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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왕이 헌터로 회귀했다-322화 (322/473)

322화. 이끌리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황금빛을 바라봤다.

순식간에 퍼져 나가 방어선은 물론 주변 일대를 뒤덮은 황금색의 빛.

마치 오래도록 지속된 전쟁의 종료를 축하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바닥났네.

망자의 세계에서 여우 치라타를 흡수한 뒤엔 좀처럼 바닥을 보이지 않았었는데.

오늘은 쉬지 않고 뿌려댔더니 결국 끝을 보이고 말았다.

칼데아와 비슷한 메커니즘인 생카트나도 마찬가지였다.

담아뒀던 빛을 모두 뿌려내자 생카트나 역시 황금색 입자로 흩어져 버렸다.

딱 알맞았구만.

빛과 연기에 분해되다 못해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된 발리아.

발리아가 있던 곳엔 그저 깊게 파인 구덩이만이 남아 있었다.

그나저나.

조용히 주변을 둘러봤다.

살던 이들은 일찍이 대피가 끝났지만 오랜 시간 런던의 일부분이었던 장소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언제 다 고치냐.

만약 내가 도시 복구를 맡은 입장이라면 좌절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엄청난 화력이 휩쓸고 간 탓에 복구가 아니라 모조리 새로 만들어야 하는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나, 난 부순 거 없으니까.

저번과 달리 내 지분은 전혀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안한 마음은 가지지 않기로 했다.

그럼 방어선으로… 응?

다 끝났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몸을 돌렸지만.

곧바로 방어선을 향해 걸어가진 못했다.

어째서…?

에밀리아가 심한 말이라도 한 걸까.

이사벨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거의 통곡하듯이 우는 걸로 보아 상처받는 말로 오지게 팼구나 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이사벨 님. 괜찮으세요?”

조심스럽게 묻자 이사벨이 끅끅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운 님이 끄흡… 구울이 된 줄 알고!”

이젠 콧물까지 줄줄 흘리는 이사벨에 조심스럽게 일보 후퇴했다.

어쨌든 다친 곳은 없는 듯하니 다행이었다.

“에밀리아 님은….”

건네던 말을 멈추며 입을 다물었다.

뭔가 높이가 낮다고 생각했는데 에밀리아는 어째선지 풀썩 주저앉아 있었다.

얼굴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백 년…. 아니, 천 년 감수했어요.”

떠듬떠듬 말하는 에밀리아에게 어차피 각성했으니까 수명 무제한이잖아요… 라고 되도 않는 드립을 칠 뻔했다.

평소와 달리 진심으로 기겁한 에밀리아의 얼굴에 간신히 참아낼 수 있었고 말이다.

차마 고개를 못 돌리겠군.

일단 눈을 에밀리아와 이사벨에게 고정시켰다.

뒤통수와 옆통수로 엄청난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있으면 뚫리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에밀리아 님이 이 상태면.

방어선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다리가 풀린 건 물론이고 모두가 죽다 살아났다는 얼굴일 것 같았다.

그냥 빨리 뚫고 나올 걸 그랬나.

발리아의 거미줄에 싸여 있었던 건 1분이 조금 넘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었다.

가소로운 힘에 여유롭게 발리아의 내적 외침을 감상하고 있었는데.

아마 그 1분이 짧다고 느낀 건 나뿐이었던 모양이다.

비, 비밀로 하자.

일부러 안 나왔다는 사실은 비밀에 부치기로 하며.

조금씩 밝아지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로 빼꼼 얼굴을 내미는 태양.

서서히 세상을 밝혀 오는 태양에 입가로 미소를 머금었다.

길었던 새벽이 끝나고 아침이 찾아오고 있었다.

* * *

런던에 마련된 상황실.

총리 리튼이 쓰고 있던 헤드셋을 내려놓았다.

“….”

상황이 종료됐지만 지금 당장 리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불과 몇 분 전에 지옥과 천국을 오간 탓이었다.

- 나의 구울이 되어라!

발리아의 외침과 함께 무기왕이 초록빛에 감싸인 순간.

상황실은 물론 리튼의 사고는 멈추고 말았었다.

새하얗게 변한 머리에선 어떠한 대안책도 떠오르지 않았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무기왕 백운은 대안책이란 게 있을 수 없는 존재였으니까.

“후우우.”

리튼이 조용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이 동요할까 최대한 숨기는 중이었지만.

리튼의 두 손으론 땀이 흥건해져 있었다.

죽다 살아난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총리 님.”

런던 본부장의 부름에 리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 도시와 각 국가로 연락하세요. 상황이 종료되었으니 오지 않아도 된다고요.”

“알겠습니다.”

리튼의 지시를 끝으로 상황실이 바빠졌다.

비행기에 오르고 있을 지원군과 겁먹은 시민들에게 현재 상황을 알려야 했다.

“각 도시의 피해도 집계 부탁합니다.”

“예!”

리튼의 얼굴로 슬픈 빛이 어렸다.

분명 이겼지만 상처 많은 승리였다.

런던과 성당이 위치한 도시가 파괴된 건 물론 희생된 인원도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끝나지 않던 전쟁이 막을 내렸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겠죠.’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리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백운이 아니었다면 전쟁이 끝나지 않은 건 물론 전혀 다른 결말이 나왔을 거란 사실을 말이다.

‘영국을 두 번이나 지켜낸 존재.’

리튼이 모니터에 비치는 백운을 바라봤다.

상황실로 오기 전에 직접 만나기까지 했지만, 뭐랄까.

리튼의 머릿속에선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모니터 너머의 남자는 대체 어떤 존재인지 말이다.

* * *

에밀리아와 이사벨과 함께 돌아온 샤를의 저택.

저택의 집사 레차도가 안내한 욕실로 발을 들였다.

쏴아아아아아!

몸으로 뜨끈한 물줄기가 콸콸 쏟아졌다.

물 세기 훌륭하고.

나도 모르게 고개가 저어졌다.

오래된 저택인데도 이런 시원한 물줄기라니.

몸을 덮었던 초록빛의 끈적임이 싸악 다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끈적.

앗 시발!

물론 기분과는 별개로 몸 여기저기엔 초록이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빛인지 의문이 들었다.

보자마자 기분이 더러워지는 건 물론 이런 끈적임까지 남기다니.

아주 그냥 재수 없고 끈질긴 빛 그 자체였다.

박박박박!

거칠게 때를 밀어준 뒤 옆으로 손을 뻗었다.

레차도가 날 안내하며 가져다준 캔맥주였다.

손을 대기만 해도 몸이 오싹해질 정도로 차가운 얼음장 맥주.

꼴깍.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맥주를 땄다.

치이익!

시원한 소리와 함께 거품이 솟아오르고.

캔을 기울이자 살얼음이 낀 맥주가 목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여기저기 휘저으며 먹은 먼지가 깨끗하게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크으으으…!”

단숨에 맥주를 비워내고 찡해지는 머리에 두 눈을 찡그렸다.

이렇게 맛있는 맥주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

맛있는 맥주에 의한 기쁨도 잠시.

시원한 맥주가 온몸을 돌아선지 머리와 마음이 차분해졌다.

“하아.”

빈 캔을 찌그러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했으나 상공을 날며 봤던 구울들이 생각났다.

그들 모두가 과거에는 영국 도시 어딘가에서 살아가던 사람일 터였다.

툭.

맥주캔을 내려놓고 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였다.

후회를 한다거나 죄책감을 가지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뭐랄까.

뜬금없고 생판 모르는 사람이지만 전쟁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그들을 위해.

“전쟁은 끝났으니.”

약간이나마 애도를 표하고 싶었다.

“부디 편히 잠드소서.”

* * *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향긋한 음식 냄새가 풍겨왔다.

똑똑.

“넵!”

열린 문으로 레차도와 음식 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번에 먹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음식이었다.

“혼자 먹기엔 또 너무 많은데요.”

손이 큰 레차도에 고개를 내젓자.

“예?”

레차도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날 바라봤다.

앗.

이번엔 2인상이었던 모양이다.

레차도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저택의 주인, 샤를.

샤를은 얼마 먹지 못하니 1인상이라 봐도 될 것 같았다.

“에밀리아 님과 이사벨 님은 런던청으로 돌아가셨어요. 이래저래 정신이 없는 모양이거든요. 런던청도.”

“그렇군요.”

새삼스레 두 사람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킹엄 궁전의 사건 때부터 잠시도 쉬지 못하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배고프실 텐데 드세요.”

샤를이 미소와 함께 음식을 권했지만 저번처럼 허겁지겁 손이 뻗어지진 않았다.

웃고는 있으나 샤를 역시 런던이 받은 상처에 마음이 힘들 터.

그런 걸 떠올리니 행동 하나하나가 나도 모르게 조심스러워졌다.

“백운 님. 그런 얼굴 하지 않으셔도 돼요.”

“넵?”

“이번에도 백운 님은 영국을 구하셨어요. 정말 수많은 사람을 살리셨죠.”

고개를 든 샤를이 조금 더 환하게 웃어 보였다.

“백운 님은 영웅이에요. 그건 변하지 않는 진실이죠. 그것만 생각하시면 돼요. 울적해져 슬퍼하는 건 저희만으로 충분하니까요.”

“….”

슬픈 빛이 어린 샤를을 바라보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포크를 집어 들었다.

저번보다 더 파워풀하고 맛있게 먹을 생각이었다.

툭.

응?

너무 과한 액션을 취해서일까.

품에 있던 회중시계 케이스가 테이블로 떨어졌다.

잠시 바라보다 상황을 파악하고 호다닥 케이스를 집었다.

“사실 이실직고할 게 하나 있는데요.”

사신과의 싸움이 끝나고 회중시계를 주웠던 걸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대산의 도움 및 그리스의 감정을 받으며 잔다르크와 연결 지은 이야기도 함께였다.

“방금 케이스가 우연히 떨어지는 걸 보셔서 믿음은 안 가시겠지만. 떠나기 전에 꼭 돌려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진짜로요.”

진심이었기에 솔직함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운 님이 가지고 계셨군요.”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샤를이 케이스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기억을 계승해서인지 왠지 모를 그리움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다행이네요. 부서지거나 하지 않아서요. 전 기억을 계승하기 전부터도 박물관에 있는 이 회중시계를 자주 보러 갔었어요. 할머니가 회중시계에 관한 이야기를 이것저것 해주셨거든요.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몸이 따듯해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고요.”

회중시계를 소중하게 꼬옥 쥔 샤를이 말을 이었다.

“고성에 있던 회중시계는 잔다르크 님의 시계예요. 그리고 이건 잔다르크 님이 페리아 여왕에게 우정의 선물로 건넨 시계고요.”

“!?”

왠지 똑 닮았길래 같이 맞춘 건가 싶었는데.

생각보다 더 의미 깊은 시계였다.

우정의 선물을 슬쩍 했었구만.

등 뒤로 흐르는 땀을 애써 무시하며 담담한 척 포크를 뻗으려는 찰나.

“정말 다행이에요.”

회중시계와 날 번갈아 보더니 입을 여는 샤를.

“넵?”

어벙하게 되묻자 샤를이 미소를 그렸다.

“백운 님이 이 회중시계를 주움으로써 여기에 계시는 거니까요.”

샤를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회중시계가 아니었다면 난 영국에 오지 않았을 터였다.

당연히 이 난리가 나는 동안 영국이 아닌 어딘가에 있었을 테고 말이다.

스윽.

회중시계에 이마를 댄 샤를이 조용히 읊조렸다.

“영웅을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잔다르크 님. 그리고.”

다시 내게 눈을 돌린 샤를이 이전보다 더 환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저희를 지켜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백운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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