“에밀리아?”

“!!!”

귓가로 들려오는 맑은 목소리에 에밀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다치긴커녕 먼지 한 톨 안 묻은 샤를이 있었다.

“…!”

샤를은 천천히 부서진 계단을 내려오는 중이었다.

츄리닝에 슬리퍼 차림인 백운의 손을 잡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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