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화. 하나뿐인
샤를을 지나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들어가면서도 약간 의문이 들었다.
이런 곳에 화형대 같은 숭헌 게 있다고?
세월이 지나며 다시 공사를 한 걸 수도 있겠지만 당장 외관만 봤을 땐 고즈넉하니 아담하게 지어진 고성이었다.
무언가 형을 집행하고 할 만한 장소처럼 보이진 않았다.
신기하네. 관리되어 온 건가.
고성이라 케케묵은 먼지가 가장 먼저 반겨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먼지가 날리긴커녕 왠지 모르게 따스한 기운이 가득한 고성.
처음 예상했던 삭막한 배경과는 너무 달라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예상이랑 다르죠?”
고성 입구에서 대기 중인 인원들을 뒤로하고 샤를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샤를도 오랜만에 온 건지 나와 비슷한 눈으로 주변을 훑고 있었다.
“네, 엄청요. 전 뭐랄까. 막연히 좀 섬뜩한 장소가 아닐까 생각했었거든요. 아무래도 한 사람이 오래 수감 생활을 한 건 물론 마지막엔 화형까지 당한 곳이니까요.”
“이해해요. 저도 처음 들어올 땐 엄청 무서웠었거든요.”
두어 발자국 앞서 간 샤를이 고성의 문으로 손을 올렸다.
“제가 이곳에 처음 온 건 아주 어렸을 때예요. 이제 막 영국이 뭐고 왕실이 뭐고를 알아가던 나이였죠.”
“호기심이 엄청 왕성하셨나 보네요. 무서운 장소를 혼자 올 생각을 다 하시고.”
미소 지은 샤를이 고개를 흔들었다.
살짝 눈을 감는 걸 보니 오래전 추억을 떠올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혼자가 아니었어요. 현 여왕이신 세이란 엘리자베스와 함께였죠.”
샤를이 담담한 목소리로 당시의 기억을 말해주었다.
“전 무서워서 오기 싫다고 했었어요.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해도 누군가 죽은 장소니까요. 하지만 할머니는 절 다독이셨어요. 괜찮으니까 한 번만 가보자고요. 아.”
무언가 생각난 듯 샤를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가 할머니라고 부른 건 비밀로 해주셔야 해요. 단둘이 있을 때만 부르기로 약속했거든요.”
“당연하죠!”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 샤를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억지로 오게 됐던 건데. 솔직히 정말 놀랐어요. 백운 님이 방금 말씀하셨던 것처럼 삭막하고 차가운 분위기일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 따스했었거든요. 포근했고요. 왜 할머니가 자주 오시는지 그제야 알겠더라고요.”
“여왕님께서 여길 자주 오셨었나요?”
“네. 저택에 있던 초상화 보셨나요? 그곳과 이 고성이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고 자주 들르던 장소예요. 워낙 바쁜 분이다 보니 매일 같이 오시진 못했지만, 정말 작은 틈이라도 나면 오실 정도였으니까요.”
계속해서 거닐며 샤를의 옛날이야기를 들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깥에서 느꼈던 온기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그 덕인지 샤를의 안색 역시 버킹엄 궁전에서보다 훨씬 좋아진 상태였고 말이다.
이게 감옥이라고?
그리고 난 점점 더 의아해지고 있었다.
고성 내부는 감옥과 거리가 멀었다.
쇠창살이나 쇠사슬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 내부 공간.
수감 생활을 위한 공간이라기보단 여생을 마무리하기에 좋은 장소 같았다.
“혹시 공주님도 여쭤보신 적 있나요? 잔다르크와 이곳에 관해서요. 왜냐면 제가 지금 공주님께 여쭤볼까 고민 중이었거든요. 여기가 진짜 감옥이 맞는지요.”
샤를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요. 어린 나인데 어떻게 참았겠어요. 정말 여기에 잔다르크가 갇혀 있었는지 여쭤봤었어요.”
“뭐라고 하시던가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샤를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그냥 웃기만 하셨어요. 알아야 할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라고요.”
의미심장한 답변이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만큼 장소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으니 당장 무언가를 확정 짓긴 힘들었다.
“그리고 공주님 말고 샤를 님 정도면 어떨까요?”
“넵?”
날 대각선으로 올려다보는 샤를에게 되묻자.
샤를이 싱긋 미소를 그려 보였다.
“너무 안 친해 보이잖아요. 만난 지 얼마 안 되긴 했지만요.”
“앗…. 넵. 샤, 샤를 님.”
“훨씬 좋네요.”
흡족한 얼굴을 한 샤를을 바라보다 저택의 초상화를 떠올렸다.
“혹시 저택에 있는 초상화랑 고성 사이엔 무슨 연관 같은 게 있을까요?”
공통점이라면 현 여왕인 세이란 엘리자베스가 아끼는 장소란 것이었다.
“저도 초상화에 그려진 게 누군지 몇 번이나 여쭤봤지만 대답은 아까와 같았어요.”
“그렇군요.”
비밀이 많은 분이셨구먼.
보통 왕실엔 말 못 할 비밀이 많다곤 듣긴 했었다.
감히 나 같은 일반인이 들어선 안 되는 그런 비밀들 말이다.
음?
샤를과 이야기를 나누며 얼마나 걸어 올라왔을까.
유난히 강하게 느껴지는 온기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나와 샤를은 고성의 꼭대기에 도달해 있었다.
“백운 님도 느껴지시죠?”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의 문을 바라봤다.
저곳인가.
온기는 저 안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한밤중인데도 이런 온기라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온돌이 깔렸나 싶을 정도였다.
스윽.
앞서 가던 샤를이 옆으로 비켜서며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내게 열어 보라는 듯한 제스쳐였다.
꼴깍.
왜 긴장되지.
의미를 알 수 없는 긴장감을 느끼며.
걸음을 옮겨 천천히 문고리를 돌렸다.
끼이익.
약간 낡은 소리와 함께 서서히 열리는 방문.
문틈 사이로 새하얀 달빛이 흘러나왔다.
“와우.”
다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방문에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옥탑방으로 보이는 곳엔 커다란 창문이 나 있었고, 그 창문 너머론 달이 환한 달빛을 뿌려내고 있었다.
불이 켜진 것도 아닌데 방 전체가 환하게 보일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시, 신은 계셨어.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달빛뿐만이 아니었다.
백색 월광 사이사이로 은은한 보랏빛이 녹아들어 있었다.
“백운 님? 괜찮으세요?”
“네 하하…! 그럼요. 달빛이 너무 예뻐서 좀 놀랐네요.”
얼굴로 기쁨이 새어나간 모양이었다.
걱정스레 묻는 샤를에게 손을 내저으며 슬금슬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계네.
정중앙 창문 아래의 탁상.
그 위론 낯익은 시계가 올려져 있었다.
보라색 빛은 그곳에서 뿜어지는 중이었다.
또, 똑같이 생겼네.
가까이서 보니 내가 가지고 있는 회중시계와 완전 판박이었다.
복사해서 붙여넣었다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고성에 오신 할머니는 이 시계를 한참이나 바라보곤 하셨어요. 엄청 따듯하고 좋은 추억을 떠올리는지 미소가 끊이질 않으셨고요.”
설명해주는 샤를을 보며 입술을 움찔거렸다.
보존을 위해서인지 시계는 두터운 유리 상자 안에 담겨있었다.
그 위론 아까 고성으로 들어오면서 봤던 영국 왕실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고 말이다.
“저…. 샤를 님.”
“네?”
샤를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시계 좀 만져봐도 될까요? 정말 아주 살짝 손끝이라도 대보고 싶어서요.”
절대 때 묻히지 않겠다는 의미로 손을 바지에 슥슥 닦아 보였다.
“원래는 안되지만.”
그런 날 바라보던 샤를이 웃으며 상자로 손을 뻗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우웅 소리와 함께 풀어 헤쳐지는 문양.
뒤이어 달칵 소리를 내며 상자의 뚜껑이 열렸다.
꼴깍.
“살살 만지셔야 해요. 백운 님은 힘이 세니까요.”
“감사합니다!”
장난스럽게 말하는 샤를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후.
상자 속 시계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라면 물 미세 조정할 때만큼이나 떨리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톡.
손끝이 회중시계와 닿으며 공간이 섞이기 시작했다.
* * *
제일 먼저 느껴진 건 따듯한 온기였다.
조금 전 방에서 느낀 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기라면.
지금은 앞에 밝혀진 무언가로부터 은은하게 전달되는 온기였다.
스륵.
눈을 뜨니 작은 램프등이 어두운 방을 밝히고 있었다.
커튼을 쳐둔 건지 달빛은 보이지 않았다.
“의외네요. 차가운 감옥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이 없는 건 물론 왠지 모르게 모든 걸 체념한 듯한 목소리였다.
“차가운 감옥에 있기는 너무 추운 날씨니까요.”
또 다른 목소리였다.
이전 목소리와는 달리 활기차고 명랑한 느낌이 가득했다.
“어차피 죽을 사람에 대한 마지막 자비라고 생각하면 되겠군요.”
“자비라…. 어떻게 생각하시든 그건 잔다르크 님의 자유입니다.”
!?
잔다르크라고 불린, 힘이 없던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램프등을 사이에 두고 방 안엔 두 개의 침대가 놓여 있었고.
각각의 침대 위로 목소리의 주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안 보이네.
램프등의 불빛은 그들의 어깨선까지만을 비추고 있었다.
“그런데 공주님께선 막강한 힘이라도 가지고 계신 건가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로 칼을 겨누었던 이와 단둘이 한 방에 계시다니.”
잔다르크가 자유로운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심지어 구속구도 없고요. 제가 아무리 남은 힘이 없다 하더라도 공주님을 해할만한 힘은 남아있습니다.”
“그러지 않을 거잖아요.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망설임 없는 답변에 잔다르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눈앞의 공주를 지켜볼 뿐이었다.
대체 뭔 상황이야.
턱을 슥슥 문질렀다.
잔다르크는 프랑스 진영에서 영국을 엄청나게 괴롭힌 인물이었다.
마지막엔 마녀로 몰려 화형당하기까지 했었는데.
어떻게 왕실 공주와 한방에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스아아아….
다음 대화를 기다리고 있을 때.
주변의 흐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비디오 빨리 감기를 누른 것처럼 말이다.
“이거 좀 먹어 보세요.”
“오늘은 뭘 하고 지냈나요?”
“왕이 돌아가셨어요.”
“제가 새로운 여왕이 될 거 같아요.”
들려오는 목소리는 모두 공주의 것이었다.
실제로 잔다르크가 대답을 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기억에서만 생략된 건지는 모르겠으나.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와중에도 느껴지고 있었다.
공주는 잔다르크를 위해 무척이나 노력하는 중이었다.
툭.
점점 빨라지던 흐름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흘러가고.
주변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오래전에 봤던 연극의 끝을 보는 느낌이었다.
“드디어 최후의 순간이네요.”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전이랑 같은 사람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목소리가 훨씬 밝아진 잔다르크였다.
“제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빛을 당신에게 줄게요.”
밝지만 힘이 없어 보이는 잔다르크.
무언가를 꺼내는 소리가 나더니 어둠 속에서 눈부신 황금빛이 뿜어졌다.
“시간이 흐르고 빛이 필요한 순간이 올 거예요.”
흐느끼고 있는 누군가에게 잔다르크가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전 여기까지지만 빛은 꺼지지 않을 테니. 이 빛이 필요할 때 밝혀질 수 있도록 해주세요.”
황금빛이 어둠을 집어삼키며 점점 더 크기를 키워나갔다.
순식간에 방안은 물론 내 눈앞까지 모두 물들인 황금빛.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잔다르크의 마지막 말이 들려왔다.
지금까지 들었던 어떤 때보다 밝고 행복한 목소리였다.
“부탁할게요. 내 하나뿐인 친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