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뜻밖의 경호
뽀각.
발리아가 초점을 잃은 눈으로 손 위에서 부서진 인형을 바라봤다.
인형은 조금 전 버킹엄 궁전에서 가루가 된 왕 루칸을 닮아있었다.
‘드디어 그대가 원하던 영면에 들 수 있게 됐군.’
아주 오랫동안 루칸은 죽지 못했었다.
자신을 죽지 않는 존재로 만든 발리아에 의해 꼭두각시 인형처럼 살아왔었다.
발리아가 많은 공을 들여 실제로 살아 숨 쉬는 존재에 가깝게 만들어졌던 루칸.
그 덕에 누구도 루칸의 상태를 눈치챌 수 없었다.
‘그나저나.’
발리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 하는 놈이냐.’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됐었다.
영국에게 있어 뜻깊은 장소인 버킹엄 궁전이 회담 장소로 선정된 것부터 왕실 대표로 샤를이 참석한 것까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완벽하게 작전은 흘러갔었다.
문을 부수며 처음 보는 남자가 뜬금없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 미는 문인 줄 알았네.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발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었다.
버킹엄 궁전에서 츄리닝에 쓰레빠를 신은 인간이라니.
순간 주변 노숙자가 배회하다 흘러들어온 거라고 생각했었다.
- !?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버킹엄 궁전에 자신이 준비한 결계가 처져 있다는 걸 깨달은 발리아.
그때부터 발리아의 얼굴은 의아함으로 물들었었다.
- 어떻게…?
일정 범위의 모든 이가 샤를 공주를 제외하고 튕겨 나갔을 터였다.
만약 순간이동 능력자고 회담장에 미리 포인트를 찍어놨다 하더라도 들어오는 건 불가능했다.
장막이 유지되는 동안에 결계의 법칙은 유효했으니까.
그럼에도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장막 안을 거닐었었다.
마치 결계의 법칙이 감히 간섭하지 못하는 존재 같았다.
- 예의가 없으시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자신이 심상치 않은 인물임을 몸소 보여줬었다.
손으로 소름 돋게 생긴 면도칼이 생겨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테이블 위로 이동한 것이었다.
- 콰앙!
그것도 모자라 발길질 한 번으로 발리아가 준비한 네 명을 벽으로 처박아 버렸었다.
‘말도 안 되는 완력.’
평범한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살아있을 땐 하급 헌터였을지라도 발리아의 손을 거치며 웬만한 상급 헌터 이상의 힘을 가지게 된 존재들이었다.
그렇게 한 방에 날아 가버린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명단에 그런 놈은 없었는데.’
생김새를 봤을 때 영국 소속은 아닌 것 같았다.
애초에 복장 자체가 회담에 참석할만한 인원이 아니었다.
이미 정해진 인원이라면 영국에서도 동네 슈퍼 가는 복장으로 참여시키진 않았을 터였다.
‘….’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떠올리던 발리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끼어들었던 남자가 뭐가 됐든 별 상관은 없었다.
결과적으로 버킹엄 궁전은 날아갔고 그 안에 있던 샤를은 죽었을 테니까 말이다.
‘루칸을 여기서 잃은 건 뼈 아프지만.’
아주 오랫동안 공들여 만든 발리아의 대역이었다.
왕이란 신분 덕에 여러모로 편리했는데 아까울 따름이었다.
‘영국 왕실은 끝장냈으니 역할은 다 했다고 봐야겠지.’
어깨를 으쓱인 발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곧 영국이 한바탕 난리가 날 테니 다음을 준비할 차례였다.
“바, 발리아 님!”
“음?”
그때 허겁지겁 달려오는 부하에 발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부하가 저런 표정을 지을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샤를이 살아있다는 불가능한 경우가 아니라면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샤를 엘리자베스가 살아있습니다…!!”
“!!!”
침착을 유지하던 발리아의 눈이 커졌다.
그런 발리아에게 다가온 부하가 테블릿을 건넸다.
“무슨…!!”
발리아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테블릿 안에선 긴급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었다.
카메라는 박살이 난 버킹엄 궁전을 비추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 앞이었다.
“말도 안 된다!”
루칸의 폭발과 함께 가루가 되었어야 하는 존재, 샤를 엘리자베스.
샤를에겐 작은 상처조차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옷에 작은 그을림조차 묻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약간 떨어진 구석엔.
“!!”
루칸의 시야를 통해 봤던 남자가 서 있었다.
* * *
여기 계속 있어야 하나.
몹시 불편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봤다.
번쩍! 번쩍!
정면에선 쉴 새 없이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져대고 있었다.
대낮에 일어난 버킹엄 궁전의 폭발로 기자들이 우루루 몰려온 것이었다.
슬쩍 고개를 내려 늘어진 츄리닝과 슬리퍼를 바라봤다.
앗 시발!
안 그래도 초라한 슬리퍼엔 찐득한 피까지 묻어있었다.
아마 뼈쟁이들을 걷어찰 때 묻은 것 같았다.
슥슥.
조심스럽게 발을 문질러 피를 지워내며.
앞으론 평상시라도 사람답게 입고 다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백운 님. 불편하셔도 아주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끝날 거예요.”
옆에 선 이사벨이 헤헤 웃으며 말을 건네왔다.
“불편하다뇨. 하하…! 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이사벨 역시 오늘 일로 마음이 몹시 불편해 보였기에.
손을 휘휘 내저으며 미소를 그려 보였다.
저긴 완전 죽상이고.
이사벨 옆에 서 있는 에밀리아를 바라봤다.
온통 땀 범벅이 되어 버킹엄 궁전에 도착했던 에밀리아.
평소 평정심을 잘 유지하는 에밀리아가 그런 표정을 지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었다.
세상 다 잃은 표정이었지.
망연자실을 넘어 당장에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 역시 쉽게 말을 건네지 못한 채 조용히 지켜봤었고 말이다.
- 백운 님. 정말 죄송하고 염치없지만… 잠시만 같이 계셔 주실 수 있을까요?
먼저 말을 건넨 건 에밀리아였다.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건넸던 에밀리아.
에밀리아는 언제 또 방금과 비슷한 일이 생길지 모르니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만 샤를 옆을 지켜달라고 말했었다.
“흐음.”
여전히 풀 죽어있는 에밀리아를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책할 필요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누가 됐더라도 당할 수밖에 없는 수법이었으니까.
그나저나 그 새끼들 뭐였지.
수리검에 정면으로 박히며 쪼개졌던 놈들은 다시 뼈를 맞추며 일어났었다.
마치 호러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느낌이었다.
꾸, 꿈에 나오겠네.
팔짱을 낀 채 턱을 슥슥 문질렀다.
한 놈은 분명 머리가 박살 났는데도 몸을 일으켰었다.
약점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말이다.
불길하단 말이지.
죽지 않는 놈이 이걸로 끝일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워낙 마가 껴서도 있지만 무엇보다 폭발이 일어나기 전 들린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그건 회담장에 있던 그 누구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목소리가 아주 재수 없던데.
기자 회견이 끝나면 에밀리아에게 말해 주긴 하겠지만.
어쨌든 루칸의 목소리가 그냥 쉬었던 것이길 바라며.
시, 싱긋.
입가로 불안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 * *
지글 지글 지글.
중앙헌터청 옥상에 위치한 테라스.
고기가 타며 불판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았지만, 그러든가 말든가 비광과 기태랑의 눈은 앞에 놓인 모니터로 향해 있었다.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야.”
혼잣말을 중얼거린 비광이 기태랑을 바라봤다.
기태랑도 비슷한 표정인 걸 보니 같은 걸 바라보고 있는 게 확실했다.
“백운이지?”
“그런 거 같은데.”
비광이 혀를 차며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영국에서 일어난 전대미문의 테러 사건.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와 영국 양 왕실의 화해라고 불리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버킹엄 궁전이 순식간에 대테러의 현장으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카메라로 비치는 궁전의 상태가 방금 일어난 테러의 규모가 결코 작지 않음을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왜 저기 구석에 서 있냐.”
이미 테러 사건으로 깜짝 놀란 두 사람을 더 놀래킨 건 카메라 앵글의 구석 부분이었다.
대다수의 시선이 샤를 공주에게 가 있다 보니 딱히 신경쓰는 사람은 없는 듯 보였지만.
기태랑과 비광은 알 수 있었다.
분명 백운이 저기서 무언가를 했을 거란 사실을 말이다.
“자기 이름 빼달라고 했나 보네.”
당사자의 요청이 있었는지 샤를은 백운을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의 이가 빠져있는 게 그 증거였다.
“옷 꼬라지 봐라. 저러고 버킹엄 궁전을 간 거야? 돈 없나.”
초췌한 삼선 슬리퍼를 보며 비광이 혀를 내둘렀다.
원래 별난 인간인 건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돈 많을 텐데. 얼핏 듣기론 후원금 랭킹 1위라고 들었거든.”
“전화는?”
“꺼져 있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비광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일단 보고는 드리자고. 사정은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강태황에게 전화를 걸며 구석의 백운과 샤를 공주를 번갈아 바라보는 비광.
그런 비광의 입가로 묘한 미소가 그려졌다.
“공주님은 안전하시겠구만.”
* * *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백운 님.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한 거 같아 죄송하네요.”
인사를 건네며 작은 한숨을 내쉬는 샤를에 미소를 그려 보였다.
“아니에요. 아직 상황이 제대로 정리되지도 않았으니까요.”
조금 전 영국 왕실과 헌터청은 공식으로 협조 요청을 보내왔었다.
나란 개인이 아닌 대한민국 헌터청에 대한 지원 요청이었다.
요청 건은 샤를 엘리자베스의 경호였고 말이다.
# 1급 헌터 백운에겐 자율 행동권이 부여되어 있음. 백운이 가능하다면 동의, 불가능하다면 강제하는 건 불가.
요청에 대해 강태황 장관은 위와 같은 답변을 보내왔고.
난 날 바라보는 왕실과 헌터청 관계자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었다.
경호가 아니어도 같이 있어야 되긴 했으니까.
오늘 테러가 없었어도 샤를의 저택엔 조금 더 머물 예정이었었다.
대화를 더 나누고 싶다는 샤를의 요청을 떠나 잔다르크와 관련된 장소도 방문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샤를의 인맥이 닿는 한도에서 잔다르크의 정보도 조금 더 수집할 생각이었고 말이다.
“아까 기자회견에선 감사했어요. 말씀하기 곤란하셨을 텐데.”
“별말씀을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하는 일이었어요.”
기자회견장으로 가는 샤를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었다.
가능하면 내 이야기는 빼줄 수 있냐고 말이다.
지금은 안돼…!
귀찮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잔다르크의 정보를 얻으려면 영국 여기저기를 쏘다녀야 할 텐데.
벌써부터 부담스러운 시선을 받으며 움직이고 싶진 않았다.
그나저나 인원 엄청나구만.
주변을 한 번 쭉 둘러봤다.
노려진단 걸 알아서인지 버킹엄 궁전에 있던 모든 인원이 나와 샤를을 둘러싸고 있었다.
가까운 곳엔 역시 에밀리아와 이사벨도 서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로 가는 건가요?”
한참을 걷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에서 내려 저택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묘하게 방향이 달랐다.
“저 때문에 백운 님의 일정이 많이 늦춰졌으니까요.”
웃으며 말한 샤를이 어느 고성처럼 보이는 문 앞에 섰다.
굳게 닫혀 있는 문은 묘한 빛의 자물쇠로 묶여 있었다.
“지금의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할 생각이에요.”
샤를이 천천히 문으로 손을 뻗었다.
우우웅…!
샤를의 손이 닿기 무섭게 영국 왕실의 문양이 새겨졌다.
철컹!
커다란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기 시작하고.
“잔다르크가 갇혀 있다 화형당했다고 알려진.”
샤를이 어서 오라는 듯 안쪽으로 팔을 뻗어 보였다.
“성녀의 마지막 장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