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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왕이 헌터로 회귀했다-323화 (323/473)

323화. 빨간 버스

사라락.

얼굴로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작지만 참새 소리도 들리는 걸 보니 아침이 된 모양이다.

“으음.”

푹신한 침대를 몇 바퀴 더 구르다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놓인 테이블엔 주전부리와 커피, 디저트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

밤새도록 샤를과 수다를 떨며 먹은 것들이었다.

- 한동안 정신이 없을 거 같아서요.

안 졸리냐는 질문에 샤를이 한 대답이었다.

대충 샤를이 왜 정신이 없을지는 난 역시 알고 있었다.

일단 오늘부터 영국은 아주 바쁜 나날을 보낼 예정이었다.

다시 한번 시작될 런던 복구 작업은 물론 프랑스의 책임을 묻는 등 수많은 일정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샤를 님은 더 하겠지.

거기다 영국이 모든 일을 끝내도 샤를에겐 한 가지 일정이 더 남아있었다.

날이 갈수록 건강이 안 좋아지는 현 여왕을 대신해 왕의 자리에 오르는 것.

처음 말만 들었을 땐 상호합의하고 왕관 쓰면 끝나려나 했었는데.

대충 얘기를 들어보니 준비부터 결제 등 엄청난 수의 절차가 샤를을 기다리고 있었다.

화이팅!

나였으면 야반도주를 감행하고도 남았을 절차.

이제 곧 그 절차를 맞이할 샤를에게 닿지 않을 응원을 보내며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

사방으로 뻗친 머리와 게슴츠레한 눈으로 창문을 바라봤다.

약간 덜 처진 커튼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아침 햇살.

조금 전 내 얼굴로 느껴졌던 따스한 기운의 정체였다.

“끄어어어어!”

오도도도독!

스멀스멀 깨어나기 시작한 몸에 크게 기지개를 켰다.

이번엔 딱히 고생한 것도 없으면서 몸은 유난히 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오씨. 겁나 개운하네.”

마지막으로 목까지 이리저리 돌리며 혀를 내둘렀다.

처음엔 단순한 당일 컨디션의 차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자고 일어날 때마다 내 몸은 집에서 잔 것보다 훨씬 개운하고 상쾌했다.

예상하건대 저택 전체로 영향을 끼치는 샤를의 능력이 내 수면에도 도움을 준 것 같았다.

“그야말로 꿀잠 저택.”

훌륭한 수면을 선물해 주는 저택에 고개를 끄덕이며 옆으로 몸을 굴렸다.

보통 방법으론 벗어날 수 없는 꿀침대기에 이렇게라도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착.

바닥에 안착하며 몸을 쭉 폈다.

“자 그럼 이제.”

호흡을 크게 들이켜며 조용한 방 허공을 응시했다.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으니 다음 일정을 진행할 계획이었지만.

뭐, 뭐하지.

생각해보니 당장 할 일이 없었다.

저번처럼 휘리릭 떠나기에도 이번엔 약간 애매했고 말이다.

- 백운 님. 괜찮다면 절 조금만 기다려 주실 수 있을까요?

샤를은 미안함 가득한 얼굴로 조심스레 말을 건넸었다.

내가 바쁘지만 않다면 이제 곧 진행될 즉위식을 함께 해달라는 것이었다.

바쁘진 않지.

커튼을 걷으며 맑은 하늘을 쳐다봤다.

나에겐 무기 하나하나가 여러 의미로 소중하다 보니 최대한 부지런하게 찾을 생각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쫓기는 것처럼 다른 것들을 놓쳐가면서까지 허겁지겁 돌아다닐 생각은 아니었다.

난 무기는 물론이고 그 어느 것 하나 놓치거나 포기할 생각이 없는 욕심 가득한 사람이었다.

“느긋하게 기다려볼까.”

자연스럽게 창문 너머로 몸을 날렸다.

샤를의 저택인 만큼 최대한 조심스럽게 지낼 생각이었으나.

지금 방을 나섰다간 레차도의 무한 케어와 함께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끌 터였다.

오늘은 조용하고 평화롭게 보내고 싶단 말이지.

아래로 착지하며 나무 옆으로 사사삭 몸을 숨겼다.

저택 정원에도 적지 않은 인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도둑과 경찰 느낌이랄까.

사실 당당하게 나가도 별 상관없을 듯했지만.

어쨌든 몸을 최대한 숨기며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저택의 정문을 빠져나왔다.

마지막엔 도저히 지나갈 수가 없어 수리검을 담 너머로 던지기도 했었다.

“완벽하군.”

완벽히 수행한 탈출 미션에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 후.

런던 시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전투가 벌어지지 않은 시내 쪽을 여유롭게 어슬렁거려 볼 생각이었다.

운영 중인 박물관이나 전시관이 있다면 빠짐없이 둘러보면서 말이다.

혹시 알아.

런던의 여러 박물관을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엄한 곳에서 뭔가를 발견하게 될지.

내리쬐는 햇살과 기분 좋은 상쾌함에 미소를 머금었다.

오늘은 뭐랄까.

왠지 모르게 운이 좋을 것 같은 하루였다.

* * *

현 여왕 세이란 엘리자베스의 저택.

열린 문 사이로 샤를이 모습을 드러냈다.

즉위식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전 할머니인 세이란을 보러 들린 것이었다.

“오 샤를.”

침대에 앉아 책을 읽던 세이란이 반가운 미소를 그렸다.

길진 않으나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대화 시간.

세이란이 하루 중 가장 기다리고 소중히 여기는 시간이었다.

“할머니. 몸은 좀 어떠세요.”

“널 보니 한결 나아지는 기분이구나.”

괜한 말을 한 건 아니었다.

실제로 샤를의 몸에서 쉴 새 없이 뿜어지는 생명력은 세이란의 몸을 편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이번엔 고생이 많았구나.”

세이란이 미안한 얼굴로 다가온 샤를을 토닥였다.

본래라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손녀인 샤를에게 떠맡기고 만 것이었다.

“아니에요. 제가 한 거라곤 얌전히 안겨 가서 문을 연 것밖에 없어요.”

여기까지 말한 샤를이 고개를 숙였다.

“이거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그저 지켜보면서 응원하는 거 말고는요.”

“빛의 주인을 알아보고 그를 빛으로 인도하는 것. 그것이 왕에게 주어진 임무였고 넌 그걸 훌륭히 해냈단다.”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백운 님이 아니었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 거고요.”

약간의 무력함을 느끼는 듯한 샤를을 세이란이 토닥였다.

“네 마음은 잘 알지만, 그렇다고 네가 모두를 구할 순 없는 법이란다. 개인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모두를 구해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물론 네가 모셔온 빛의 주인은 예외겠지만 말이다.”

“맞아요. 저도 아는데….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현실이 정말 슬펐어요.”

숨을 크게 들이마신 샤를이 애써 미소를 그렸다.

할머니의 기운을 북돋아 주려고 온 건데 괜히 우는소리만 한 것 같았다.

“아 그리고.”

샤를이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세이란에게 건넸다.

“오.”

회중시계를 본 세이란의 얼굴이 한층 더 밝아졌다.

지난번 사신 사태로 영영 볼 수 없게 된 줄 알았었다.

“백운 님이 가져다주셨어요. 이 시계가 백운 님을 런던으로 이끌었고요.”

“그렇구나.”

잔다르크에게 받은 소중한 선물.

결국 그 선물이 백운을 런던으로 이끄는 길이 되었다.

“빛이 왕을 인도했다라.”

고개를 끄덕이며 세이란이 미소를 머금었다.

순간 머리로 운명이란 단어가 떠올라서였다.

‘운명… 인가.’

오랜 세월을 살아왔고 수 세기의 기억을 가졌지만 세이란은 아직도 운명이란 단어를 정확히 정의 내릴 수 없었다.

종종 너무 잔인하면서도 너무 찬란하기도 한, 결코 종잡는 게 불가능한 것이었다.

스윽.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세이란이 샤를을 바라봤다.

“샤를. 오늘 찾아온 건 단순히 이 할머니와 담소나 나누자고 온 건 아니겠지?”

샤를이 잠시 놀라더니 미소를 머금었다.

세이란의 말대로였다.

담소도 좋지만 오늘은 왕실의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직전 세이란의 견해를 듣고 싶어 온 것이었다.

“수 세기 동안 고민하며 미뤄왔던 걸 드디어 네가 해주려고 하는구나.”

“…!”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먼저 답을 해주는 세이란에.

고개를 끄덕인 샤를이 말을 이었다.

“어제저녁에 기억이 온전히 적응됐어요. 왕실엔 아직 한 가지 남은 일이 더 있다는 걸 알게 됐고요. 그리고 전 그때 백운 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죠.”

“그래. 어떻더냐?”

“알 수 있었어요. 눈앞의 사람이라고. 약간의 고민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요.”

“그 정도였구나.”

웃음을 터뜨린 세이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 누구보다 총명하고 뛰어난 샤를이었다.

세이란은 그런 샤를의 눈을 믿었기에.

백운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음에도 샤를의 결정을 지지할 생각이었다.

“난 직접 그를 보지 못했지만, 그가 한 일들은 전해 들었단다. 거기다 네가 이렇게까지 확신한다면 분명 그에겐 충분한 자격이…. 아니지, 자격이란 말은 왠지 오만하게 느껴지는구나. 그 사람만큼 그 자리에 잘 어울리는 이는 없을 것 같구나.”

샤를의 얼굴로 안도의 미소가 그려졌다.

하루 만에 내린 자신의 결정을 세이란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이었었다.

“고마워요. 할머니.”

서로의 손을 잡고 흔들던 두 사람이 머리로 동일한 기억을 떠올리며.

동시에 입을 열었다.

“자격이 있는 자가 나타난다면 나의 이명을 물려주도록 하라.”

두 사람의 눈으로 비장함과 함께 강한 책임감이 어렸다.

“이름을 가진 자는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다.”

* * *

한적한 런던 거리를 거닐었다.

복구 중인 지역과는 꽤 떨어져 있는 거리.

곳곳에 애도의 표시가 있긴 했지만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아늑한 거리였다.

박물관도 다 닫았네.

이미 다섯 군데나 돌아다녔지만 당장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사신 사건부터인지 이번 구울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무기한 휴업이란 글자가 붙어있었다.

운이 좋긴 개뿔. 내가 플래그를 깔아버렸어.

얌전히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관광하자고 뽈뽈거리며 돌아다니기에도 적절치 않은 시기였다.

눈 앞에 펼쳐진 거리는 아늑하더라도 영국 전체는 애도 기간이었으니까.

부스럭.

고개를 내려 품속에 든 봉투를 바라봤다.

꼴깍!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박물관이 다 닫았다는 걸 깨닫고 노선을 변경했었다.

영국을 대표한다는 유명한 간식을 모조리 긁어모은 것이었다.

타르트부터 생크림 케이크와 버터 푸딩까지.

입안에 넣으면 녹아내릴 거 같은 디저트가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 참아야 돼.

애도 중인 길거리에서 케이크를 흡입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갈 데도 없게 된 거 저택에 가서 모조리 녹일 생각이었다.

저택에 있는 사람들과 나눠 먹을 생각으로 많이 샀으니 양도 충분했다.

콰아아아아아…!

응?

얼른 가자 하며 발걸음을 재촉하려는 찰나.

어디선가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과속이라도 하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리가 들려오는 고을 바라봤다.

외곽이라곤 하나 복잡한 런던의 중심지였다.

차가 과속을 하고 할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사라락…!

“얼레.”

순간 눈으로 파란 기운이 깃들며 페샨의 눈이 발동되었다.

그야말로 뜬금없는 타이밍이었다.

그렇게 한참 바뀐 눈과 소리가 나는 곳을 번갈아 보고 있을 때.

“어?”

눈앞으로 굉음을 자아내고 있는 새빨간 2층 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버스는 시꺼먼 매연을 뿜어내며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었다.

“으, 음주운전인가.”

어떤 미친놈이 애도 기간에 저딴 식으로 운전하는 건가 한심할 따름이었다.

“하여튼 답도 없… 어… 어…!”

그리고 한참을 비틀거리던 버스가.

“미친!”

엄청난 속도로 내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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