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케이크 도둑
피할 순 있지만.
버스에서 눈을 돌려 뒤를 바라봤다.
여전히 거리는 평화로웠고 조금 떨어진 곳에선 추모식이 진행 중이었다.
이 미친 빨간 버스가 이대로 돌진하다면 분명 대형 참사가 날 것이었다.
멈춰 세워야겠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버스를 응시했다.
안에 있는 사람이 충격을 좀 받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스윽.
정면으로 손을 들고 버스를 기다렸다.
페샨의 눈이 왜 발동된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멈추고 알아볼 생각이었다.
덜컹덜컹!
워낙 빠르게 달린 탓인지 양옆으로 덜컹거리기까지 하는 버스.
운전석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떤 미친 운전자가 대낮부터 이러는 건가 궁금해서였다.
응?
기묘한 현상에 잘못 본 건가 약간의 의문이 들려는 찰나.
돌진한 버스가 그대로 내 몸을 덮쳐왔다.
뭐, 뭐야.
기다리고 있던 충격은 전해지지 않았다.
손을 그대로 통과하더니 순식간에 내 몸을 감싸는 빨간 버스.
몸이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위이이이이이!
마치 통돌이 세탁기 안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다채로운 색이 사방을 돌며 시야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내 몸으로 여러 개의 손길이 느껴졌다.
뽀송한 거 같기도 하고 푹신한 거 같기도 한 손길이었다.
파앗!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정신없는 순간이 지나고 사방이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발동했던 페샨의 눈이 해제된 건 물론이었다.
스윽.
여전히 어리둥절한 상황에 천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당연히 보여야 할 빨간 버스가 보이지 않았다.
버스의 진행 방향도 아까와 마찬가지로 평화로웠다.
꼴깍!
“귀, 귀신…?”
등 뒤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렀다.
목으론 서늘한 기운과 함께 소름이 돋았다.
대낮 런던 한복판에서 귀신이라니.
그것도 빨간 2층 버스 모양을 한 귀신이라니.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종류의 귀신이었다.
“어, 어디 소금 없나.”
날 지나쳤던 버스가 귀신이라고 확정 지으며 몸 여기저기를 열심히 털어냈다.
귀신이 날 한껏 훑고 지나갔으니 부정한 기운이 몸에 묻었을 터였다.
저택으로 돌아가면 레차도에게 소금을 얻어 온몸을 박박 문지를 생각이었다.
“세상 살다 살다 별… 어?”
이제 놀랄 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워낙 정신이 없어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버스에 부딪히기 전보다 훨씬 가벼워진 나의 몸 상태를 말이다.
“….”
물론 좋은 의미에서의 가벼움은 아니었다.
여기저기 열심히 돌며 사 모았던 디저트가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에?”
몸을 다시 한번 더듬으며 땅바닥까지 샅샅이 손을 되짚어보았다.
유독 재수 없는 날이라 귀신은 봤다 치더라도 가지고 있던 걸 몽땅 털리다니.
점점 더 현실성을 잃어가는 상황이었다.
오도독.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가 아는 한 귀신이 사람 물건을 훔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무언가라는 이야기.
등 뒤론 아까와 다른 의미로 땀이 흘렀다.
조금 전이 소름이었다면 지금은 명확한 분노였다.
“우리 빨간 버스가 귀신이 아니었구나.”
페샨의 눈이 괜히 발동된 게 아니었다.
내게 도둑놈의 출현을 경고해 준 것이었다.
너덜너덜.
넝마가 되어 걸레짝이 된 옷을 내려다봤다.
훔쳐 갈 거면 깔끔하게라도 털어가던가.
손에 발톱이라도 달린 건지 옷이 아주 그냥 위아래 할 것 없이 작살이 나 있었다.
“어디서 찾지 이 새끼들.”
부딪히는 순간 운전석에서 본 그림자를 떠올렸다.
벼락이라도 제대로 맞은 건지 사방으로 털이 삐죽삐죽 뻗친 모양새였다.
당시엔 사람의 형상관 차이가 있어 잘못 본 건가 싶었는데 아닌 것 같았다.
끼이이이.
케이크 도둑에 손을 덜덜 떠는 사이.
눈앞으로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백운 님?”
내려간 창문 사이로 고개를 쏙 내미는 이사벨.
“어디 가세…?”
반갑게 질문을 건네던 것도 잠시.
내 몰골을 발견한 이사벨이 말을 멈추며 어색한 정적이 찾아왔다.
* * *
런던 헌터청의 휴게실.
“미친 소리라고 생각하시죠?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시무룩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물음에 빨간 버스에게 털린 일을 설명했다.
예상했던 대로 이사벨은 눈동자를 흔들어 대고 있었고 에밀리아는 조심스럽게 헛기침을 하는 중이었다.
“아, 아니에요. 빨간 2층 버스라고 하셨죠?”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운전석에 있던 게 털 삐죽이었다는 설명도 잊지 않았다.
“빨간 버스와 털 삐죽이라.”
턱을 슥슥 문지르는 이사벨에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이사벨 님. 안 그래도 바쁘신데 신경쓰지 않으셔도 돼요.”
케이크 좀 털린 걸로 바쁜 두 사람의 시간까지 뺏을 생각은 없었다.
아주 그냥 다 뒤벼주마.
해가 지면 날개를 펼치고 페샨의 눈이 발동할 때까지 런던 곳곳을 샅샅이 훑어볼 생각이었다.
똑똑.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며 헌터청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이사벨 님. 조금 전에 말씀하신 거요.”
내게 인사를 건넨 남자가 이사벨에게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건네어진 서류를 이리저리 살피는 이사벨.
“…!!”
눈이 커지는가 싶더니 이사벨이 입을 열었다.
“하, 한두 건이 아니네요.”
“네?”
이사벨이 서류를 늘어놓으며 말을 이었다.
“들고 있던 디저트를 도둑맞았다는 사람이 엄청 많아요. 위치도 아까 백운 님이 서 있던 곳이랑 가깝고요. 빨간 버스를 봤다거나 하는 건 없지만 잠깐 시야가 가려지는가 싶더니 몸 여기저기로 손길이 느껴졌다는 게 공통된 진술이네요.”
이 자식들 상습범이었어…?
“신고를 받고 주변 순찰 및 CCTV도 확인했었는데 딱히 수확은 없었던 거 같고요.”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애초에 페샨의 눈이 발동됐다는 건 일반적인 방법으론 볼 수 없는 존재라는 말이었으니까.
“위치가 아주 똑같진 않은데요. 사건이 일어났던 경로를 대충 그려보면.”
이사벨이 지도 위로 작은 점을 찍어나갔다.
내가 서 있던 곳을 시작으로 뻗어 나가는 붉은 점선.
나름 반듯하게 그려지는 깔끔한 선이었다.
콕.
“마지막 사건까지 하면 이 정도겠네요.”
마지막 점은 런던의 한 공원 입구에 찍혀 있었다.
공원이라.
“감사합니다. 이사벨 님.”
지도를 움켜쥐고 몸을 일으켰다.
“어… 백운 님. 혹시 남는 옷이라도 드릴까요?”
“아니에요.”
조심스럽게 묻는 이사벨에 힘차게 고개를 내저은 후.
주먹을 불끈 움켜쥐어 보였다.
“그놈들의 털로 새 옷을 만들 거니까요!”
* * *
숲 속의 숨겨진 공간.
호수 안에서 청명한 빛을 띤 여자가 천천히 걸어 올라왔다.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여자는 다리까지 오는 긴 물색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차박.
그녀는 걸으며 반짝이는 푸른빛으로 발자국을 남기는 중이었는데.
그 발자국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도는 여러 개의 작은 빛에선 이따금 꺄르르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음?”
사방으로 푸른빛을 뿌리며 걷던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숲 한편에서 신나게 떠들어 대고 있는 작은 덩치의 털뭉치들.
여자가 걸음을 옮겨 다가가자 깜짝 놀란 털뭉치들이 호다닥 몸을 일으켰다.
“안녕하세요! 호수의 정령님!”
“안녕하세요! 리아네 님!”
털뭉치들이 작은 몸을 꾸벅 숙이며 리아네라고 불린 여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슬며시 미소를 지은 리아네가 한 발자국 더 다가가자 털뭉치들이 움찔거리며 몸을 바짝 세웠다.
마치 등 뒤에 있는 걸 리아네로부터 숨기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유난히 달콤한 향기가 나네요.”
리아네의 말에 털뭉치들이 땀을 뻘뻘 흘려댔다.
“네가 빨리 말씀드려!”
“왜 내가 말씀드려야 해? 네가 가자고 했잖아!”
“훔친 건 너… 흡!”
팔꿈치로 서로의 옆구리를 치며 책임을 떠넘기던 털뭉치들이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자기도 모르게 훔쳤다고 리아네에게 실토해버린 탓이었다.
“제가 사람들 물건을 훔치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나긋하게 타이르는 리아네에 털뭉치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리아네 님.”
“잘못 했어요. 그런데 단 게 너무 먹고 싶었어요.”
털뭉치 한 명이 털에 묻은 생크림을 쪽 빨아 먹었다.
혼나는 와중에도 어찌나 달콤한지 얼른 등을 돌려 남은 케이크를 와구와구 다 먹어버리고 싶었다.
“그래도 다른 이의 걸 훔치는 건…?”
털뭉치들이 훔친 디저트를 보던 중.
리아네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매번 털뭉치들이 훔쳐오던 디저트와 다를 것이 없었음에도 왠지 모를 기운이 남아있었다.
‘이걸 가지고 있던 사람의 기운이구나.’
케이크를 살피던 리아네가 고개를 돌렸다.
침을 뚝뚝 흘리다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피하는 털뭉치들.
“이걸 가지고 있던 건 어떤 사람이었나요?”
“좀 어벙하게 생겼어요!”
“디저트를 보면서 바보처럼 웃고 있었어요!”
“눈이 파랬는데 저희를 본 거 같았어요!”
“여러분을 봤다고요?”
몸을 일으킨 리아네가 생각에 잠겼다.
원래라면 볼 수 없는 존재들인데 본 거 같다니.
사락.
“…?”
생각 중이던 리아네가 숲의 입구를 바라봤다.
조금 전 케이크에서 느껴졌던 희미한 기운.
그 기운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 * *
“거 더럽게 어둡네!”
사람의 발길이 끊긴 듯한 오래된 공원.
관리되지 않은 나무가 이리저리 뻗은 탓에 공원으론 새카만 어둠이 깔려있었다.
“뭔가 있을 거 같은 공원인데.”
뭔가 공원에 도착하자마자 뙇! 하고 감이 왔었다.
내가 도둑이라면 무조건 여기에 숨겠다는 감이었다.
“그런데 왜 없지.”
감은 항상 빗나가는 게 국룰인 걸까.
공원을 꽤 뛰어다녔는데도 도둑의 흔적은 좀처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케이크라도 사 와서 유인책을 펼쳐야 하나.”
새로운 전략 수립이 필요하다고 느끼길 잠시.
사락.
“!!”
푸른색으로 물드는 눈에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오.”
복잡하게 얽힌 가시넝쿨 너머.
무언가 희미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딱 봐도 도둑놈이 나 여기 있소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서걱!
단숨에 넝쿨을 썰어내며 주변을 살폈다.
“요것 봐라.”
곳곳에 떨어져 있는 빵 부스러기와 미세하게 묻은 생크림의 흔적까지.
감히 나의 것을 털어 간 도둑놈들의 아지트임이 분명했다.
스윽.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는 균열을 바라봤다.
허공에 덩그러니 뜬 채 약간 갈라져 있는 틈새.
과거 일본에서 페샨이 살던 곳으로 이어지던 문과 비슷한 생김새였다.
“으차.”
균열을 잠시 바라보다 망설임 없이 발을 뻗었다.
안에 뭐가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건 도둑놈들을 만난 후 천천히 물어볼 생각이었다.
물론.
“도둑놈들.”
뚜둑.
몇 대 쥐어박은 뒤에 말이다.
“내 케이크 가져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