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화. 건네진 빛
돌아오는 감각에 천천히 눈을 떴다.
눈뽕 엄청났네.
시계에서 손을 떼 눈을 비볐다.
갑자기 너무 강력한 빛을 직빵으로 맞아버렸다.
“백운 님. 혹시 울어요?”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샤를에 고개를 돌렸다.
좀 세게 비빈 터라 충혈은 됐지만 다행히 눈물은 흐르지 않고 있었다.
“아니에요. 눈에 뭐가 좀 들어가서요.”
말하면서 시계 주위로 기웃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공명을 마치며 목표했던 바는 이루었으나 너무 빨리 돌아서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았다.
“정말 멋진 시계네요.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 정도 다 봤다 싶을 때 몸을 빙글 돌렸다.
“다 보신 거예요? 더 보셔도 되는데요.”
“아닙니다. 하하! 충분히 다 봤습니다.”
샤를에게 엄지를 세우며 미소를 그려 보였다.
그런 날 지긋이 보더니 덩달아 웃으며 상자 앞으로 다가오는 샤를.
샤를이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허공으로 아까 걸려있던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충분하고말고.
샤를을 바라보며 조금 전 하고 온 공명을 떠올렸다.
솔직히 이것만으로 명확하게 손에 잡히는 건 없었다.
그럼에도 여기서 보랏빛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무기가 있으렷다!
회중시계 하나만 가지고 무작정 출발한 여정이었다.
실제로 잔다르크와 관련된 무기가 실존하는지, 실존한다면 내 무기고에 넣을 수 있는지조차 명확하지 않은 상태였고 말이다.
이제 조금 보이는 기분이랄까.
보랏빛을 발견하며 이런 불확실성이 사라진 것이었다.
아직 어딘지는 몰라도 잔다르크의 무기는 실존했다.
분명한 건 세 가지 정돈가.
잔다르크는 여기에서 죽었으며,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당시 여왕과 친하게 지냈고, 여왕에게 정체 모를 빛을 건넸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 세 가지 모두가 내가 알고 있던 사실과는 좀 달랐다.
마지막 상황의 분위기를 봐선 잔다르크가 화형을 당한 게 맞는지조차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뭔가 시야가 겁나 제한되는 공명이었어.
죽기 직전의 순간이었다는 건 알겠지만 그게 화형을 위해 끌려가기 직전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죽음을 목전에 둔 것인지가 불분명했다.
심지어는 공명의 첫 시작부터 어느 정도의 시점이 흐른 지도 확실치 않았고 말이다.
빛을 건네받은 사람을 만나봐야 하는데.
특수한 케이스로 여왕이 지금까지 살아있는 게 아니라면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 됐어요. 그럼 내려갈까요?”
“넵!”
샤를을 따라가며 입을 열었다.
“샤를 님. 여기서 화형이 집행됐던 건 맞나요? 집행됐다고만 하고 안됐다던가 그럴 가능성은 없을까요?”
“그건 아닐 거예요. 화형은 고성의 뒤편 광장 쪽에서 확실히 집행됐어요. 당시 상황에 관한 문건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거든요. 그림과 함께요. 왕실에 남은 것뿐만이 아니라 다른 자료도 비슷하게 말하고 있으니 아마 집행은 됐을 거예요.”
“그렇군요.”
턱을 슥슥 문질렀다.
혹시나 화형 한다! 라고 뻥카만 치고 안 한 건 아닐까 싶었는데.
여러 자료로 크로스 체크가 됐다니 잘못 짚은 모양이었다.
“백운 님. 저도 궁금한 게 있는데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어둑하고 좁은 계단 길.
먼저 내려가다 멈춘 샤를이 내 쪽을 올려다봤다.
“넵! 말씀하세요.”
해맑게 대답하며 샤를을 마주 봤다.
약간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샤를이 내 팔목을 잡아 왔다.
“!?”
갑작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라 굳어 있는 사이.
맑고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듯한 샤를의 벽안이 얼굴로 가까워졌다.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무, 무엇을…?”
“방에서 시계를 만지고 나서 1초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
샤를의 입가로 호기심 넘치는 미소가 그려졌다.
“어딜 다녀오신 건가요?”
* * *
런던에서 멀지 않은 영국의 해안가 도시.
어둠이 깔린 골목 사이로 발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름다운 도시구나.”
발리아가 쓴웃음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기가 찰 정도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도시였다.
“이렇게 평화를 만끽하며 살아가고 있었다니.”
광기 어린 빛이 발리아의 눈을 스쳤다.
아주 오래전 뜬금없는 변수의 등장으로 실패해버렸던 과업.
그날 이후 발리아는 한순간도 편히 자본 적이 없었다.
너무 억울했었기 때문이다.
한 발자국만 더 나아갔으면 끝났을 일이 수백 년이란 시간이나 지체되어버린 탓이었다.
그리고 그런 억울함을 선사하는데 큰 역할을 한 영국이 이렇게 평화롭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
“대가를 치러야겠지.”
“크르륵…!”
발리아의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한두 명이 아닌 수십 수백의 발걸음 소리였다.
곧이어 그늘진 곳에서 나온 사람들, 정확히는 두어 시간 전까지 사람이었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의 구울들이여.”
발리아가 초록빛이 감도는 구울 군단을 바라봤다.
버킹엄 궁전 사건 전부터 영국 각지에 뿌려놨던 재앙의 씨앗.
씨앗은 발리아가 원했던 시기에 맞춰 조금씩 개화하는 중이었다.
“어디서 이렇게 썩은 내가 진동하나 했더니.”
“…?”
발리아의 귀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철컥.
골목 앞 광장.
작은 불빛이 비치는 아래로 백색 가운을 입은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말을 건넨 건 그중에서도 맨 앞에 있는 큰 덩치의 사내였다.
사내는 등 뒤로 키만큼이나 거대한 십자가를 메고 있었다.
“성기사단 떨거지들인가.”
그들을 본 발리아가 조소를 머금었다.
어느 시점부터 나타나 자신의 일을 방해하기 시작한 존재들이었다.
결정적이진 않아도 알게 모르게 시간을 지체시켰던 성가신 존재.
“떨거지들이라니. 말이 심하시네. 난 레이몬드라는 멋진 이름이 있는데 말이야. 그런 말을 하는 넌 구울의 왕이라도 되는 거냐?”
자신을 레이몬드라고 밝힌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이 타이밍에 나타난 걸 보면 버킹엄 궁전과 관련이 있겠지? 누가 시킨 거냐.”
레이몬드와 성기사단은 버킹엄 궁전에서 구울과 비슷한 존재들이 있었다는 정보를 입수했었고.
관련된 자들이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해 런던 공항부터 여기까지 추적을 해온 것이었다.
때마침 밤이 깊어지자 지독한 악취까지 나 한결 찾기가 수월했고 말이다.
“빛을 잃어버리고 시간이 꽤 흐르지 않았나? 조막만 한 힘만 가지고 있을 텐데 말투가 꽤나 기고만장하군.”
발리아의 말에 레이몬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주 오래전의 일로 소수의 성기사단이 아니라면 알지 못할 일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널 더욱더 잡고 싶어지네. 아는 게 좀 많을 거 같단 말이야.”
“뭘 알고 싶은 거지?”
“프랑스의 왕 루칸을 뒤에서 조종한 배후. 터져버려서 직접 보진 못했지만 루칸은 아주 공들여 만들어진 구울이었을 거 같거든. 그걸 만든 놈이 궁금하다. 아마 네 주인이기도 할 테고.”
레이몬드의 말에 발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여는 발리아.
“아까 내게 구울의 왕이라도 되느냐고 물었었지.”
“…?”
발리아의 입에서 불길한 초록색 빛이 뿜어지고.
“내 이름은 발리아.”
“!!!”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드는 레이몬드를 향해 수백 마리의 구울이 돌격을 시작했다.
“네가 찾고 있는 태초의 구울이다.”
* * *
후릅.
찻잔을 기울여 말라붙은 목으로 수분을 보급해주었다.
식은땀이 흐른 등이 잘 마르도록 의자에서 몸을 뗀 건 물론이었다.
“신기한 능력이네요.”
마찬가지로 차를 기울인 샤를이 미소를 머금었다.
“하하…. 그렇죠.”
머리를 긁적이며 애써 미소를 그려 보였다.
물론 미소와 별개로 난 열심히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는 중이었다.
- 어딜 다녀오신 건가요?
고성에서 샤를의 질문과 함께 시작된 등 땀.
전혀 예상조차 못 했던 질문이라 순간 얼어버리고 말았었다.
- 곤란한 부분이라면 말씀하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미련없이 등을 돌리고 다시 내려가는 샤를을 보며.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두뇌를 풀가동 했었다.
저택에 도착하면 말해주자 라는 결론을 내렸고 말이다.
딱히 숨겨야 할 건 아니니까.
굳이 떠벌리고 다니지 않았다뿐이지 내 능력을 아는 사람도 이미 몇 있었다.
널리 알려진다고 해서 딱히 내가 피해를 볼 것도 없었다.
전투에 사용되는 건 내 각각의 무기 능력이지 공명이 아니었다.
“제 질문이 백운 님을 당황하게 만들었나 보네요.”
이번엔 부정하지 않았다.
“이런 질문을 먼저 받은 게 처음이라서요. 대부분은 모르시니까요.”
“그렇겠죠.”
샤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시도 쉬지 않고 주변으로 생명력을 부여하는 샤를의 능력.
샤를은 단순히 생명력만 불어넣는 게 아니었다.
간접적으로 대상의 현재 상태와 기운을 느낄 수 있는데.
방에 있던 나의 기운이 순간적으로 다른 장소에 갔다 온 것처럼 변하며 샤를이 눈치챈 것이었다.
저택에 도착해 이야기를 나눠보니 샤를은 조금 전의 현상과 무기왕의 능력과도 어느 정도 접점을 만든 상태였다.
날카로운 사람이야.
차를 다시 한 잔 넘기는 사이 샤를이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대로 방에서 잔다르크와 대화를 나눈 건 당대 여왕이셨던 페리아 님일 거예요.”
샤를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말씀하신 잔다르크가 여왕에게 건넸다는 빛에는 저도 관심이 많아요.”
“…?”
뜻밖의 말에 샤를을 쳐다봤다.
무언가 주문을 외는가 싶더니 서재에서 책 한 권을 꺼내는 샤를.
내가 앉은 테이블로 책을 가져온 샤를이 첫 장을 펼쳤다.
사락.
오…?
책이 스스로 넘어가며 빛의 그림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글자가 아닌 빛으로 기록된 책이었다.
“공식적인 역사엔 없는 내용이에요. 역사에 쓸 수도 없는 내용이고요.”
“음? 저건 뭐예요?”
그림에 집중하던 중 칼로 베여도 다시 몸을 일으키는 놈을 응시했다.
버킹엄 궁전에서 봤던 놈들과 비슷한 것 같아서였다.
“죽지 않는 존재, 구울.”
“구울요? 좀비 같은?”
고개를 끄덕인 샤를이 말을 이어갔다.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온 존재예요.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순식간에 퍼져 인간을 위협해 온 건 물론이고, 적지 않은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고도 알려져 있어요.”
책의 그림이 엉겨 붙은 수많은 병사와 구울을 그려냈다.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일어난 백 년 전쟁마저도요.”
점점 커지는 스케일에 턱을 슥슥 문질렀다.
갑자기 구울이라니.
버킹엄 궁전에서 봤던 놈들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궁전에서 보니 죽질 않던데 지금까진 어떻게 막아온 건가요?”
“구울을 막아온 존재들이 있어요. 공식적이진 않지만 성기사단이라고 불리는 집단이죠. 영국 정부와 왕실의 아주 고위 간부들만 만나는 게 가능하고요.”
반짝.
책은 성기사단으로 보이는 집단이 밝게 빛나는 무언가를 건네받는 장면을 그리고 있었다.
“성기사단을 만든 게 누군지, 빛을 건네온 건 누군지는 저 역시 잘 알지 못해요. 그저 제가 아는 건 단 하나예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구울을 막아왔던 성기사단의 빛이 점점 흐려지다 못해.”
눈을 약간 찌푸린 샤를이 작은 한숨을 뱉어냈다.
“사라지고 있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