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정령의 세계
신기하구만.
고개를 돌려 조금 전 지나온 공원을 바라봤다.
한 발자국 차인데도 코로 들어오는 공기와 피부로 느껴지는 온기가 확연히 달랐다.
느낌이 구리진 않네.
고요한 숲의 모습을 한 공간.
악귀참도를 찾으러 갔던 데몬의 세계처럼 삭막하거나 숨이 턱턱 막히는 듯한 느낌은 아니었다.
망자의 세계처럼 서늘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오히려 방금 넘어온 공원보다 조금 더 따스하고 포근한 것 같았다.
어디 빵 부스러기라도 떨어진 거 없나.
범인은 언제나 흔적을 남기는 법.
내가 샀던 것 중엔 잘 부서지는 과자도 있었기에 작은 희망을 걸어보았다.
응?
두 발자국이나 걸었을까.
거짓말처럼 바닥으로 널브러진 빵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왜 진짜 있냐.
봉투에 담겨있었다 보니 바닥을 훑으면서도 진짜 있으려나 싶었는데.
아마 고새를 못 참고 걸어가면서 꺼내 처먹은 모양이었다.
킹 받네.
미간을 잔뜩 구기며 빵 부스러기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도둑놈이 내 디저트를 맛있게 먹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을 거라 생각하니 주먹이 불끈거리고 있었다.
생크림 케잌도 처먹었군.
여기저기 묻은 크림에 열을 올리던 찰나.
바닥을 보며 걷던 시야로 작은 털뭉치가 보였다.
이젠 하다하다 지 몸의 털까지 흘리고 간 모양이었다.
스윽.
털로 손을 뻗었다.
말캉하고 푹신한 것이 침대나 침낭에 넣으면 딱이었다.
“어지간히 급했나 보네. 지 털까지 흘리….”
“그건 내 발이야.”
“갸아아아아악!”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짜아아악!!
울려 퍼지는 시원한 타격음과 함께 저 멀리로 날아 가버리는 무언가.
“뭐, 뭐야. 시발.”
숲에 나동그라진 녀석을 바라봤다.
잠시 얻어맞은 부위에 손을 얹고 어째서…? 란 눈으로 바라보다 추욱 늘어진 걸 보니 기절한 것 같았다.
“털뭉치가 말을 해?”
호다닥 다가가 기절한 녀석을 내려다봤다.
온몸이 삐죽삐죽 털로 뒤덮여 있는 와중에 땡그란 두 눈과 앙증맞은 코, 그리고 입을 가진 녀석이었다.
대충 형태를 보아하니 내가 운전석에서 본 그 실루엣이었고 말이다.
“엄한 걸 치진 않았어.”
정당방위였음을 깨달으며 녀석의 코로 손을 가져다 댔다.
고르게 들숨 날숨을 하고 있는 걸 보니 꿀잠에 빠진 것 같았다.
“도둑질을 했음에도 꿀잠이라니. 이 정도면 나한테 감사해야지.”
고개를 끄덕이며 빙글 몸을 돌렸다.
아마 이놈만 있진 않을 터였다.
조금 더 들어가 도둑질에 가세한 녀석들도 한방에 잡아들일 생각이었다.
뭐가 됐든 나한테 훔쳐갔던 것의 10배 가치로 되돌려받아야 했다.
저벅.
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뺨으로 시원한 공기가 뿜어지는 공간.
나무 사이사이엔 반딧불이 같은 게 있어 묘하게 포근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사아아아아…!
“…?”
갑자기 강해진 시원함에 정면을 응시했다.
걸음을 멈췄음에도 점점 가까워지는 걸 보니 내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느껴지는 걸로 보아 이 공간에 퍼져 있는 시원한 기운의 주인이었다.
데몬은 아닐 거 같고.
무기를 꺼내 들거나 하진 않았다.
조금 전 털뭉치는 데몬보단 페샨과 같은 킹냥이 족에 가까운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푸른빛.
주변이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단순한 반짝임 같은 수준이 아니었다.
눈에 들어오는 시야 전체가 청명한 푸른빛으로 뒤덮이는 중이었다.
어느 정도 지나자 빛 사이에선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고 말이다.
이, 일단 주먹은 보류하자.
뭐가 됐든 등장하면 도둑놈으로 간주하고 일단 두들기고 볼 생각이었는데.
온몸에 신비로움을 잔뜩 두른 존재를 보니 조금 전 털뭉치와는 달리 냅다 손을 뻗기가 쉽지 않았다.
아직 도둑인지도 불분명했고 말이다.
꼴깍.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바로 앞까지 다가온 여자를 응시했다.
여자는 긴 하늘색 머리를 찰랑이며 조용히 날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와 같은 색으로 청명한 느낌이 물씬 드는 눈이었다.
“안녕하세요.”
건네어진 인사에 흠칫 놀라며 얼떨결에 고개를 숙였다.
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놀랍진 않았다.
조금 전 털뭉치도 말은 했었으니까.
단지 귀로 스며든 맑은 느낌이 약간 낯설 뿐이었다.
“리아네라고 해요. 이 공간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정령이고요.”
“백운입니다. 전… 사람이에요.”
“….”
순간이지만 분명 리아네의 눈동자는 잠시 갈 곳을 잃었었다.
벼, 병신 같네.
내가 생각해도 쓰레기 같은 소개였다.
리아네가 정령이라 밝히길래 나도 종족을 밝혀야겠다는 판단이 들어 한 말이었는데.
첫인상부터 조진 기분이었다.
“백운 님이시군요.”
간신히 초점을 찾은 리아네가 무언가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모셔 오라고 정령을 하나 보냈었는데. 혹시 보지 못하셨나요?”
예?
숲속에 처박혀 있을 털뭉치를 떠올리니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본의 아니게 길잡이를 때려눕힌 모양이었다.
걔도 정령이었어…?
데몬은 아니어도 어디 숲에 사는 요괴 정도로 생각했는데 정령이라니.
같은 두 글자 단어지만 느낌이 사뭇 달랐다.
“만나긴 만났는데요.”
자고 있다고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오셨습니까! 리아네 님!”
뒤에서 작은 인기척과 함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꿀잠에서 깨어난 털뭉치였다.
“어디 갔었던 거예요? 길을 잃어버리실까 모셔 오라고 했던 건데.”
리아네의 물음에 볼따구를 슥슥 문지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털뭉치.
불안한 눈으로 그런 털뭉치의 입을 바라봤다.
북슬북슬한 털 덕에 다행히 손바닥 자국이 보인다거나 하진 않았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눈앞에서 불꽃이 번쩍 튀었거든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숲에 누워있었어요.”
“낮잠 잤다는 얘기잖아요. 얼른 침부터 닦아요.”
“츄릅!”
정령이라 순수해서일까.
둘 다 처맞고 기절했을 거란 가능성은 떠올리지 못하는 듯했다.
“괜찮으시다면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저흰 나쁜 정령이 아니니까 안심하셔도 돼요.”
“넵!”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리아네에게 따라붙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마 여기 있는 이들 중 가장 나쁜 놈을 뽑으라면 단연코 나일 것이란 걸.
“음식을 도둑맞으셨죠?”
고개를 끄덕이자 리아네가 옆으로 따라붙은 털뭉치를 쳐다봤다.
“로로. 얼른 도둑질한 거 백운 님께 사과하세요.”
“죄송합니다! 달달한 게 너무 먹고 싶어서 저도 모르게 그만!”
로로라 불린 털뭉치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박았다.
괘, 괜찮아. 넌 죗값을 치렀어.
속으로 말하며 사람 좋은 척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하하…! 괜찮아요.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그랬겠어요. 저도 꼭 도둑을 잡으러 왔다기보단 제가 봤던 버스가 궁금해서 와본 거였어요.”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다행이네요. 아 그리고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백운 님의 눈에 관해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여전히 푸르게 변해 있는 눈으로 손을 옮겼다.
아까부터 쳐다보더니 리아네는 페샨의 눈이 궁금한 것 같았다.
“일본에서 만난 킹냥이… 라고 하면 모르실 거 같고. 페샨 족이라고 고양이 생김새를 하고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종족에게 받았어요. 굳이 표현해야 하는 단어를 찾자면 고양이 정령일 거 같아요. 혹시 아시나요?”
미소를 지은 리아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알진 못해요. 세상엔 워낙 많은 종족이 존재하니까요. 하지만 백운 님이 그들에게 큰 도움을 주셨다는 건 확실히 알겠네요. 사람들이 이세계의 종족이라 부르는 이들은 쉽게 자신의 능력을 전달하지 않거든요. 정말 신뢰하고 은혜를 입은 사람이 아니라면요.”
“그, 그렇군요.”
멋쩍은 이야기에 뒷머리를 긁적거리는 사이.
걸음을 멈춘 리아네가 손을 들어 올렸다.
“도착했어요. 이 공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리아네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슈니아의 호수예요.”
* * *
리아네와 털뭉치 로로가 안내한 호수의 한편.
자리에 앉아 멍하니 호수를 바라봤다.
“와우.”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오는 광경이었다.
딱 봐도 맑고 깨끗한 호수와 그 위를 떠도는 반딧불이 정령들.
반딧불이의 빛이 반사된 호수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중이었다.
“어디서 오신 겁니까!?”
“그 디저트는 어디서 사셨습니까?”
어느새 옹기종기 모인 털뭉치 정령들은 쉴 새 없이 질문을 쏟아내고 있었다.
모두가 도둑질에 가담한 놈들이었지만.
- 이거 남은 겁니다!
먹고 싶어 침을 줄줄 흘리면서도 남은 케이크 등 디저트를 가져온 모습이 딱해 두들길 마음이 싹 사라졌었다.
신비로움 가득한 리아네의 앞이라 두들기고 싶어도 안 그랬을 테지만 말이다.
- 머, 먹어.
이미 여기저기 부서지고 침 범벅이 된 디저트였기에.
미련 없이 도둑 털뭉치들에게 건네줬었다.
“이, 입 좀 닦아.”
다가오는 로로에 옆에 있던 풀잎을 떼어 건넸다.
어찌나 허겁지겁 먹던지 온몸에 생크림을 덕지덕지 묻힌 로로였다.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지은 리아네가 입을 열었다.
“처음 만나는 게 아니셔서 그런지 자연스럽네요. 보통 인간은 자신 외의 존재를 두려워하는데요.”
“보통은 그렇죠. 그런데 만난 게 고양이 족이 끝은 아니거든요. 듀공부터 망자들까지 워낙 골고루 만났었던지라.”
“망자요…? 그들이 사는 세계를 다녀오신 건가요?”
“네 하하. 가서 데려와야 하는 사람이 있어서 갔다 왔어요. 그러다가 새로운 친구도 한 명 만났고요.”
“다양한 모험을 하셨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리아네에 이번엔 내가 궁금한 걸 물었다.
“리아네 님은 원래 다른 정령과 함께 사신 건가요? 잘은 모르지만 호수에 있는 게 전부 다 다른 정령인 거 같아서요.”
“맞아요. 모두 한 종족이 아니죠. 그리고 원래는 저 혼자 이곳에 머물렀었어요. 같은 정령이라 해도 각자에게 주어진 땅과 구역이 있는 게 보통이니까요.”
옆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털뭉치와 호수 위의 반딧불이를 번갈아 보는 리아네.
잠시 한숨을 내쉰 리아네가 말을 이었다.
“여기에 있는 건 모두 자신의 땅을 잃은 정령이에요.”
“땅을 잃었다니…?”
“정확히 말하면 빼앗긴 거죠.”
리아네가 허공으로 손을 흔들자 호수의 물이 모여들었다.
이내 물방울로 흩어지며 물로 이루어진 작은 그림이 그려졌다.
“데몬?”
딱 봐도 못되게 생긴 놈에 입을 열자 리아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양한 존재가 뒤섞여 있어 이들이 무엇이다 정의 내리긴 힘들지만, 인간들이 데몬이라고 부르는 존재에요.”
별놈이 다 섞여 있긴 하지.
당장 지금까지 만났던 놈들만 떠올려도 제각기 다른 생김새와 힘, 그리고 생각을 가졌었다.
“물론 정의 내리긴 힘들어도 데몬이라 불리는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어요.”
“공통점요?”
“기본적으로 무차별적인 살의와 탐욕, 광기에 물들어 있다는 거죠.”
공감하는 바였다.
말을 못 하는 놈이야 나타나자마자 냅다 공격부터 해대니 살의에 관해선 더 말할 것도 없었고, 의사 표현을 할 줄 아는 놈은 여기에 광기와 탐욕이 더 해졌었다.
다 싸이코였지.
지금까지 만난 놈들은 모두 뒤틀려 있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단순무식한 데몬보다 압도적으로 위험한 수준으로 말이다.
“데몬들이 정령의 땅을 빼앗은 거군요.”
“네. 빼앗았고, 또 빼앗고 있죠. 계속해서 쉬지 않고요.”
“데몬이 정령의 땅을 노려서 빼앗는 이유가 있나요?”
잠시 말을 멈춘 리아네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데몬이 빼앗으려 하는 건 정령의 땅뿐만이 아니에요. 그들이 원하는 건.”
내게 눈을 맞춘 리아네가 슬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든 존재의 땅이니까요.”