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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왕이 헌터로 회귀했다-321화 (321/473)

321화. 구울 무기왕

발리아가 녹아내린 몸을 내려다봤다.

분명 빛이 완전히 닿기 전에 피했음에도 이 정도라니.

조금만 더 늦게 움직였다면 정말 위험할 뻔했다.

‘비교가 안 되는 빛이다.’

잔다르크보다 더 매섭고 강렬한 빛.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결국엔 내 승리구나.’

발리아의 주변으론 짙은 초록빛이 거미줄처럼 빼곡하게 퍼져 있었다.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거미줄은 백운을 빠짐없이 감싼 상태였고 말이다.

번뜩.

여기에 더해 발리아의 몸에서 생겨난 거대한 동공이 백운을 주시하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초록빛을 백운에게 주입하고 있는 건 물론이었다.

‘태초의 기적.’

허공에 나타난 동공의 힘이 강해질수록 발리아의 눈은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태초의 기적을 사용한 대가였다.

그럼에도 발리아는 웃고 있었다.

‘잔다르크의 빛마저 억누르는 힘이다.’

태초의 구울에게만 주어지는 단 한 번의 기적.

시력을 제물로 바치며 시작되는 의식은 그야말로 절대적이었다.

상대의 강함이나 찬란한 빛 따위는 이 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모든 걸 무시한 채 무조건 대상을 구울로 만드는 절대적인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스륵.

완전히 사라진 시력에 발리아가 눈을 감았다.

끝나지 않는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하며 그토록 원하던 세상을 손에 넣는 것.

이것에 비하면 시야 따위는 몇 번이고 바칠 수 있었다.

다른 구울을 통한 시야 공유가 여전히 가능하니 평생 앞을 못 보는 것도 아니었다.

‘이 힘을 사용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백운의 등장 전까지만 해도 발리아는 이 힘을 사용할 계획이 전혀 없었다.

굳이 이게 아니어도 구울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식간에 구울 군단을 휩쓸어버린 백운을 보며 생각이 바뀌었었다.

일반적인 방법으론 가까이 접근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칼날의 빛.

스치기만 해도 몸이 녹는 빛을 제압할 방법은 태초의 기적뿐이었다.

‘그때 사용하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군.’

발리아의 입가로 다시 한번 미소가 그려졌다.

과거 잔다르크와의 마지막 싸움에서 발리아는 이 힘을 사용하지 못했었다.

방심한 탓에 무언가를 할 새도 없이 잔다르크의 빛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탓이었다.

‘이런 걸 인간들은 전화위복이라 부른다지.’

당시엔 처음부터 태초의 기적을 사용해 잔다르크를 구울로 만들지 못한 것에 개탄했었다.

하지만 지금 구울화가 진행 중인 백운을 보고 있자니 정말이지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인간 중에 저런 괴물이 존재할 줄은.’

백운은 발리아와 구면이었다.

버킹엄 궁전에서 샤를을 구해냈던 정체불명의 남자, 백운.

당시 발리아는 백운을 자신의 위업에 위협이 될만한 인물로 분류하지 않았었다.

의아한 구석이 몇 가지 있었으나 그렇게까지 위험해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 콰아아아아아---!

잔다르크의 빛과 함께 등장해 구울 군단을 순식간에 전멸시켜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 없애야 한다.

그 모습을 보며 발리아는 강하게 확신했었다.

백운이 존재하는 이상 자신의 전쟁은 절대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동시에 저런 괴물을 구울로 만들어 아래에 둘 수만 있다면 그 어떠한 적도 단숨에 무릎 꿇릴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크큭!”

발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백운의 능력은 저게 다가 아닐 터였다.

분명 숨겨 둔 능력이 훨씬 많을 테고 그 능력 하나하나는 말도 안 되게 강력할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엔 자신이 그 모든 능력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된다.

스윽.

발리아가 천천히 몸을 돌려 방어선의 인간들을 응시했다.

“아… 안돼.”

백운이 등장하며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밝아졌던 얼굴이.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깊은 절망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 * *

백운의 등장과 함께 환희로 가득 찼던 방어선.

방어선은 언제 그랬냐는 듯 무거운 정적이 내리깔려 있었다.

# ….

침묵이 찾아온 건 방어선뿐만이 아니었다.

쉴 새 없이 방어선과 후방의 지원을 체크하던 본부도 말을 잃은 상태였다.

‘최악… 이다.’

에밀리아가 굳게 들고 있던 방패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수천의 구울이 달려들어도 조금도 밀리지 않고 버텨냈던 철벽의 방패.

그 방패가 지금은 견딜 수 없는 절망감을 만나며 힘이 풀려버린 것이었다.

-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나선 안 됩니다.

무기왕 백운의 구울화.

무슨 짓을 해도 감당할 수 없는 사태이기에 근처에 있는 백운을 방어선에 두지 않은 이유였다.

물론.

‘백운 님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방어선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을 터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구울의 전력은 훨씬 강했고 성기사단의 빛 역시 빠르게 사그라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애초에 백운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저런 걸… 숨기고 있었다니.”

부단장 로테가 입술을 깨물었다.

원거리에서 그토록 찬란했던 빛마저 뚫어내며 구울화 해버리는 힘이라니.

지금까지 봐온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힘이었다.

스르륵.

의식이 거의 끝난 건지 백운을 감고 있던 거미줄이 걷히기 시작했다.

“보, 본부 어떻게 합니까?”

옆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런던 헌터들 대부분은 사신과의 전투 때 백운의 힘을 목도한 이들이었다.

여기에 있는 모든 이가 힘을 합쳐도, 달려오고 있는 지원이 모두 도착한다 하더라도 이길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저, 전원…!

본부에서도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무기왕 백운이 구울이 되어버린 순간부터 이 전투의 결말은 패배였다.

하지만 아직 대피가 끝나지 않은 런던을 두고 퇴각을 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도망가려는 거냐? 뒤에 있는 런던을 버리고? 해가 떠오르는 국가니 뭐니 으스대던 영국을 놔두고?”

발리아가 결정 내리지 못하는 헌터들을 조롱 섞인 얼굴로 비웃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이젠 됐다는 것처럼 으스대더니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된 것이었다.

“완성된 모양이군.”

“!!!”

서서히 흐려지는 태초의 기적에 발리아가 황홀한 미소를 머금었다.

눈은 보이지 않았으나 확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물 밀듯 몰려오는 승리의 기운이 말이다.

“드디어 끝이 보이는구나.”

태초의 기적이 끝나자 공중에서 땅으로 착지하는 백운.

발리아가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내게로 와라.”

작은 읊조림이 울려 퍼지고 방어선에 있는 모든 이의 눈길이 백운에게 향했다.

고개를 숙인 백운의 몸에선 더 이상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빛으로 전장을 휩쓸었던 게 거짓말 같았다.

저벅.

백운이 천천히 발리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순순히 명령을 이행하는 백운에 흡족한 표정을 짓는 발리아.

“자 그럼 하나도 남김없이.”

바로 뒤까지 와 멈춘 백운에 발리아가 손을 들어 방어선을 가리켰다.

“쓸어버려라.”

망설임 없는 발리아의 명령이 내려지고.

스으윽.

하늘 높이 치켜들어진 백운의 팔이.

쐐에에에엑!!

빠르게 휘둘러졌다.

* * *

빠아아아아악!!

소리 우렁차고.

쿵!!

수박 터지는 소리와 함께 땅에 처박힌 발리아를 내려다봤다.

“깜짝 놀랐잖아. 이 새끼야. 구울 되는 줄 알고.”

손을 올려 얼굴부터 몸을 슥슥 문질러 보았다.

순식간에 몸을 휘감았던 초록색 거미줄.

아주 그냥 끈적한 것이 기분이 몹시 더러웠었다.

날 노려보는 커다란 눈깔도 어찌나 매서운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레이저가 나올 것 같았다.

휴. 역시 나야.

어디 한 군데 상한 곳 없이 말짱한 몸에 고개를 끄덕였다.

거미줄에 휘감기고 주시당하는 순간엔 솔직히 쫄았지만, 곧 본능적으로 확신이 들었었다.

지금 발리아가 행한 게 뭔지는 몰라도 내겐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 나가볼….

아무런 영향도 못 끼치지만 느낌이 하도 별로라 바로 끊어내고 나올까 했었지만.

- 나의 승리다!!

거미줄을 통해 전해오는 발리아의 내적 외침에 잠깐만 더 들어 보기로 했었다.

태초의 구울이란 놈은 도대체 어떤 정신머리로 살고 있을까라는 순수한 호기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 무슨…!?”

땅에 처박혔던 발리아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지 보이지 않을 눈까지 부릅뜨고 있었다.

“너 김칫국 엄청 마시더라. 상상으론 벌써 세계 정복 다 했던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은 거냐! 태초의 기적은 절대적인 약속이자 규율이거늘!”

후비적. 후비적.

약속이니 규율이니 하는 지겨운 단어에 귀를 후벼 팠다.

나이를 많이 먹는다고 철이 드는 게 아니듯, 태초의 구울로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고 해서 머리가 잘 돌아가는 건 아닌 듯했다.

“분위기는 잔뜩 잡더니 보기보다 멍청하구나.”

걸음을 옮겨 처박혀 있는 발리아에게 다가갔다.

원래라면 구울이 될까 무서워 안 다가갔겠지만, 이젠 아니었다.

발리아는 무슨 짓을 해도 날 구울로 만들 수 없었다.

“버킹엄 궁전에서 내가 안 날아간 걸 보고서도 똑같은 짓을 하다니. 거기다 이번엔 눈까지 날려 먹고. 이런 걸 뭐라 하더라? 너의 멍청함에 개탄스럽다?”

“하등한 인간 주제에 감히!!”

처박혀 있던 발리아가 빠른 속도로 몸을 날려왔다.

나름 빠른 걸 보니 오래 살면서 운동은 열심히 해온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안 해도 피할 수 있지만. 느슨해진 정신머리에 긴장을 좀 줘야 할 거 같으니까.”

[유탈라스 - 1단계 의태]

바로 앞까지 다가온 발리아에게 주먹을 내리꽂았다.

콰아아아아앙!!

“끄억!”

외마디 비명과 함께 다시 한번 땅 깊은 곳까지 처박히는 발리아.

하도 깊숙이 박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빛은 사라졌거늘.”

“이 새끼 또 착각하네. 사라진 게 아니라.”

[이카로스 - 칼데아 윙]

[잔다르크 - 생카트나]

“잠깐 넣어둔 거야.”

다시 한번 빛과 섞인 연기가 주변을 밝히기 시작했다.

둘 다 남은 연기나 빛의 양이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마지막 한 방 정도는 충분했다.

“끄아아아아아악!”

빛이 스며든 건지 발리아가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넌, 넌 대체 뭐냐아아아아악!!”

동시에 악을 쓰며 소리 질러대는 발리아.

그런 발리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예전에도 너랑 비슷한 놈을 만난 적이 있어. 지가 신의 사도니 뭐니 절대적인 법칙이니 하면서 떠들어 재꼈던 이중인격자 싸이코였는데. 그놈도 결국 너처럼 울부짖다가 하늘나라로 갔거든. 그때도 그놈의 법칙은 내게 통하지 않았었고.”

저벅.

발리아가 처박힌 구덩이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네 힘이 왜 안 통하는지는 나 역시 정확히 설명할 순 없어. 다만 내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걸 말해주자면.”

구덩이를 통해 저 아래에 처박혀 있는 발리아를 내려다봤다.

“내가 있는 자리에선 네놈이 전혀 안 보이거든.”

“뭐…?”

“네가 너무 아득히 낮은 곳에 처박혀 있어서 먼지만큼도 안 보인다고.”

“…!”

뜻밖의 이야기였는지 벙찌며 굳어버린 발리아에.

생카트나의 날이 아래를 향하게 쥐며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창의 끝으로 모여드는 연기와 빛.

콰아아아아아…!

“자 그럼.”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힘의 결집을 아래로 내리꽂으며.

“지긋지긋한 백년 전쟁은 여기서 종결이다.”

입가로 시원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완벽한 너의 패배로 말이야.”

콰아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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