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다른 빛
첫 만남 이후로 페리아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잔다르크를 찾아왔다.
찾아오는 이유도 예상과 달리 특이했다.
페리아는 잔다르크에게 투항하고 영국을 위해 싸우라 말하거나 프랑스의 내부 정보를 캐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오늘은 뭘 먹었다거나 자신이 곧 여왕이 될 것 같다는 등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건네왔다.
“정말 달콤할 거 같네요.”
언제부터였을까.
잔다르크는 어느 순간부터 페리아의 밝은 기운에 동화되어 질문에 대답하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엔 밝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말이다.
‘괜찮겠지. 어차피 곧 끝이니까.’
잔다르크는 자신의 변화에 낯설어하면서도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었다.
이제 곧 정해진 화형 날짜가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온 화형식 날.
끼이익.
열린 문 사이로 페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공주에서 왕이 되며 바빠진 페리아가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온 것이라 생각했었다.
“오늘은 있죠.”
하지만 그날도 다르지 않았다.
페리아는 며칠 전과 다름없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집행은 언제인가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대화에 잔다르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미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흘러있었다.
“화형식요?”
잠시 말을 멈추며 의자로 몸을 기대는 페리아.
페리아의 입가로 묘한 미소가 그려졌다.
“형은 이미 집행됐어요.”
“네…?”
의아해하는 잔다르크에 페리아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국에서 당신을 부르는 이름은 다양했어요. 구울을 다루는 마녀,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일 흑마법사 등으로요. 하지만, 아니었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제가 자의든 타의든 이미 수많은 영국 백성을 죽였다는 사실이죠.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아들이었을 사람들을요.”
“맞아요. 이미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어요. 하지만 아직 정해지지 않은 미래는 바꿀 수 있죠.”
페리아의 말에 잔다르크가 고개를 숙였다.
대략적이지만 상황을 알 것 같았다.
“대신들과 교회를 설득하신 거군요. 절 죽이기보단 앞으로 있을 발리아와의 싸움에 힘을 보태라고요.”
“정확해요. 아직 왕이 되기 전인 공주 시절부터 했답니다. 잔다르크는 마녀가 아닌 성녀라고요. 아, 물론 이와 별개로 화형식은 집행할 수밖에 없었어요. 당신이 공식적으로 죽지 않으면 당신에게 향해 있는 분노가 길을 잃고 폭주해버릴 테니까요.”
“왜 그러셨나요?”
잔다르크가 슬픈 눈으로 페리아를 응시했다.
지금까지 대화하며 잔다르크는 잘 알고 있었다.
페리아는 그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하는 공주이자 왕이었다.
그런 페리아가 모든 이를 속이는 선택을 한 것이었다.
“왜 모두를 속이면서까지 이런 짓을 하냐고요? 당연히.”
이번엔 페리아가 흔들림 없는 눈으로 잔다르크를 바라봤다.
“그것 이상으로 당신을 살리고 싶었으니까요.”
“송구스럽지만 이번엔 잘못 선택하신 거예요. 제겐 더 이상 빛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발리아가 아니라 구울 한 마리조차 죽일 수 없어요.”
“잘 알고 있어요.”
“그럼 어째서…?”
페리아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제가 속인 건 백성뿐만이 아니에요. 대신들과 교회마저 속여버렸죠. 절 제외한 모두를요.”
잔다르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페리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아서였다.
“찬란한 빛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어린 시절부터 피를 뒤집어쓰며 그 빛을 잃어버린 성녀, 잔다르크. 전 당신을 다시 전쟁터로 내몰 생각이 없어요.”
페리아가 굳게 닫혀 있던 문의 결계를 풀어헤쳤다.
“전쟁이 없는 곳까지 멀리 떠나세요. 그리고 여생을 살아가세요. 이것이 누구보다 선하고 좋은 친구인 당신에게….”
페리아의 입가로 밝은 미소가 그려졌다.
“제가 원하는 전부예요.”
* * *
“갸아아악…?”
뜻밖의 이야기에 입을 벌렸다.
화형식은 열렸지만 잔다르크는 없었다니.
안 좋게 해석하면 대국민 사기극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 길로 난 페리아가 준비해둔 말을 타고 런던의 고성을 떠났어.”
잔다르크의 입가로 옅은 미소가 어렸다.
“페리아는 처음부터 내게 무언가를 바라고 접근한 게 아니었던 거지. 그저 내가 웃길 바랐고, 그저 내가 살아가길 바랐던 거야.”
두 사람이 만난 시간이 긴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잔다르크는 페리아의 소중한 친구가 되었고.
페리아는 큰 무리수를 둬서까지 잔다르크를 살려낸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셨군요.”
저택에 있던 초상화를 떠올렸다.
초상화의 잔다르크는 조금 전 기억에서 본 것보다 최소 20년은 더 흐른 모습이었다.
“맞아.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 성은 발리아의 기습을 받았어. 이미 영국에도 심복이 심어져 있었던 건지 한밤중에 나타나선 안되는 위치에 발리아와 구울 군단이 모습을 드러냈거든.”
다시 눈앞으로 새로운 배경이 떠올랐다.
* * *
“당신이 발리아군요.”
페리아가 낭패 섞인 얼굴로 정면을 응시했다.
수천의 구울과 함께 갑작스럽게 등장한 태초의 구울 발리아.
성 내부에서 모습을 드러낸 덕에 속수무책으로 여기까지 뚫려버린 것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여왕 폐하.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되었군요.”
페리아의 시선이 발리아를 막고 있는 기사들에게 향했다.
교회의 빛을 두르곤 있으나 발리아에겐 어떠한 상처도 입히지 못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전 당신을 죽일 생각이 없으니까요.”
“뭐라고요?”
“당신은 제 구울로서 아주 오랜 시간을 살아가게 될 겁니다. 제가 시키는 대로 말하고 움직이면서요. 제 정복 전쟁에 쓰이는 훌륭한 한 마리의 말이 되는 겁니다.”
페리아가 난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금 전 구울이 된 기사들을 보니 허풍이 아니었다.
발리아에겐 대상을 구울로 만들어 다루는 힘이 있었다.
“자 그럼.”
퍼석!
눈앞의 기사들을 손쉽게 치워버린 발리아가 페리아에게 걸음을 옮겼다.
‘정말… 큰일이네요.’
크게 한숨을 내쉰 페리아가 의자에 몸을 묻었다.
발리아의 말대로라면 비단 프랑스와 영국만의 일이 아니었다.
이제 저 불길한 초록빛이 온 세상으로 번져나갈 터였다.
“멈추세요.”
그때 페리아의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젠가 잔다르크에게 알려줬던 왕궁의 비밀 통로.
그곳에서 낯익은 깃발과 창을 든 잔다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잔다르크…?”
일순간 발리아의 얼굴이 구겨졌다.
당연히 화형당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살아있다니.
“허.”
뜻밖의 등장에 놀라움도 잠시.
대충 상황을 눈치챈 발리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무슨 소용이지? 빛을 모두 잃은 성녀 따위가 나타난다고 무언가 달라지기라도 하는 건가?”
잔다르크가 페리아와 발리아 사이를 가로막으며 섰다.
발리아의 말대로 잔다르크에겐 어떠한 작은 빛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조소를 머금은 발리아를 보며 잔다르크가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
“잠시 길을 잃었을 뿐이지.”
잔다르크가 두 손으로 움켜쥔 창을 바닥으로 내려놨다.
창이 세워지며 높은 곳에서 마리아와 천사가 그려진 백색의 깃발이 펄럭였다.
“나 잔다르크는 지금 이 순간부터 나의 친우와 그녀가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한.”
펄럭이는 깃발에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빛이 되리라.”
* * *
미소를 머금은 잔다르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결국 발리아를 죽이진 못했어. 큰 상처를 입히고 몰아냈을 뿐이지.”
잔다르크가 이후의 여생을 이야기해주었다.
자신의 빛을 나누며 성기사단을 만들었고 드물지만 어디선가 끊임없이 나타나는 구울을 상대로 싸워왔다는 이야기였다.
여왕 페리아와는 일평생 친한 친우로 살아온 건 물론이었다.
이제야 고성의 기운이 납득이 가는구먼.
화형식은 열렸으나 화형은 당하지 않은 고성.
그곳은 사람이 죽은 끔찍한 장소 같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서로를 위한 두 사람의 온기와 빛이 머무른 따듯한 장소였다.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이야기를 마치기 무섭게 잔다르크의 손으로 기다란 창이 생겨났다.
기억에서 봤던 깃발이 달린 건 물론 커다란 황금색 날이 뻗은 창.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를 눈부심이 느껴지는 창이었다.
저벅.
잔다르크가 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의 왕이 걷는 길로 어둠이 몰려든다면.”
내 앞까지 다가온 잔다르크가 창을 세운 채 한쪽 무릎을 꿇으며 천천히 몸을 숙였다.
“그 길을 밝히는 빛이 될 것을 맹세합니다.”
“…!”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신 후.
스윽.
나 역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으로 창을 붙잡으며.
“성녀 잔다르크의 빛.”
몸을 숙인 잔다르크에게 내 머리를 맞대었다.
“확실히 이어받았습니다.”
* * *
머리를 맞댄 후 종료된 공명.
천천히 눈을 뜨자 앞으로 잔다르크의 조각상이 보였다.
들고 있던 창은 깔끔하게 사라진 후였다.
빛의 창이라.
창의 이름이 머리로 떠올랐다.
성녀 잔다르크가 사용한 무기, 생카트나.
지금까지 내가 얻은 것들과는 약간 다른 성질을 가진 무기였다.
구체적인 대상이 정해져 있진 않으나 언데드 혹은 어둠 계통의 힘을 사용하는 적에겐 치명상을 줄 수 있는 무기.
동시에 주변으로 빛을 뿌려내는 생카트나는 어떻게 보면 아무거나 벨 수 없는 악귀참도와 비슷한 느낌이 나기도 했다.
“돌아오셨군요.”
조금 전 끝난 공명을 곱씹다 옆을 돌아봤다.
내가 어딘가 다녀온 걸 알고 있는 샤를.
샤를은 조용히 내가 입을 열길 기다리고 있었다.
“빛은 확실히 이어받았어요.”
“…!”
더 설명하기보단 몸을 돌려 들어온 입구를 바라봤다.
준비는 완료됐으니 여기서 시간을 더 지체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 가볼까요?”
“네…!”
샤를이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늦을 수도 있다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저희는 방어선으로 돌아갈게요.”
신부에게 말을 건넨 샤를이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공주님.”
샤를의 미소에서 무언가를 읽은 걸까.
신부는 안에 있던 창이 사라졌음에도 무언가를 더 캐묻진 않았다.
그저 샤를과 내게 고개를 숙이며 조심하라는 말을 할 뿐이었다.
저벅.
성당 밖으로 나가 여전히 바글바글한 구울들을 응시했다.
딱 쓸어버리기 좋게 옹기종기 잘 모여있는 구울들.
[이카로스 - 칼데아 윙]
먼저 날개를 꺼내며 연기로 주변을 뒤덮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다음으론 샤를을 한 손에 안전하게 안은 뒤.
남은 오른손을 천천히 옆으로 뻗어냈다.
페리아 여왕과 여왕이 소중히 여기는 걸 지키기 위해 빛이 되었던 잔다르크.
난 이런 따스한 느낌과는 조금 다른 빛이 될 생각이었다.
자 그럼.
구울 군단을 바라보며 입가 한가득 미소를 그려 보였다.
찢으러 가볼까.
[잔다르크 - 생카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