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개전
뚝뚝.
레이몬드의 시야로 붉은 피가 떨어져 내렸다.
가슴에 얹어진 손에선 뜨거운 액체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런.’
가쁜 숨을 몰아쉬며 레이몬드가 주변을 둘러봤다.
수많은 구울이 죽어있었지만, 그걸 뒤로 하고 새로운 구울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레이몬드와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이들이었다.
‘다 당해버렸나.’
절망적인 상황을 지켜보는 레이몬드의 상태 역시 정상은 아니었다.
몸 여기저기는 구울이 할퀸 흔적과 물어뜯은 상처로 가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몬드 역시 동료들과 같은 존재가 될 터였다.
‘갑자기 발리아라니. 반칙 아니냐고.’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레이몬드가 멀어져 가는 발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처음에 그 이름을 들었을 땐 잘못 들었거나 거짓말하는 거라 생각했었다.
이런 뜬금없는 타이밍에 발리아를 만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었기 때문이다.
- 그를 죽여야 끝나는 싸움이지만, 그를 만난다면 맞서서는 안 된다.
오래전 전대 성기사단 단장이 해준 말이었다.
아이러니한 말이 아닐 수도 없었다.
성기사단에게 있어 꼭 죽여야 하지만 싸워서는 안 되는 존재라니.
당시에는 단장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 못 했었다.
‘이래서였구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태초의 구울, 발리아.
그는 살아온 시간만큼이나 말도 안 되게 강력했다.
단순히 구울을 만들고 다루는 능력뿐만이 아니었다.
눈으로 따라가기 힘든 움직임과 시도 때도 없이 뿜어지는 엄청난 화력의 공격까지.
지금 이곳에 구울 군단이 없었더라도 발리아는 이기는 게 불가능한 상대였다.
‘지금보다 빛이 훨씬 강했을 때도 못 죽였던 상대이니.’
레이몬드가 이를 악물며 품으로 손을 넣었다.
그토록 혐오하던 존재로 변하는 건 어떻게든 막고 싶었으나.
무책임하게 목숨을 끊을 순 없었다.
‘알려야 한다.’
종종 열댓 마리 씩 나오던 것과는 상황이 달랐다.
이미 눈앞에 있는 것만 수백 마리였고 무엇보다 발리아가 직접 영국에 와있었다.
아무리 찾아도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던 발리아가 대놓고 영국에 왔다는 것.
이는 곧 한 가지를 의미했다.
더 이상 자신을 위협할 힘은 없으며 영국을 집어삼킬 수 있다고 스스로가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키아아악!”
레이몬드를 향해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동료였던 이들이 구울로 변하여 다가왔다.
“거 기분 참 더럽구만.”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쥐는 레이몬드.
다가오는 구울들을 보며 몇 마디 말을 중얼거린 레이몬드가 힘을 줘 상자를 깨뜨렸다.
화아아악!
상자에서 뿜어져 하늘 높은 곳까지 솟아오른 황금색 빛.
빛에 삼켜진 구울의 몸이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졌다.
“저런 걸 숨기고 있었군.”
걸어가던 발리아가 등을 돌려 하늘로 뿌려진 빛을 응시했다.
빛이 사라진 성기사단치고는 제법 강한 세기였다.
물론 발리아에겐 조금도 영향이 없을 양이었지만 말이다.
“나름 단장이란 건가.”
발리아가 조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 멀지 않은 런던에 이곳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뿌린 빛일 터였다.
빛을 발견한 성기사단의 누군가는 레이몬드가 남긴 메시지를 읽어낼 터였다.
“차라리 잘 됐군.”
과거라면 몰라도 지금은 자신의 존재가 알려지는 게 썩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사방에서 엄청난 수의 구울이 발리아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수백에서 수천까지 불어나는 구울들 사이에서 두 팔을 활짝 펼치는 발리아.
입가 한가득 미소를 그린 발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개전이다.”
* * *
책이 덮이며 허공으로 그려지던 그림이 사라졌다.
백 년 전쟁이 프랑스와 영국만의 싸움이 아니었단 건가.
책에선 구울이 계속해서 등장했었다.
구울은 양 진영 중 딱히 어느 곳에 속해 있는 것 같진 않았었고 말이다.
음?
시간이 늦어 몹시 고요하던 저택 밖.
갑자기 분주해지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백운 님?”
“잠시만요.”
의아한 얼굴의 샤를을 뒤로하고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저택 후문으론 한 대의 세단이 들어와 있었다.
지붕으로 커다란 십자가가 그려진 차량이었다.
얼레.
차에서 내린 이들은 조금 전 책의 그림에서 본 옷을 입고 있었다.
샤를이 말한 성기사단인 것 같았다.
저벅.
저택을 지키고 있던 에밀리아와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안으로 들어오는 성기사단.
조금 기다리고 있자 노크 소리가 들려오며 에밀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엔 조금 전에 봤던 성기사단이 함께였다.
“에밀리아?”
의아해하는 샤를에게 에밀리아가 입을 열었다.
“샤를 공주님. 지금 여왕님께서 공주님을 찾으신다고 합니다.”
말을 듣기 무섭게 샤를이 몸을 일으켰다.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 같았다.
분위기 보소.
에밀리아는 그렇다 치고 뒤에 있는 성기사단의 얼굴은 몹시 굳어있었다.
샤를에게 예를 표한 걸 마지막으로 거의 돌덩어리 수준이었다.
타이밍 보소 휴.
이제 책의 내용이 끝나고 샤를에게 당시 여왕에 대해 물으려던 찰나였었다.
잔다르크가 건넨 빛의 내용도 좀 추적해보고 말이다.
“이렇게 갑자기 찾으신다는 건 무슨 일이 생겼나 보네요. 바로 출발할게요.”
나, 나도 가야지.
어쨌든 샤를의 호위 임무를 맡고 있는 상태였다.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라고 했으니 열심히 수행할 생각이었다.
주섬주섬.
눈에 띄지 않게 짐을 챙기고 있자 나갈 채비를 마친 샤를이 날 돌아봤다.
“늦은 시간인데 죄송해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백운 님.”
그러면서 내게 가까이 다가온 샤를이 목소리를 낮췄다.
“할머니께 잔다르크와 건네진 빛에 관해서도 꼭 여쭤볼게요.”
“!?”
말을 마치고 먼저 문을 나서는 샤를에.
따라나서며 코를 슥 문질렀다.
“그저 빛.”
* * *
곧장 출발해 도착한 엘리자베스 여왕의 저택.
저택에 들어선 순간부터 다시 한번 땀이 흘러내렸다.
오, 옷 갈아입고 올걸.
워낙 급박하게 불려온 지라 그럴 시간이 없었긴 하지만.
저택 안에 늘어선 정장 차림의 사람들을 보자 슬리퍼라도 갈아 신고 올 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분위기 살벌하네.
꽤 높은 고위 간부들 같았다.
그중엔 가끔 TV에서 보던 할아버지도 계셨고 말이다.
“여왕님은 총리님과 말씀을 나누고 계십니다.”
“무슨 일인가요?”
구석에 있던 성기사 단원 한 명이 샤를에게 걸어왔다.
중후한 느낌을 가진 남자였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공주님. 성기사단의 부단장 로테입니다.”
“안녕하세요. 로테 님.”
잠시 침통한 표정을 지은 로테가 입을 열었다.
“레이몬드 단장이 죽었습니다.”
“네…!? 그게 무슨.”
“정확한 사정은 알지 못합니다. 저희 또한 아직 그곳으로 가보지 못했으니까요.”
옆에 서 있던 간부가 테블릿을 가져와 샤를에게 보여주었다.
# 크르르.
뭐지.
뭔가 심상치 않은 소리에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눈에 들어오는 테블릿의 영상.
시, 시발…?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공중에서 찍은 영상이었다.
영상 속엔 수천을 넘어 수만 마리는 되는 듯한 구울이 한쪽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 쾅!
얼마 지나지 않아 폭발음이 들려오며 영상은 끝이 났다.
누군가에 의해 파괴된 것 같았다.
“저런 상황이라 못 가보신 거군요. 단장님이 죽은 곳으로.”
“맞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로테가 말을 이었다.
“레이몬드 단장이 죽으면서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장급만 가지고 다니는 상자로 위기 상황에만 사용하게 되어있습니다.”
품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보이는 로테.
강한 빛을 머금고 있는 건 물론 다른 성기사단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물건이라고 로테가 설명을 덧붙였다.
“남겨진 메시지는 뭔가요?”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한 로테가 천천히 목소리를 냈다.
“영국이 위험하다. 태초의 구울 발리아가 이곳에 도달했다.”
“발리아…?”
샤를도 처음 듣는 이름인 모양이었다.
어쨌든 대충 분위기와 내용만 봤을 땐 겁나 센 놈이 도착했다는 것 같았다.
“샤를 공주님.”
무언가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 방에서 나온 영국 총리가 샤를을 바라봤다.
“여왕님께서 단둘이 말씀을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잠시 다녀올게요. 백운 님.”
내게 말을 건넨 샤를이 방으로 향하고.
꼴깍.
홀로 남겨진 채 마주한 총리에 이마로 땀이 흘렀다.
총리 역시 지난날 야반도주하며 바람을 맞힌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차, 착하게 살자.
“안녕하세요. 백운 님.”
“안녕하세요…!”
호다닥 고개를 숙이자 총리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드디어 뵙게 됐네요. 정말 반갑습니다.”
내민 총리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버킹엄 궁전에서의 일은 전부 전해 들었습니다. 항상 백운 님껜 너무나 감사한 일들뿐이군요.”
“별말씀을요. 하하.”
멋쩍게 웃어 보이자 총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자리에서 말로만 감사드리면 안 된다는 걸 잘 알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죄송할 따름입니다. 용서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백운 님.”
“요, 용서라뇨. 당치도 않는 말씀을… 하하.”
조금만 더 대화를 나눴다간 몸이 바들바들 떨릴 것 같았다.
이렇게 몸 둘 바 모르겠는 대화는 아주 오랜만이었다.
“총리님.”
곁으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다가왔다.
“구울의 목적지가 나왔습니다.”
“어디죠?”
총리의 물음에 마른침을 삼킨 남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런던입니다.”
* * *
“어서오렴. 샤를.”
방으로 들어간 샤를을 반겨주는 세이란 엘리자베스.
세이란은 방 중앙에 위치한 의자에 앉아있었다.
“할머니.”
다가가 세이란을 꼭 끌어안은 샤를이 옆에 놓인 의자로 몸을 앉혔다.
그런 샤를을 한참이나 조용히 바라보는 세이란.
“미안하구나.”
세이란이 가장 먼저 건넨 말이었다.
얼굴에도 역시 짙은 죄책감과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세이란이 샤를의 손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네게 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단다. 정확히는 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지.”
샤를이 조용히 세이란의 말을 경청했다.
어렸을 때부터 느끼긴 했었다.
세이란이 자신에게 모든 걸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샤를은 알면서도 모른 척했었다.
세이란이 그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거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왕실 여왕이 되는 순간 넘겨받는 건 지위와 권한뿐만이 아니란다.”
세이란이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기억 또한 넘겨받게 되지.”
“기억요…?”
뜻밖의 말에 샤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이란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왕실의 모든 왕이 지녔던 기억.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기억이란다. 난 이걸 샤를 네게 주고 싶지 않았었단다.”
세이란이 조용히 샤를을 끌어안았다.
“소중한 기억이지만, 동시에 떠안을 필요가 없는 책임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상황이 그걸 허락하지 않으니.”
샤를의 머리를 쓰다듬은 세이란이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네게 기억을 전해주어야 할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